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과 生트집의 그 어디쯤에서
학교 특강 수업이 1교시부터 있는 날이면 아침 7시에 나와 대학원 수업까지 마치고 나면 밤 11시에 귀가한다. 오전 학교 수업, 오후 지역아동센터수업, 저녁 대학원 수업. 몸은 피곤하지만 오늘 하루 열심히 살아낸 나를 칭찬해 본다.
'잘하고 있어. 강선생!'
저녁 9시가 조금 넘은 시간. 대학원 수업이 끝나고 따뜻한 차 한잔을 챙겨 주차장으로 향했다. 서늘한 밤공기에 새삼 가을인가 싶다. 좋아하는 시 한 구절이 생각나는 가을밤. 감성 가득 싣고 시동을 켰다. 집으로 향하는 길, 창 밖 너머 밤하늘에 이따금씩 고개를 내밀고 있는 별들을 보니 반갑기만 한다.
학교에서 집까지는 한 시간 거리이다. 누군가는 한 시간을 운전하는 일이 너무 고단한 일이라고 하지만, 내게 차 안에서의 한 시간은 김여사와 통화하기 딱 알맞은 시간이다. 한 시간이 안되면 아쉽고 한 시간이 넘으면 지루하다. 너무 모자라지도 않고 그렇다고 넘치지도 않게. 김여사와 강선생은 그렇게 매일 한 시간 동안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일상을 나눈다.
오늘도 늘 그렇듯 터널을 지나 김여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터널을 지나서 전화를 하는 이유는 차 안에서 연결된 블루투스로 인해 터널에서는 잡음이 심해 김여사에게 나의 이야기가 잘 전달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김여사를 위한 강선생의 세심한 배려와 잘 못 알아듣는 김여사에게 반복해서 말하고 싶지 않은 강선생의 귀찮은 마음 그 어디쯤에서의 선택이다.
오늘은 오전 학교 수업이 끝난 후 지역아동센터 수업을 가기 전 잠깐 시간이 남아 카페에서 김진명 작가의 강의를 들었다. 김진명 작가의 주옥같은 강의에 두 손을 모으고 연신 '크~ 멋지다'를 반복했다. 이따가 김여사에게 강의 내용을 전해줄 요량으로 메모하며 열심히 들었다. 김여사에게 이야기해 줄 거리가 생겨 신이 난 나는 기대에 찬 마음으로 김여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나 이제 끝나서 전화해요."
"오늘도 일하랴 공부하랴 고생 많았네."
"뭐 늘 하는 일이데, 참! 엄마 오늘 내가 김진명 작가님 강의를 들었는데, 정말 명강의였어요!"
"그래? 뭐가 그렇게 좋았는데?"
일단 김여사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발언이었다. 지식 호기심이 많은 김여서는 새로운 지식이나 정보를 얻게 될 때면 매우 반가워하고 흥미를 보인다. 더군다나 김진명 작가님의 강의라니 그런 김여사에겐 더할 나위 없이 솔깃한 주제였다.
"김진명 작가님이 가난해야 눈에 보이는 것들이 있다면서 인류의 스승들은 가난을 자처하기도 했대요"
"가난을 자처했다고? 난 좀 이해할 수 없네, 그건 진짜 가난한 사람들이 아니야. 진짜 배고프고 돈 없어봐라. 먹고살기 바쁜데 무슨 생각을 하고 책을 읽겠어!"
"아니~ 가난해야 결핍이 있는 거고 그런 결핍들이 나를 일으켜 세운 다는 거지."
"물론 그것도 맞는 말인데, 난 가난을 자처했다고 하는 사람들의 말을 이해하지는 못하겠어."
"엄마, 여기서는 '가난'이라는 단어가 중요하다기보다는 가난으로 인한 결핍이 인간을 움직이게 만들고 할 수 있는 인간으로 나아가게 한다는 건데."
