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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시 탐험가 Oct 24. 2021

갱년기 소년, 옛집을 찾아 나서다

나는 수년 전부터 내가 어렸을 때 살았던 동네들을 답사하고 있다. 그리고 변화한 모습들을 기록하고 있다.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군대 가기 전까지 살았던 강남의 옛 아파트 단지는 새로운 아파트 단지로 재개발됐고, 그전에 살았던 서교동의 주택가는 식당과 카페가 들어선 홍대 주변부가 되었다. 두 동네 모두 내가 근처를 계속 오갈 기회가 많았기 때문에 옛 흔적을 찾는 데는 무리가 없다.   

   

하지만 수유리는 그 주변이 크게 변했다. 내가 자라면서 그 주변을 오갈 기회도 거의 없었다. 옛 도로는 주택가 이면도로가 됐고 그 외곽에 큰 도로가 뚫렸다. 택지 개발이 새로 된 곳도 있다.      


정부 기록도 혼선을 주었다. 주민등록 초본에 기록된 옛집 주소는 현재 없는 지번이고 비슷한 지번도 우이천 한가운데, 그러니까 하천에 집이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수유리는 원래 성북구였지만 1973년에 도봉구로 분구했고 1995년부터는 강북구가 되었다. 분구하는 과정에서 행정동 조정이 있었고 옛 지번은 그때 변경된 모양이었다. 하지만 오래전 일이라 전산 등록은 되지 않았다. 나중에 해당 구청 순례를 한 다음에야 알아낸 사실이다.  

   

이 사연을 알기 전이었던 당시에는 기억을 되살려 옛집을 찾는 수밖에 없었다. 수유리 인근에 들어선 아파트 단지들을 보고 내가 살던 옛 동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지 않았기만을 바랐다.     


마치 영화처럼


마침 영화 라이언(Lion)을 인상 깊게 감상했다. 인도에서 길을 잃고 호주 가정으로 입양된 어느 남자의 실화를 담은 영화다. 영화에서 주인공은 인도에서 살던 집을 찾기 위해 ‘구글어스’를 이용한다. 오랜 기억 속에 각인된 지형지물을 따라가 마침내 집과 가족을 찾는다는, 실화를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더욱 감동이 온 영화였다.     


나도 그 방법을 써보기로 했다. 지도에서 우선 내가 다닌 초등학교를 찾고 기억 속에 남은 등하굣길을 따라 가보면 왠지 내가 살던 동네를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 동네만 가면 내가 살던 집을 찾는 건 문제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는 한신초등학교라는 사립학교에 다녔다. 그래서 매일 통학버스를 타고 등하교를 했다. 버스 타기를 즐겼던 나는 언제나 맨 앞자리를 고집했다. 덕분에 어렴풋이 당시 길들이 떠오른다. 그 기억들을 지도 애플리케이션에 대입해 보면 될 듯했다. 영화에서처럼.   

  

문제는 한신초등학교가 다른 곳으로 이사했고 그 근방은 내가 살던 1970년 초반과 많이 달라졌다는 사실이었다. 학교 주변 야산은 주택가가 되었고 북한산에 흘러내린 하천은 도로가 되었다. 전혀 다른 동네가 되어 있었다.     


1973년 한신초등학교 인근 항공사진 1973년 당시 노란선으로 그린 삼양로는 없었고, 빨간선으로 그린 도로가 간선 도로 역할을 했다. 


해결책을 서울시에서 제공하는 항공사진 서비스에서 찾았다. 1973년, 내가 초등학교 1학년이었던 당시 항공사진으로 먼저 한신초등학교를 찾아 거기서부터 집 근처 통학버스 정류장까지의 경로를 되짚어 보았다.  

   

정류장 근처에 시장이 있었다. 아마도 지금도 있으리라 생각하며 현재 운영되는 재래시장들을 찾아보았다. 그리고 옛 기억과 길 모습을 비교해 보았다. 어려웠지만 간절히 생각하니 옛 경로가 떠오르는 듯했다. 


그렇게 여러 번의 시도 끝에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등하교 때 통학버스를 타고 내렸던 곳으로 짐작되는 곳에 다다랐다. 물론 항공사진 위에서다.

  

통학버스 탔던 곳만 찾으면 거기서부터 옛집을 찾아가기는 쉬울 것으로 생각했다. 항공사진은 위에서 내려다보는 평면이지만 그 길을 수도 없이 다녔던 어린 시절의 행적이 입체적으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다음 순서는 옛 항공사진에 나온 길을 지금의 지도에서 찾는 것이었다.      


