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저런 여행 단상
열흘 뒤면 나는 낯선 곳에 도착해 있을 것이다. 홀로 공부는 하러 떠나본 적은 있지만, 온전히 혼자 여행을 하기 위해 떠나본 적은 없다. 서른 중반이 넘어서까지 왜 그래본 적이 없었을까. 그것보다도 더 궁금한 것은 과연 여행을 가서 무엇을 해야 하루하루 즐겁게 보낼 수 있을 지이다. 덥고 습한 나라로의 긴 여행을 앞두고 나는 매일 고민하고 있다. 가서 뭐하지?
그러니 이제까지 여행가서 무엇을 했는지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해보자.
첫 여행은 중학교 1학년 겨울 방학에 온 가족이 다같이 괌으로 휴가를 다녀온 것이다. 그때는 인천 공항이 없었기에 김포 국제공항으로 출국을 했다. 부모님은 이미 여러 번 해외 여행을 다녀오신 터라 비행기 타는 것에 어색함이 없으셨다. 나는 이륙 후에 너무 시끄러운 소리가 나고 귀가 먹먹해서 한 십분 정도 얼이 빠졌다. 광활한(딱 이 표현밖엔 없다) 하늘과 바다가 있는 괌에서는 대체로 수영을 했다. 리조트에서 수영하고, 바다에서 수영하고, 제트 스키 타고, 스노클링 하고, 그 사이사이에 괌의 전통 공연도 보고 쇼핑도 다니고 무슨무슨 관광 명소에도 가고. 우리 가족 말고는 거의 다 신혼 여행을 온 커플들이었다. 그때는 괌과 사이판이 핫한 허니문 장소였던 것 같다. 그야말로 전형적인 중산층 가족의 휴가를 즐기고 왔더니 곧 IMF 사태가 터졌다. IMF가 아니었어도 대학교에 입학할 때까지는 여행 갈 생각은 하지 않았다. 나같이 2% 부족해서 늘 노력해야 하는 학생은 방학이라 할지라도 학교와 학원에 가서 죽도록 공부하는 것이 당연했다. 무엇보다 집에서도 맨날 보는 부모님과 굳이 같이 놀러가고 싶은 욕구가 없었다. 요새는 아이들이 계절마다 비행기타고 싶다고 조른다던데. 나는 친구들과 강남역 시티극장에서 영화보고 압구정 ‘뱃고동’에 가서 밥 먹고 이태원 가서 옷 구경하는 게 더 좋았다. ‘뱃고동’은 아직도 있나 모르겠네.
두 번째 여행지는 북경이었다. 그 때는 인천 공항이 생긴지 얼마 안 된 시기라 출국장 자체에 사람이 별로 없었다. 요새는 언제 어느 때에 가더라도 사람이 너무 많아서 혼이 다 빠질 지경인데. 몇 달 전 만료된 여권을 다시 신청하러 집 근처 시청의 여권민원과에 갔다. 한 살도 안된 아기도 엄마 품에 안겨서, 호호백발 할머니 할아버지도 지팡이를 짚고 오셔서 여권을 신청하시더라. 인간은 왜 이렇게 어딘가로 떠나고 싶은지, 나는 그걸 언제까지 원할 것 같은지 잠시 생각이 빠졌다.
대학교 3학년 여름 방학에 리타 언니와 함께 북경에서 교환 학생으로 공부하고 있는 쭝궈 언니를 만나러 갔다. 일주일 동안의 숙소는 북경 사범대학교의 외국인 학생 기숙사. 방학이라 비어 있는 숙소를 이렇게 여행자들한테 개방했다. 당시 나는 여행을 떠나기 직전 학기에 운 좋게도 성적 우수 장학금을 받았는데, 사실 받았다고 하기도 애매한 것이 등록금에 장학금 가격이 깎여서 고지서가 날라온다. 1학년 1학기에 모든 과목을 C+ 받은 것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그 때는 한일 월드컵이 있었기에 개차반 같은 성적표도 용서되던 아름다운 시기였다). 언니들과 북경에 놀러가고 싶어 하는 내게 엄마가 장학금만큼의 돈을 주셨다. 중국 여행은 이걸로 다녀와라.
