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매력도시 연구소 Jan 27. 2018

매력 풍경을 발견한 남자들: 비에이 쿰푸샤

매력도시 매거진 | 스페셜 리포트_홋카이도 (3)

눈으로 가득찬 평원에 해가 집니다.

태양의 붉은 기운이 잠시 지평선에 머물더니, 설원은 밤의 빛을 받아 파랗게 빛납니다. 느리게 조명이 꺼져가는 무대처럼 통나무 집을 둘러싼 대평원이 어둠에 잠겨갑니다.

홋카이도 비에이美瑛에 있는 펜션 <쿰푸샤 薫風舎>에 왔습니다. 망망한 바다에 놓인 섬처럼, 끝없이 이어지는 언덕이 집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창문가 라운지 체어에 앉아 우리는 오랫동안 설국의 어둠을 감상했습니다.


처음 온 곳이지만 집 안 분위기가 눈에 익숙합니다. 불을 지 핀 벽난로 옆에는 나무를 깎아 만든 오래된 테이블이 있습니다. 나무 의자에 깊숙이 앉아서 장작불과 눈높이를 맞추고 나무가 타오르는 모습을 느긋하게 바라봤습니다. 오래된 탄노이 스피커에서 재즈 음악이 흘러나옵니다. 느릿하게 스탠더드 넘버를 르는 프랑스 여가수의 노래를 들으며 조그만 종이에 인쇄된 쿰푸샤 펜션의 소개를 읽어봤습니다.



끝 모를 파도처럼 펼쳐지는 아름다운 시골 풍경,

석양이 비추는 산맥.

그리고 시시각각 모습을 바꾸어가는 거대한 구름...


멀리 그리운 세계에 몸을 두고,

온화한 시간의 흐름을 느긋하게 맛보아 주셨으면...      


쿰푸샤 薫風舎는

그런 소원에서 태어난 밭의 작은 숙소입니다.


어둠 속에 다시 눈이 내립니다.

대평원을 가득 채운 눈송이들이 집 앞에 차곡차곡 쌓입니다. 이때 쿰푸샤의 사장님이 갑자기 등장, 불도저를 몰고 우르르 소리를 내며 마당에 들어섭니다. 커다란 삽을 움직여 호쾌하게 집 앞에 쌓인 눈을 치우더니, 우리와 눈을 마주치지도 않고 조용히 안쪽 주방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짙은 눈썹이 인상적인 중년의 남자 주인입니다.



다시 고요해진 통나무집.

눈 오는 밤, 벽난로에서 장작이 튀는 소리,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따뜻한 음색의 보컬. 통나무 집에서 저녁을 보내고 있자니, 시각, 후각, 청각이 새롭게 깨어나는 기분입니다. 시간이 느려질수록, 감각은 예민해지나 봅니다. 많은 정보를 처리하느라고 바쁘게 움직였던 눈, 코, 귀가 미세한 소리와 냄새를 분별할 여유를 가진 것 같습니다.

주방 안에서 그릇들이 달그락달그락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고, 맛있는 재료들이 오븐에서 익는 냄새가 새어 나옵니다. 짙은 눈썹 사장님이 앞치마 차림으로 다나타났습니다. 눈 맞춤 없이 조용히 스테레오로 다가가더니 재즈 음악을 현악 4중주로 바습니다. 볼륨을 미세하게 낮춥니다. 저녁 식사 시간입니다.


그리고, 테이블 위로 놀라운 음식들이 하나하나 놓이기 시작했습니다. 차게 식힌 라따뚜이. 감자와 크림을 번갈아 쌓아서 오븐에 구운 포테이토 그라탕. 농후한 콘 수프에 가라앉은 신선한 옥수수 알갱이. 차고, 뜨겁고, 바삭하고, 부드러운 음식들이 리드미컬하게 이어집니다. 거침없이 눈을 치우던 홋카이도의 쾌남 중년이 주방으로 들어가더니, 프랑스 시골풍의 담담하고 솜씨 좋은 음식을 내놓는 요리사로 변신했습니다.


눈 오는 밤, 벽난로에서 장작 튀는 소리.
고요한 통나무집에서 감각이 새롭게 깨어납니다.


1971년, 한 사진작가가 풍경 사진을 찍기 위해 일본을 여행합니다. 남쪽에서 출발한 그는 일본 열도를 종단하며 천천히 북상, 마침내 홋카이도에 이릅니다. '이쯤 하고, 도쿄로 돌아 가볼까', 하며 귀가하는 길에, 우연히 그는 놀라운 풍경을 마주하게 됩니다. 대평원 위에 감자꽃이 피어오르고, 끝도 없이 이어지는 언덕이 식물의 다종 다양한 색깔로 물든 모습 말입니다. 그는 정신없이 카메라의 셔터를 눌러댔고, 이후 오랫동안 도쿄와 홋카이도를 오가며 수많은 사진을 찍었습니다.


