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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구원 J Jul 31. 2024

난 아직도 너가 왜 퇴사했는지 모르겠어.

(구)회사 책임님들과의 술자리 이야기

 

책임님은 회식이 끝나면 항상 택시비를 쥐어주셨다. (5만원 주실 때는 사진도 안찍고ㅎ)

#나를 찾아가는 기록들 4

2023. 09. 30



'야 쟨 이제 돈 없어서 골프 못 배워.' 연봉을 크게 깎고 새로운 회사로 이직한 내게 책임님들이 언제나 그랬듯, 아니 이제는 조금 더 짖궂게 장난을 거신다. 한 팀이었을 때 책임님들은 항상, 골프는 어리면 어릴 수록 좋으니 빨리 배우라고 재촉하셨다. 하지만 이제는 여유롭지 못하니 말도 꺼내지 않겠다는 말이다. 그렇게 책임님들은 회식 내내 그렇게 짖궂게 장난을 치셨다. 크게 늘어난 업무량과 잦은 야근, 멀어진 회사, 없어진 재택근무, 미운정 고운정 들며 끈끈한 전우애 느껴지는 팀문화 대신 각개전투 문화. '회식은 하니? 법카는 쓰냐?'는 물음에 '회식은 없지만.. 네! 쓰긴 써요'라는 뜨뜻미지근한 대답 밖에 할 수 없었다.

 

만족스러운 답이 나오지 않으니 책임님들은 자꾸만 되묻는다. '야, 난 아직도 너가 왜 퇴사했는지 모르겠어. 공채 1등이지, 외국어도 잘하는 게 조금만 기다리면 유럽 갈텐데' 책임님들의 질문 공격에 탈탈 털린 나는 머릿속으로 대답한다. '그러게요...' 


돌아가는 길, 법인카드가 등록된 카카오택시를 속편히 잡아두신 책임님은, 예약한 택시가 눈에 보이자 내게 큼직한 발걸음으로 다가오시더니 지갑에서 택시비를 꺼내 내게 쥐어주셨다. '야, 조만간 또 보자. 팀장님이 너 보고싶으시대. 상무님도 봐야하고.'




나의 퇴사 이야기는 작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창 꿈을 찾아야 했던 괴로움에 시달리는 스물일곱 살의 회사원 J는 택시를 타고 친구 집을 가는 길에, 신나게 두 딸 자랑을 하시던 택시기사님께 질문을 던졌다. '기사님. 제가 지금 스물 일곱 살인데요, 기사님은 다시 스물 일곱 살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어떻게 살고 싶으세요?' 잠시 고민하시는 듯 침묵이 일었다. '다시 돌아간다면 나에게 맞는 행복을 찾아서 살고 싶어요.' 아까와는 다른 공기였다. 


그 말이 여운이 오래 남았다. 그리고 커리어 경로를 수정한 지금, 기사님의 그 한마디가 내 상황에 신기하게 잘 들어맞는다. 주변을 바라보며 흔들리는 삶이 아니라, 나에게 맞는, 나만의 길을 만들어 살아가는 삶. 그런 삶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살기 위해 그래야 했다. 



속 빈 강정 인생


꿈을 가지고 살아본 적이 없다. 교육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무언가 되겠노라 엄마와 아빠에게 입 밖으로 꺼내면 현실적인 어려움을 근거로 내 꿈을 고이고이 접어 다시 목구멍 안으로 넣어주는 탓이라 생각했다. 결국 사회의 꿈이 나의 꿈이 되었고, 그렇게 나는 내가 진실로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무언가가 너무 좋고 정진하고 싶음에도 현실이라는 장벽으로 스스로를 둘러싸고는 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계속 현실적인 사람이 됐다. 사람들이 주변에서 좋다고 하는 것들. 놓칠 수 없는 가치들. 연봉, PS/PI, 복지, 회사 규모와 네임밸류.

 

그래서 흔히 말하는 '좋은 것'들을 따라서 왔다. 그래도 여전히 주변을 바라보면 온통 질투나고 셈나는 모습들 뿐이었다. 그때 그랬으면, 저때 저랬으면 하는 생각이 끊이지 않았다. 다시 공부를 해야하나, 대학교로 돌아가야 하나, 학원으로 가야하나. 인생에 기준이 세워지지 않았다. 그래서 난 계속 흔들렸고, 흔들었다.


욕심도 많았지만 겁은 그것보다 더 많았다. 내가 가진 걸 내려놓고 새로운 시작을 하기가 두려웠다. 보장되지 않은, 보이지 않는 미래가 무서웠다. 그래서 도전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일로 나를 채우지 못하니 일 외적인 부분에서 즐거움을 찾아야했고, 그것이 내겐 운동이었다. 생각할수록 괴로우니, 그냥 생각 없이 즐겁고 행복하게 싶었다. 그래서 다른 것에는 신경 쓸 겨를 없이 정신없이 운동만 했다. 시간만 나면 새로운 운동을 배웠고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경험을 하는 것으로 인생의 자극을 채워나갔다. 그러던 어느날 발목을 크게 다치며 1년간 운동을 할 수 없었고, 나의 유일한 생존 방법이었던 운동을 잃은 그때 나는 내 인생이 속빈 강정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아직은 돈보다 경험


결론은 그랬다. 경험을 사자. 나는 언제나 너무 조급하게 스페셜리스트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제너럴리스트가 되지 않고서는 스페셜리스트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넓게 탐색하고 그 뒤에 표적을 세우자.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세상을 더 알아가자.


흔들릴 것이다. 포기한 것이 큰 만큼, 넉넉하게 살아가는 주변을 보며. 힘든 업무에 시달리며. 가볍게 던지는 장난스러운 말들을 들으며. 하지만 아쉬워하지도, 후회하지도 않을 것이다. 이제는 내게도 뿌리가 생겼으니, 흔들린 만큼 더 깊숙이 뿌리를 내릴 것이다. 그렇게 튼튼하고 단단하게, 나만의 밀도를 채워가며 자라날 것이다. 그리고 꿈꾸는 미래를 향해 인내하며 걸어갈 것이다. 그래서 나는 퇴사를 했다.



#퇴사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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