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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새로운 출발

by 로도스로

손아정의 얼굴에선 감정을 느낄 수 없었다. 기쁨도 슬픔도 분노도 보이지 않는 창백한 표정이었다. 손아정은 합의서를 오영훈에게 전달했다. 오영훈이 웃음을 지었다. 승리자의 거만한 웃음이었다.

손아정은 똑바로 오영훈을 쳐다봤다. 오영훈을 보기만해도 주눅들고 작아지기만 하던 예전의 손아정과는 한결 다른 모습이었다.

‘어쭈. 이것 봐라. 그새 많이 컸는데?’

합의서를 맞잡은 상태로 두 사람의 눈빛이 팽팽하게 부딪혔다. 흡사 줄다리기라도 하는 모양과 비슷했다.

“지금 뭐하는 거야?”

오영훈이 작게 말했다. 하지만 손아정은 반응하지 않았다. 손아정은 고개를 돌려 손준철을 바라봤다. 이 상황이 무척이나 곤혹스러운 듯 손준철은 아예 바닥으로 시선을 내리깔고 있었다. 손준철의 마음은 복잡미묘했다. 한편으로 이게 아정이의 미래를 위한 그나마 나은 선택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이것밖에 선택할 수 없나 싶어 답답하고 화가 났다. 오영훈이 손아정에게 얼굴을 가까이 대며 귓속말을 했다.

“어차피 합의서 낼 거면서 괜히 시간 끌지 말고 빨리 전달해. 나 그렇게 한가한 사람 아니니까.”

“알겠어요.”

드디어 손아정이 입을 뗐다. 그리고 바로 그 직후에 손아정이 합의서를 확 잡아 당겼다. 합의서를 놓친 오영훈은 뻥진 표정을 지었다.

“이게 무슨?”

손아정은 합의서를 뺏는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합의서를 두 손으로 잡은 뒤 세로로 길게 찢었다.

찌익! 합의서 찢어지는 소리가 법정을 울렸다.

손아정은 합의서를 갈기갈기 조각낸 뒤 그 조각을 오영훈의 얼굴에 던졌다. 종이 조각이 오영훈의 얼굴에 덕지덕지 붙었다.

“이년이 미쳤나?”

놀란 건 오영훈뿐만이 아니었다. 재판부도 흠칫 놀랐다.

“피고인, 법정에서 소리지르지 마세요. 언행도 조심하시고요. 피해자 측은 지금 무얼 하는 겁니까?”

손아정이 말했다.

“저는 지금 피고인 오영훈과 합의를 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결기 가득한 목소리였다.

“재판장님. 몇 가지만 말씀드려도 될까요?”

“그러시죠.”

“피고인, 정확하게 말하면 피고인 측 변호인은 합의를 하면 저에게 3억 원을 준다고 했습니다. 대학도 알아봐 준다고 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솔깃한 제안이었습니다. 마음이 흔들렸던 것도 사실입니다. 피고인에게 어떤지는 모르지만 저같은 사람에게 그 돈은 아주 큰 돈입니다. 제안을 받으니 그동안 하고 싶었지만 돈 때문에 할 수 없었던 일들이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그 돈을 받고 늦었지만 대학에 진학하여 남들처럼, 평범하게 지내는 건 어떨까 생각해보기도 했죠.”

손아정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제 머릿속에 이런 의문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 돈을 받고 나면 내가 입은 피해는 어떻게 되는 걸까?’ 제가 겪은 피해는 돈으로 치유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피고인 오영훈이야 이미 다 잊고 편안하게 살고 있겠지만, 전 아닙니다. 지금도 밤이면 식은땀을 흘리며 깨어나곤 합니다. 별것 아닌 일에 소스라치게 놀라고 분노가 치밀어 오는 것도 일상입니다. 슬픈 일이지만, 아마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겁니다. 지금 저에게 필요한 건 가해자 오영훈의 진지하고 처절한 반성입니다. 하지만 오영훈은 반성할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고 오히려 저를 꽃뱀으로 몰아가려는 파렴치한 행동을 일삼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과 합의를 하다니요?”

손아정의 이야기는 어느새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피고인 오영훈에게 최대한의 처벌을 내려주시길 바랍니다.”