1973년 항공사진에서 시작해 1975년... 1980년... 1990... 2000년 등 해를 달리하며 같은 지역을 찍은 항공사진들을 확인해 도로 구획이 어떻게 바뀌어 가는지 확인했다. 그리고 현재의 지도에 대입했다.  

    

직선으로 반듯하게 난 큰 도로 주변으로 곡선이나 사선으로 휜 이면도로가 보였다. 반듯하지 않고 구부러진 그 길이 항공사진으로 본 옛 통학로 경로와 비슷해 보였다.      


지도 앱의 그곳을 확대해서 보니 기억에도 선명한 지명이 보였다. 우이초등학교와 장미원. 오래전 통학버스가 지나던 길이었다. 그 길 따라 쭉 가보니 큰 도로 안쪽으로 이면도로 치고는 넓은 길이 있다. 살짝 구부러진 모습이 오래전에 생긴 길인 듯했다. 그 분위기가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통학버스를 타고 내리던 곳과 일치하는 것으로 보였다. 근처에 우이시장도 있다. 자료를 보니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 영업하고 있다. 


지도로만 확인하기에는 한계가 있어 직접 가보았다. 실제로 본 그 길은 낯설지 않았다. 비록 옛날 건물들은 없어지고 새 건물들이 들어섰으나 도로 구획은 그대로였다. 4·19 묘지와 우이동 계곡 방향으로 크게 휘는 곳이 있었다고 기억하는데 지금도 그 각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우선 시장 입구와 가까웠던 통학버스 정류장 위치를 특정 지었다. 거기서부터 기억에 따라 발길을 옮겼다. 그렇게 내가 살던 골목과 옛집을 찾아갈 수 있었다. 


단 세 문장으로 표현했지만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겪은 다음에야 집을 찾을 수 있었다.     


골목은 그대로였지만 내가 살던 집은 오래전에 헐리고 다세대주택이 들어섰다. 그 동네 건물들은 많이 바뀌었지만 도로 구획과 골목 구획은 예전 그대로였다. 그래서 찾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옛집을 찾은 방식으로 오래전에 없어진 내가 졸업한 유치원과 우리 동네 근처에 있었지만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이용사촌의 흔적도 추적할 수 있었다. 


그렇게 도시 탐험가가 되었다     


이런 것들을 조사하고 알아내는 과정이 나는 흥미로웠다. 그리고 무관심 속에 묻히는 과거의 흔적들이 아쉬웠다. 그래서 틈날 때마다 찾고 기록하기 시작했다. 친구들은 이런 나를 두고 "갱년기 왔냐"며 놀려댔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갱년기 소년', '갱보'가 되었다. 갱년기 보이를 줄인 말이다. 

    

한편 수유리와 그 근방에서 시작한 내 탐구 범위가 점차 넓어졌다. 지금은 서울과 주변 도시들의 과거와 현재를 비교 조사하고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그 과정에서 강남은 사실은 경기도 광주군이었고 처음 서울로 편입되었을 때는 성동구였다는 사실, 잠실이 원래는 강북에 가까운 섬이었는데 강남 쪽에 붙은 육지가 되었다는 사실, 한강 교량이 놓인 곳이 예전에는 나루터였다는 사실 등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현대인이 무심코 접하는 문물이 사실은 오랜 역사 속에 명칭을 달리하며 존재하고 있는 사실들도 알게 되었다. 또한 사라져 가는 도시 문물의 과거와 현재를 추적하기도 한다.  

   

이러한 내 글의 소재와 주제에 관심을 보인 매체에 연재하게도 되었다. 물론 유명 건축학자나 도시사학자 혹은 도시문헌학자의 연구와 비교할 수 없는 산출물이겠지만 내게는 궁금했던 ‘미지의 세계를 찾는 마음’이 무척 크고 그것을 기록하는 행위의 기쁨도 무척 크다.     


그래서 이런 과정들에서 즐거움을 찾는 내게 ‘도시 탐험가’라는 신분을 스스로 부여했다. SNS나 블로그를 보면 나와 같은 이들이 꽤 있는 것 같다. 그분들의 활동에서 자극을 받거나 영감을 얻는 나는 도시 탐험가라는 타이틀이 무척 마음에 든다.      


도시 탐험가인 나는 작고 소소한 발견에 환호하고 기뻐하며 오늘도 도시 곳곳을 탐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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