그 때 나는 스물 한 살이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부모님 없이 이역만리 타국으로 떠난다고 생각하니 너무 흥분해서 며칠 동안 잠을 자지 못했다. 꽤 고사양의 디지털 카메라도 챙겼다. 후면 액정 화면을 위로 올릴 수 있어서 셀피도 잘 찍을 수 있었다. 사진 찍어서 싸이에 올려야지. 지금 아이폰 8 플러스를 쓰고 있는데 정말 아련한 추억이다. 그 여행에는 중국 동방 항공을 이용했다. 비행기 티켓도 종로에 있는 탑항공 사무실에 가서 직접 예약했다. 덜 떨어진 자식이 못내 걱정된 우리 엄마가 사무실에 전화해서 부모없이 어디 나가는 건 처음인 여자애들이니 담당자님이 신경 써서 잘 처리해달라고 거듭거듭 부탁하셨다. 멋진 담당자님 덕분에 우리는 인천 공항에서 북경으로 별일 없이 잘 출국할 수 있었다. 가는 날 출국장에서 우리 학교 중문과 교수님을 만나기도 했다. 아직도 그 분 성함이 생각난다. 진덕례 교수님. 혹시 시간이 되면 본인의 출신 학교인 북경대학교를 구경시켜 주겠으니 전화하라며 연락처도 주셨다.
그래서 우리는 갔다. 북경대학교에. 북경대는 모든 것이 거대했다. 중국은 정말로 거대했다.
사실은 일주일 일정 중에 하루는 판다를 보고 싶었다. 또 경극도. 하지만 그놈의 귀여운 판다를 보기 위해서는 꽤 멀리 떨어진 도시에 다녀와야 하고, 경극은 비싼 티켓을 사서 본다 한들 하나도 이해 못할 것이 분명하기에 집에 와서 <패왕별희> 한 번 더 봤다. 아 장국영 오빠 너무 보고 싶다.
일주일 일정 중 3일은 폭우가 내렸다. 그 해 여름 북경은 3개월 정도 이어진 가뭄으로 모두가 고생이었다는데, 우리가 도착한 순간부터 비가 쏟아졌다. 폭우가 몰아치는 오후에 우리 셋은 천안문 광장에서 미친 여자들처럼 소리치며 뛰어다녔다. 다 커서 그렇게 비 맞으며 웃고 떠든 건 그 때가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우산은 이미 광풍으로 뒤집힌 지 오래여서 쓸모가 없었다. 이상하게 북경 사람들은 비가 꽤 많이 내려도 우산을 잘 쓰지 않았다. 그리고 아침 8시가 되면 숙소 바로 앞의 중학교에서는 체조를 시작했다. 늦잠을 자고 싶어도 그들의 경쾌한 구호 소리에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공산주의 국가의 근면 성실한 어린 동무들이었다.
북경에 왔으니 자금성도 만리장성도 한번 들러봤다. 의외로 좋았던 곳은 서태후의 여름 별장이었다는 ‘이화원’이었다. 거대하고 거대한 궁궐의 한 쪽에서는 중국의 전통 악기를 연주하는 한 무리의 악단이 있었다. 내 생각에 그들은 중국 관광청 소속의 공무원들이었던 것 같다. 연주가 너무 엉망이었다.
“저 사람들, 전문 연주자들이 아닌가봐. 음악이 묘하게 이상한데?”
“그러게 말이야. 관광객들 들어온다고 급하게 시켰나.”
이런 시시껄렁한 소리를 하며 걸어 다녔던 이화원의 길고 긴 회랑은 그 여름의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아직도 이화원에서는 묘한 불협화음의 음악 소리가 나오려나. 가끔 궁금해진다.
관광지도 좋았지만 가장 기분 좋았던 날은 내키는 대로 돌아다녔던 어느 오후였다. 시내를 아무데나 돌아다니다가 아무 식당에 들어가서 탕수육과 진한 풍미의 고기 볶음을 먹었다. 배를 두드리며 레코드 샵에 들어가서 비욘세의 CD를 샀다. 중국어로 된 책도 한 권 사고 싶었다. 마침 우리가 묵고 있던 북경사대 기숙사의 학생들이 자신이 읽던 책을 캠퍼스 안에 늘어놓고 팔고 있었다. 중문학 전공인 리타 언니는 어느 작가의 소설책을, 나는 삽화가 들어간 [어린 왕자]를 한 권 샀다. 제대로 읽어본 적은 없지만 집에 돌아온 후에 가끔 책 속에 그림을 다시 보곤 했다.