말을 마친 손아정은 자리로 돌아와 털썩 주저앉았다. 온몸의 에너지를 다 소진한 까닭이었다.

“피해자 측의 진술 잘 들었습니다. 재판부의 합의가 필요하니, 10분간 휴정한 뒤 판결 선고를 하겠습니다.”

***

“아정아!”

손준철은 긴말하지 않고 손아정을 가만히 꼭 안았다.

“아빠.”

법정 밖 복도에서 두 사람은 서로를 그렇게 위로했다. 부둥켜안고 있는 두 사람을 떼어놓은 건 오영훈이었다. 오영훈은 손아정의 어깨를 잡아 자기 쪽으로 휙 당겼다.

“지금 장난하는 거야? 버러지만도 못한 것들이 어디서 사람을 갖고 놀려고 해?”

뒷통수를 제대로 맞았다고 생각한 오영훈의 얼굴은 분노로 가득차 있었다.

“니가 이딴 식으로 행동하고도 무사할 것 같아?”

오영훈은 주먹을 치켜들었다. 당장이라도 무슨 일을 저지를 것 같은 험악한 분위기였다. 그때 누군가 오영훈은 팔목을 잡았다.

“어떤 개새끼야?”

“머리에 똥만 들어서 그런가? 입만 열면 오물이 튀어나오네. 온몸이 아주 시궁창이야.”

고혁두였다.

“이렇게 신성한 법원에서 피해자를 협박하면 쓰나?”

“넌 또 뭐야?”

오영훈이 고혁두를 노려봤다.

“나 누군지 몰라? 피해자를 대리하고 있는 피해자 변호인이잖아. 너 같은 쓰레기들을 분리수거하는 게 내 일이기도 하지. 법조인으로서 조언을 하나 할게. 백번 천번 반성을 해도 모자랄 피고인이 피해자를 겁박하고 있는 지금 이 상황을 재판부가 알면 어떻게 될까? 못해도 당신 형량이 두 배는 높아질 거야. 어떻게 재판장님께 말씀드려 볼까?”

“치사한 새끼.”

“재판장에게 말하는 게 싫으면 다른 방법도 있어. 지금 여기서 당당하게 나랑 한 판 붙어 볼까?”

고혁두의 손에 힘을 가득 주었다. 고혁두의 아귀힘이 어찌나 센지, 오영훈의 팔목이 하얗게 질렸다. 오영훈의 얼굴이 심하게 구겨졌다. 참다못한 오영훈이 소리를 질렀다.

“아악! 내가 잘못했어. 이것 좀 놔줘.”

고혁두가 오영훈 쪽으로 몸을 기울여서 말했다.

“할 줄 아는 게 약한 사람 괴롭히는 것밖에 없는 놈이 어디서 까불어?”

소원철 변호사가 고혁두와 오영훈 사이를 갈라놓았다.


***

휴정 시간이 끝나자 재판부가 다시 법정으로 들어왔다.

“지금부터 피고인 오영훈에 대한 판결 선고를 시작하겠습니다. 피고인 오영훈은 연예기획사를 운영하던 중 연습생 신분이던 피해자에게 성폭행을 저질렀습니다. 이에 대해 피고인은 성관계 자체는 인정하면서도 그러한 성관계는 강제가 아니라 합의에 의한 것이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피해자는 합의가 없었다고 반박하고 있습니다. 피해자는 일관되게 피해 사실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피해자의 진술이 구체적이고 일관될 뿐만 아니라, 피해를 당한 직후 피해자가 연예기획사를 떠난 사정 등 당시의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보면, 두 사람의 상반된 주장 중 피해자의 주장이 더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재판장은 판결문을 계속 읽어 나갔다.

“한편 피고인은 사건 발생 직후 두 사람이 카페에 가서 사진을 찍었다는 점을 근거로 합의에 의한 성관계였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피해자 측이 제시한 카페의 영수증과 영수증에 적힌 ‘죽고 싶다’라는 글씨를 볼 때 피고인의 주장을 인정하기 어렵습니다. 사정이 이와 같은데도 불구하고, 피고인은 현재까지 범행을 부인하며 피해자의 피해 회복을 위한 노력을 전혀 하지 않고 있고 피해자는 여전히 극심한 고통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피고인의 죄질이 매우 나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본 법정은 다음과 같이 판결합니다.”