마에다 신조 前田真三


세계적인 풍경사진작가 마에다 신조 前田真三가 홋카이도의 비에이를 발견한 일화입니다. 마에다 신조가 공개한 사진을 본 사람들도 깜짝 놀랐습니다. '이런 풍경이 일본에 있었던가?' 평범하기 그지없는 보리밭, 감자밭, 사탕무 밭이 품은 놀랍도록 풍성한 색채를, 사람들은 사진작가 한 사람에 의해 알게 됩니다. 마에다 신조가 의미를 부여하기 전까지 사람들은 비에이 언덕이 감추고 있는 매력을 알지 못했습니다. 완만한 경사지를 잘 이용해서 골프장이나 해볼까, 하며 부동산 업자들이 어슬렁거리던 마을이었습니다. 오스카 와일드는 "제임스 휘슬러가 그림을 그리기 전까지 런던의 안개는 존재하지 않았다" 고 했는데, 비에이의 풍경이야말로 마에다 신조가 이곳에 멈춰 서서 셔터를 누르기 이전과 이후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여름 보리밭과 겨울 설원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옵니다. 아마추어 사진작가들이 찾아오고, 영화와 드라마의 인기 배경이 되었습니다. 비에이는 한 사람의 힘으로 매력을 발견한 지방 소도시였습니다.


한 사람의 힘으로
매력을 발견한 지방 소도시


비에이의 풍경을 새롭게 발견한 또 한 남자를 소개합니다. 도쿄에서 샐러리맨으로 근무하던 모이와케 유키오 씨는 비에이의 벌판 한가운데 통나무집을 짓습니다. <쿰푸샤>. 훈훈한 바람이 불어오는 집이라는 이름을 붙인 펜션에서 그는 비에이의 평원을 보러 오는 손님을 맞이했습니다. '온화한 시간의 흐름을 느긋하게 맛보아 주길' 바라며, 그는 불도저로 눈을 치우고 음악을 고르고 감자 그라탕을 요리합니다. 계절감 뚜렷한 비에이의 풍경을 매일매일 사진으로 찍어서 간단한 메모와 함께 홈페이지에 올려둡니다.


[휴대폰 카메라 소식]

2004/02/20   단정하고 긴장된 공기가 기분 좋은 비에이입니다. 오늘 아침 수은주는 -15 ℃였습니다.

2015/08/25   벼의 색깔, 푸른 하늘과 흰 구름이 아름다운 계절입니다.

2007/09/25   창 밖은 차가운 비. 이 가을 처음, 난로에 불이 들어갔습니다.

2018/01/12   오후에는 푸른 하늘이 펼쳐져, 설원에 나무의 그림자가 흘렀습니다.


통나무집 펜션이라고 하면 흔히 과장된 시골풍 공간, 테라스 바베큐, 개성 강한 주인과의 대화가 떠오르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쿰푸샤의 주인은 특별히 손님에게 말을 걸거나 참견을 하는 일이 없습니다. 조용히 움직여서 때 맞춰 음악을 바꾸고 사라져 버립니다. 적절하게 생활감이 묻어나는 소박한 공간에서 웬만한 도시의 레스토랑을 넘어서는 훌륭한 음식을 냅니다. 도쿄를 떠나, 24년째입니다.



완벽한 고요 속에서 우리는 하룻밤을 보냈습니다.

새벽의 비에이는 공기마저 얼어붙은 듯했고, 바람이 불자 눈안개가 피어올랐습니다. 쿰푸샤의 신비주의 주인은 어느새 아침을 위한 음악을 골라두고 주방으로 사라졌습니다. 아침 식사를 기다리며 핀란드 작곡가의 피아노 곡을 들었습니다. 이곳이 북유럽의 평원과 닮았을 수도... 나무의 그림자가 길어지면서 천천히 사방이 밝아왔습니다.



우리는 그 도시의 정체성을 담아내는 장소에서
하룻밤 머물기를 원합니다.

인구가 만 명 정도 되는 도시, 비에이의 매력은 자연입니다. 시간이 만드는 자연의 변화가 비에이의 특산물입니다. 여름에는 영상 30도, 겨울에는 영하 30도에 이르는 이곳에서, 계절은 또렷한 개성을 가진 풍경을 만들어냅니다. 그 풍경을 바라보기에 알맞은 숙소가 바로 쿰푸샤 였습니다. 사람들은 이곳에 오직 고요함을 즐기러 찾아옵니다. 느긋하게 흘러가는 시간과 계절이 빚은 풍경. 비에이가 감추어둔 진짜 매력을 아는 사람들 말입니다.


도시의 매력은 갈수록 세분화되고 있고, 우리는 그 도시만의 정체성을 담아내는 장소에서 하룻밤 머물기를 원합니다. 매력 도시를 대표하는 호텔, 혹은 숙박시설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그래서 요즘, 지역 호텔들은 자신의 취향을 날카롭게 정돈하고, 자신의 코드와 맞는 사람들을 불러 모으기 위해 애씁니다. 그리고 그들을 불러 모으기 위해서는 자신의 취향을 증명해야 합니다. 호텔의 스토리, 공간, 서비스, 음식, 침대, 조명 같은 것들로 말입니다.


쿰푸샤에서 우리가 발견한 것은 오직 밭의 전망만을 바라보러 오는 의식 있는 고객들이 충분히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취향을 잘 받아낼 수 있는 집을 그에 어울리는 사람이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도쿄를 떠나 허허벌판의 풍경에 의지해 통나무 집을 짓고, 20년 넘게 계절의 변화를 기록하는 한 남자였습니다. 북유럽 가구로, 비누 브랜드로, 미니바 스낵으로 자신의 취향을 증명할 필요가 없는, 대평원을 닮은 고요한 주인이 이에 걸맞은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매력도시연구소]



매력도시 매거진 스페셜 리포트_홋카이도

1편: [특집] 매력도시연구소, 홋카이도 리포트

2편: 후라노의 눈 밭에서 달콤한 푸딩을: 아무푸린 제조소



매거진의 이전글 후라노의 눈 밭에서 달콤한 푸딩을: 아무푸린 제조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