사회인이란 것이 되어 여러 번의 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왔다. 서른이 다 되어서야 처음으로 유럽에 갔다. 2014년에는 런던에, 그 다음해에는 리스본과 바르셀로나, 파리에 다녀왔다. 런던 여행은 이모님을 모시고 가이드 역할로 간 것이라 항상 초긴장 상태였다. 그 다음해 아는 선배와 함께 한 유럽 여행에서 눈을 뜨고 있는 순간에는 계속 취해 있었다. 아침부터 스테이크를 먹고 와인을 마셨다. 낮에는 포르투갈, 스페인 혹은 프랑스 요리에 와인, 저녁에는 튀김 안주에 맥주. 그리고 또 숙소에 들어와서 맥주 및 와인 섭취. 파리에서는 한국 음식이 너무 먹고 싶어서 식당 문이 열자마자 들어가 뚝배기 불고기에 소주를 마셨다.
유럽에서 가장 멋지다고 손꼽히는 도시에서 열흘 동안 이렇게 계속 취해 있었다. 그 때는 그렇게 여행하는 것이 멋지다고 생각했다. 어딜 가나 취해 있었다. 그래서 정확히 뭘 봤는지, 뭘 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가장 후회하는 여행이다. 더 반성하는 것은 여행에서 돌아와서도 늘 취해 있었다는 점이다. 그 선배와 더 이상 연락을 하지 않게 되어서야 이렇게 술을 마시는 것이 문제라는 걸 알게 되었다.
겨우 맑은 정신으로 여행을 하게 된 것은 역시 리타 언니와 함께 한 타이베이와 오사카 여행이었다. 타이베이에서는 태풍을 만나 아무 것도 하지 못했지만, 그마저도 즐거웠다. 몇 년 전 겨울의 오사카에서는 아주 고요한 기쁨을 얻을 수 있었다. 오사카는 한국으로 치면 부산 같은 곳인데, 사람들의 성정도 비슷하다고 했다. 시끄럽고 유쾌하고. 그런데 일본인들의 디폴트가 대체로 얌전해서 그런지 나보다 더 목소리가 큰 사람은 없었다. 언니와 나보다 키가 큰 사람도 별로 없더라.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달리기를 좋아한다. 나도 가끔 열이 받거나 답답하면 나가서 뛰곤 한다. 그렇다고 내가 하루키와 비슷한 구석이 있다고 감히 비벼보려는 의도는 아니다. 오전에 찾은 오사카 성에서 하루키 생각이 났다. 오사카 성 주변을 따라 달리기를 즐기는 사람들이 있었다. 날씨가 좋아서 그런지 마실을 나온 강아지들도 많았다. 어느 나라를 가나 주인과 함께 산책을 나온 강아지들의 표정은 다 똑같았다. 우리 봄이도 엄마와 제주도에 살 때 저런 얼굴을 하고 올레 길을 돌아다녔겠지.
오사카에서도 대단한 걸 하지는 않았다. 아침마다 스타벅스에 가서 필요한 당과 카페인 충전을 하고 고만고만한 관광지를 다녔다. 그 중 의도하지 않게 가장 강렬한 인상을 받았던 곳은 쇼토쿠 태자가 창건했다는 ‘시텐노지’ 였다. 한국인 관광객들은 거의 찾지 않는, 아니 관광객이 아예 없었던 아주 조용한 절이었다. 때마침 오전 불공을 마치고 돌아가는 주지 스님의 절도 있는 걸음걸이도 봤고, 그 스님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고개를 들지 못하고 인사하고 있던 바로 밑의 스님의 슬픈 사회 생활도 봤다. 사람 사는 거 어디나 다 똑같구나. 스님 힘내세요.
시텐노지의 어느 조용한 불당은 탑 위까지 걸어 올라갈 수 있었다. 매우 좁고 가파른 나선형의 계단이라 우리 둘은 조심조심 올라가야 했다. 겨울이라 발이 시렸지만 탑 꼭대기에 무릎을 모아 앉아서 잠시 동안 눈을 감고 있었다. 탑 밖에서 새소리가 들렸다. 완벽한 오전이었다. 완벽한 여행이었다.
여행지에서 술을 과하게 마시지 않는다고 해서 더 특별한 건 하는 건 아니다. 원체 나는 그렇게 부지런한 인간이 못된다. 다만 그나마 맑은 정신을 유지하고 있으면 다양한 감정을 느낄 수 있다. 늘 복잡한 머리가 아주 잠시 가벼워지기도 한다. 게으른 주제에 머리 속은 늘 바쁘게 움직여서 결국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 그래도 여행을 가면 뭐라도 한다.
뭐라도 하겠지, 이런 마음으로 나는 곧 떠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