법정이 매우 조용해졌다.

“피고인 오영훈을 징역 7년에 처한다. 피고인에 대한 등록정보를 5년간 정보통신망을 통하여 공개하고, 고지한다.”

손아정과 고혁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에 반해 오영훈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이....게 무슨.....”

오영훈은 말을 더듬었다.

‘말도 안 돼. 내가 감옥에 가다니... 그것도 무려 7년이나!’

오영훈은 이대로 물러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방청석을 향해 몸을 돌렸다.

“아정아, 내가 정말 잘못했어. 술 먹고 실수로 그런 거야.”

얼마나 다급했던지 오영훈은 무릎까지 꿇고 두손을 맞비볐다.

“내가 이렇게 빌 테니 한 번만 용서해 줘.”

눈물과 콧물이 오영훈의 얼굴을 덮었다. 짠한 마음이 들 정도로 망가질대로 망가진 몰골이었다. 손아정이 방청석에서 일어난 뒤, 차분한 말투로 말했다.

“지금부턴 참회의 시간입니다. 교도소에서 본인의 행동을 곱씹으면서 철저하게 반성하길 바랍니다.”

손아정이 단호하게 나오자 오영훈은 목표를 바꿨다.

“판사님! 다시 한 번 생각을 해 주시길 바랍니다.”

하지만 재판장도 흔들리지 않았다.

“이미 판결은 선고되었습니다.”

오영훈은 소원철 변호사를 쏘아봤지만, 소원철 변호사는 오영훈의 시선을 회피했다. 교도관 두 명이 오영훈에게 다가와서 양팔을 붙잡았다. 오영훈은 분노에 차득 차서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자존심 따위는 다 접어두고 납작 엎드렸는데도 바뀌는 게 없다고 생각하자, 본색을 드러냈다.

“놔! 이거 안 놔! 감히 내까짓 것들이 뭔데....”

오영훈이 온몸으로 발악했다.

“XX, 이럴 순 없어.”

이런 일을 흔하게 겪는 교도관들은 동요하지 않고, 더욱 오영훈을 강하게 잡았다. 오영훈은 질질 끌려서 법정 밖으로 쫓겨났다.


***

오영훈에게 유죄 선고가 내려진 저녁, 손아정의 집에서는 소고기 파티가 열렸다. 마블링이 잘 된 최고급 한우가 불판에 닿으며 나는 치지직 소리와 고소한 냄새가 군침을 돋구었다. 고기가 다 구워지고 나자 고혁두, 심정순, 손아정, 손준철이 자리에 둘러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즐거운 파티에 술이 빠질 수 없었다. 시작은 소맥이었다.

“자, 건배하시죠.”

손준철이 먼저 잔을 들자, 다른 세 사람도 잔을 따라 들었다.

“변호사님, 그동안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손준철이 감사를 표했고, 이어서 손아정이 말했다.

“변호사님, 너무 감사드립니다. 어떻게 다 감사를 표시해야 할지 모를 만큼 고맙습니다.”

고혁두가 대답했다.

“아니에요, 제가 한 건 별로 없습니다. 오영훈이 죗값을 받은 건 아정 씨가 잘 해줬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엄청 힘들었을 텐데, 잘 버텨주어서 고마워요. 물심양면으로 많이 도와주신 두 분께도 깊이 감사드려요.”

맛있는 음식에 적당한 알코올이 가미되자 집안에 활기가 돌았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따스함이었다.

“이제 이 집에서 지낼 날도 며칠 안 남았네요.”

고혁두가 말하자, 손준철이 아쉬워했다.

“좀 더 계시지 않고 바로 떠나시게요?”

“두 분이 워낙 잘 대해 주셔서 마치 저희 집인 것처럼 편안한 느낌이 들긴 하지만, 제가 한곳에 오래 머무를 팔자가 아니라서요.”

“재판 끝나자마자 바로 가신다니 참 아쉽고 안타깝네요. 근데 어디로 가시려고요?”

