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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다페스트엔 단풍이 들었대요?

#02. 그녀도 언젠가는 나였고, 나도 이제 그녀가 되어 간다

by Kenins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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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아이디어란 항상 좋은 컨디션일 때만 나오는 것은 아닌 듯하다. 당시 내 심신은 아스러질 듯 아프고 힘이 들었지만 이런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했던 때였다.


▼ 월요일 아침부터 사무실 한편에서 투닥투닥 시끄러운 소리가 난다.


소리가 나는 곳에 가보니 두 신입사원이 '멕시코 시장정보'라는 리포트를 책자로 만들고 있는 소리였다.


거만한 자세로 리포트를 휘리릭 넘겨보고는 말한다.

나 : 멕시코까지 비행시간이 몇 시간인지 아니?
신입들 : 아니요 안 가봤어요
나 : 시장 개발을 할 땐 타깃 지역의 위치도 매우 중요한데…

라면서 긴 얘기를 시작하려던 그때 멀고 먼 밀라노에서의 추억이 떠올랐다.


신입들에겐 짧게 자료 신경 써서 잘 만들라고 말하며 파이팅을 외쳤고, 나는 이내 '97년의 부다페스트로 향했다.

▼ 1997년에 신입사원으로 입사한 회사에서는 '해외 도전 훈련'이라는 이름으로 사원들에게 해외여행 기회를 줬다.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프로그램..


이에 나는 유럽으로 가는 배낭여행을 기획해서 유럽 여행을 떠난 일이 있었는데 당시 프랑스, 스위스에서 가져간 돈의 80%를 쓰고 일정이 아직 5일이나 남은 적이 있었다.


스위스에서 이탈리아로 들어가서 밀라노 중앙역에서 현지 물가를 계산하니 도저히 남은 날들을 지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마침 동유럽은 물가가 더 싸다는 입소문을 듣게 됐고, 밀라노에서 부다페스트 향을 결심했다.

말이 쉬워 기차로 밀라노에서 부다페스트지.. 밀라노에서 베네치아 산타루치아 역으로 이동해서 (내 기억엔 그것만도 5-6시간 걸리는 거리였다.)


다시 오스트리아의 빈으로 가야 하고 빈에서 기요르라는 헝가리 접경으로 들어서서 부다페스트로 가는 장장 20여 시간의 여정이다.

그렇지만 기차로 가고 오는데 꼬박 이틀이 걸릴 테고, 물가가 싸다면 견딜 수 있을 것이라는 게 나의 계산이었다.


결과론이지만 그 계산은 보기 좋게 맞아떨어졌고, 난 무사히 유럽여행 일정을 마칠 수 있었다.

▼ 부다페스트로 떠나기 전에 당시 밀라노에 있는 한 할인마트인 '메트로 (아직 있나?)'에서 물과 약간의 간식을 챙기는데.. 어디선가 여유로워 보이시는 동양 아주머니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 나오는 '황무지의 마녀' 이미지)가 나타나셨다.


10월 중순의 밀라노는 아침저녁으로는 약간 쌀쌀한 날이었고, 그분은 멋진 스카프를 두르고 계셨다. 그분은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시더니 물으셨다.

아 : 한국인이세요?
나 : 아… 네 그렇습니다.
아 : 배낭여행 왔나 봐…
나 : 네…
아 : 이제 어디로?
나 : 네… 부다페스트에 가려구요.
아 : 아… 부타페스트는 단풍이 들었대요?
나 : 아… 저… 그게… (내가 그런 것을 알리가 없다…)

▼ 대답을 못하고 버벅거리는 청년에게 큰 웃음을 웃으시며 아줌마는 사라지셨다.


인터넷도 제대로 없었던 10월 15일경의 밀라노에서 부다페스트에 단풍이 들었냐는 것을 알만큼 나는 유럽에 대해서 아는 것이 많지 않았다.


밀라노에서 부다페스트로 가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지끈거리는 아이에게 단풍이라니 그 아이의 눈엔 단풍 따윈 들어오지 않는다. 아주머니는 번지수를 아주 잘못 찾으신 게다.


요즘 들어 그녀도 언젠가는 나였고, 나도 이제 그녀가 되어 간다는 것을 느낀다.

그 아주머니의 질문은 마치 이제 막 입사해서 멕시코 시장에 대해 열심히 조사하고, 멕시코 시장 보고서를 만들고 있는 한 아이에게 멕시코에 가보았느냐고 묻는 직장 상사의 질문과 같다.


더욱 원천적인 질문을 하고는 상대방의 입을 막아버리는 그런 질문이다. 어른이라면 절대 해서는 안되는 그런 질문…


나도 번지수를 잘못 찾고 있었던 거다.


이제 나도 그런 질문을 하니.. 나도 어느새 그녀가 되어버린 것이다.


▼ 이제 부다페스트의 단풍이나 머나먼 멕시코 얘기는 접어두자.


아이들이 우리에게 듣고 싶은 것은 우리가 어려서 경험한 좌충우돌 스토리지.. 마냥 여유로워 보이는 우리의 근황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고맙습니다. 밀라노의 살짝 살집 있으신 그 멋쟁이 아주머니 ^^♡

By 켄 in 신촌 ('15년 3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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