"물론 그 말도 일리가 있는데 진짜로 가난해봐라 다른 생각이 드나~"
김여사에게 나의 큰 뜻을 알리고자 했으나, 그런 나의 계획과는 달리 김여사는 '가난'이라는 단어에만 집중한 나머지 다른 의미들은 헤아리려고 하지 않았다. 역시 인간이 계획을 세우는 일이란 어리석은 일이란 말인가.
"아니 엄마, 가난이라는 말은 인간의 결핍과 갈증을 뜻하는 비유적인 표현이고 여기서 작가님은 그런 맥락이 아니라는 거예요. 심리학자 아들러가 이야기했듯이 인간의 열등의식은 성장을 이끈다는 관점과 같은 맥락이라는 거죠! 이러한 결핍이 우리가 성장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는 거예요."
"알아 네 말도 알고 김진명 작가의 말도 심리학자의 말도 다 알아. 그렇지만 가난한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할 수 있겠어? 하루하루 자신의 삶을 이어나가기도 어려운데 어떤 성공을 꿈꾸고 실현할 수 있을까?"
김여사는 여전히 나의 주장에 반기를 들었고 도무지 설득되지 않는 김여사와의 통화를 이어가자니 나는 서서히 지치기 시작했다.
"오케이! 좋아요. 엄마, 서로의 입장과 생각이 다르니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네요."
"그래, 근데 너도 마찬가지야. 네가 지금은 예전처럼 못 먹고 못 입고 지냈던 그 시절처럼 살고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들의 삶을 몰라서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거야."
그런데 어쩐지 김여사의 말을 들으니 묘하게 설득되어 가는 것 같았다. 어라? 이게 아닌데... 처음에는 가난해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는 작가님의 말에 두 손을 모으고 아멘을 외쳤다면, 엄마와 대화를 이어나가면서 어쩌면 진짜 가난한 사람들의 현실적인 삶을 내가 몰라서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엄마, 생각해 보니 단순히 큰 맥락에서는 인간의 결핍은 우리를 성장하게 만든다고 생각이 들었는데, 엄마랑 통화를 하고 보니 어쩌면 '가난'이라는 단어를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하고 사용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래 엄마도 네가 이야기하는 전체적인 맥락을 이해 못 하는 게 아니야, 다만 흔히 말하는 '가난'이라는 단어가 누군가에게는 폭력이 될 수 있다고 이야기하고 싶은 거지."
"그러게요, 그럼 '가난'이라는 단어보다는 좀 더 명확한 표현으로 '결핍'이나 '갈증'과 같은 인간의 부족함이나 미흡함을 나타내는 단어를 선택하는 게 좋겠네요."
"그래, 그럼 더 나을 수 있겠네. 오늘의 공부는 여기까지~"
"저도 집에 다 왔습니다. 잘 자요~"
처음에는 나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김여사의 주장에 답답해하기만 했다. 그러나 김여사와의 대화를 이어갈수록 미처 내가 의식하지 못했던 것들이 있었음을 느끼게 되었다. '가난'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폭력이 될 수 있는 단어들, 그들을 고려하지 않고 무심코 내뱉었을 단어였다.
김진명 작가가 말하는 '가난'은 김여사와 내가 내린 결론처럼 인간의 결핍과 갈증을 뜻하는 것이었으리라. 오늘 김여사와의 대화를 통해 그동안 내가 너무 비판적 의식 없이 무조건적으로 수용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반면, 김여사 역시 고단한 하루를 마무리하며 침대에 누워, 딸아이의 뜻을 모르는 것도 아닌데 무턱대고 生트집을 잡은 건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김여사는 강선생이 다양한 관점에서 사고하길 바라는 마음이었을 테고, 자신의 주장에 반박하며 온갖 잡다한 지식을 끌어와 당신을 설득하려는 강선생이 내심 대견했을 것이다.
'비판'과 '生트집' 그 어디쯤에서 58년생 김여사와 83년생 강선생은 오늘도 서로를 알아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