“글쎄요.”

다음 목적지가 어디일지는 고혁두도 알지 못했다. 지금까지 행선지를 알려준 것은 휴대폰였는데, 아직은 휴대폰에 특별한 안내가 없어 고혁두도 궁금해하던 차였다.

“발길 닿는 대로 가야죠. 아버님은 앞으로 어떻게 하실 예정이세요?”

“예전 아파트에서는 잘렸지만, 관리소장님이 다른 아파트를 소개해줘서 다음 달부터 그 아파트에서 일을 할 예정입니다.”

“실직자 되실까 봐 걱정했었는데, 잘 되었습니다.”

고혁두는 손아정을 바라봤다.

“아정 씨는요? 혹시 앞으로의 계획 같은 거 있어요?”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고민이 많았어요. 변호사님께 부탁드리고 싶은 것도 있고…”

“저에게요?”

“저 혹시….”

고혁두, 손준철, 심정순이 손아정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저도 변호사님과 함께 길을 떠나도 될까요?”

“네?”

고혁두가 놀라서 되물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손아정의 말에 손준철도 상당히 놀랐다.

“아정아,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야? 집을 떠나서 방랑을 하겠다고?”

“네, 아빠.”

손아정은 제법 단호하게 말했다.

“제가 그동안 거의 집에서만 지냈잖아요. 아빠 덕분에 안락하게 지내긴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답답하기도 했어요. 이제는 세상으로 한 발짝 더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집에 콕 틀어박혀 있는 딸의 모습을 볼 때마다 안타까움을 느꼈던 터라, 손준철도 손아정이 한 말의 취지에는 공감했다.

“네 심정을 알 것 같긴 한데, 그렇다고 꼭 변호사님과 함께 가야 하는 건 아니지 않니? 변호사님께서 불편하실 수 있고….”

고혁두가 불편해할지도 모른다는 건 손준철의 진심이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앞선 건 딸에 대한 걱정이었다. 행선지도 딱히 정해져 있지 않고 전국을 떠도는 것 같은데, 잠자리도 불편하고 먹는 것도 부실할 수 있었다. 딸이 그 길에 따라나섰다가 괜히 고생을 할까 봐 우려스러웠다.

“아빠가 뭘 걱정하는지 잘 알아요. 하지만 집에서 아무 것도 하는 것 없이 정체된 상태로 지낼 수는 없잖아요. 이번 사건을 통해서 많은 걸 배웠어요. 가장 크게 배운 건 두렵더라도 용기를 내고 맞서야 한다는 교훈이었어요. 그래서 좀더 그런 경험을 하고 싶어요. 저도 이제는 저의 알을 깨고 세상에 나가야 할 때가 된 것 같아요.”

손아정은 고혁두를 바라봤다.

“물론 변호사님께서 동의를 해 주셔야 하겠지요. 혹시라도 변호사님께서 조금이라도 제가 불편하다고 하시면 억지를 부리고 싶지는 않아요.”

공이 고혁두에게 넘어온 셈이다. 고혁두는 생각에 잠겼다. 지금까지 보아온 바에 따르면 손아정은 심성도 착하고 인간적인 매력도 넘쳤다. 같이 여정을 떠나기에 부족한 구석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 길이 신나는 여행이 아니라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괜히 고생을 하게 될지도 몰랐다. 고혁두의 그런 마음을 알고 있다는 듯 심정순이 말했다.

“아정아, 잠자리도 그렇고 먹는 것도 그렇고 여러 가지로 불편한 게 많을 텐데 괜찮겠어?”

“전 괜찮아요,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하잖아요.”

“어디로 갈지도 확실하지 않은데?”

“목적지를 모른다는 건 설레는 일이죠.”

손아정이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변호사님, 아정이가 저렇게 원하니 같이 가도 된다고 하는 게 어떨까요? 저 같은 늙은이랑 단둘이 있는 것보다는 훨씬 덜 칙칙하지 않을까요?”

심정순이 은근하게 고혁두를 설득했다. 드디어 고혁두가 결심했다.

“네, 좋습니다. 앞으로 어떤 일이 펼쳐질지 알 수 없고 고생길이 될지도 모르지만, 함께 하시겠다면 전 환영입니다.”

고혁두의 동의를 얻자, 손아정의 눈길은 손준철에게로 향했다. 손아정은 아버지 손준철의 눈을 그윽하게 바라봤다. 눈빛에는 간절함이 가득 묻어 있었다. 혹시라도 손아정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몰라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손아정이 강하게 원하고 있었다. 이렇게 밝게 빛나는 딸의 눈망울을 본 게 얼마 만인가. 손아정이 이렇게 의욕적인 모습을 보이는 건, 그 사건 이후로 처음이었다. 아무리 아버지라고 해도 딸이 저렇게 간절히 원하는 걸 막을 도리는 없었다. 여행을 떠날 거라면 혼자보다는 동행이 있는 게 낫다. 그리고 고혁두와 심정순이라면 충분히 믿을 만했다.

“다들 그렇게 생각하신다니, 저도 찬성입니다. 변호사님과 여사님께 아정이 좀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아정이 넌 두 분 말씀 잘 들어. 속 썩이지 말고.”

그렇게 손아정은 고혁두의 여정에 동행하는 두 번째 사람이 되었다.


***

모두가 잠든 밤, 고혁두의 전화기가 울렸다.

잠에 취한 고혁두가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변호사님.”

어디선가 들어본 목소리였다.

지난번에 전화를 걸어 고예지를 죽였다고 말한 사람이었다.

“당신 누구야? 왜 계속 전화를 하는 거야?”

“제 목소리를 기억하시는군요. 역시 머리가 똑똑하시군요.”

지난번에 전화했을 때와 달리 남자는 차분했다.

“변호사님이 궁금해하실 것 같아 전화를 드렸습니다.”

“내가 뭘 궁금해한다는 거야?”

“고예지 사망 사건의 진실이요.”

고혁두의 머리칼이 곤두섰다.

“궁금하지 않나요? 당신 동생이 왜 죽음을 당한 건지?”

“그건 이미 알고 있어. 내가 검사로 있을 때 수사한 안강인이 범인이고, 그 새끼는 지금 감방에 쳐박혀 있어.”

“그게 진실의 전부일까요?”

‘이게 무슨 황당한 소리야?’

고혁두가 알고 있는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안강인은 자신이 처벌받고 감옥에 간 게 고혁두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앙심을 품고 복수를 계획한 안강인은 출소한 뒤 고혁두의 동생을 살해하는 범죄를 저질렀다. 고예지를 죽인 범인이 안강인이라는 건 이미 확실하게 밝혀진 사실이다. 안강인도 자백을 했고, 범행 현장에는 안강인의 족적도 발견되었다. 더군다나 살해 도구로 사용된 총기에서 안강인의 지문도 나왔다. 이 정도면 범인이라는 게 확실했다.

그런데 지금 의문의 남성은 그게 전부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표면적으로 보면 그 사건은 안강인이 변호사님에게 복수를 한 게 맞습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게 빙산의 전부는 아니지 않습니까?”

고혁두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당신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거야?”

남자는 대답을 하는 대신 다른 말을 했다.

“이 사진을 보면 생각이 달라질 겁니다.”

그 말을 끝으로 남자는 전화를 끊었다. 문자 메시지가 도착했고 사진 한 장이 첨부되어 있었다.

“아니, 이 사진은….”

사진엔 열쇠고리가 찍혀 있었다. 고혁두는 그 열쇠고리를 한눈에 알아봤다. 그 열쇠고리는 엄마가 유품으로 남긴 것이었다. 그래서 고예지는 열쇠고리를 항상 가방에 달고 다녔다.

‘이걸 어떻게 저 남자가 갖고 있는 거지?’

당장 전화를 걸어서 묻고 싶은 게 산더미였지만 문자발신 번호는 0000이라 전화를 걸 수가 없다. 그때 하얀빛이 반짝였다. 시야를 가득 메운 빛이 사라지고 난 뒤, 고혁두는 자연스럽게 휴대폰을 꺼냈다. 역시나 바탕화면의 사진이 바뀌어 있었다.

고혁두에게 새로운 행선지가 정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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