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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시 탐험가 Oct 30. 2022

강남에 고속버스터미널이 생기기 전 서울에는

버스터미널은 그 지역의 관문이었다. 대도시는 물론 기차가 닿지 않는 지역을 연결하는 거점 역할을 했었다. 하지만 KTX 등 대체 운송 수단이 많아지고 코로나19 시국이 계속되자 2019년과 비교해 2021년 버스를 이용한 승객은 절반 정도로 줄어들었다.


이용 승객 감소는 버스터미널의 경영 악화로도 이어졌다. 남원처럼 이미 문을 닫은 터미널이 생기거나, 부지를 매각한 원주처럼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하는 터미널이 있는 현실이다. 전국터미널협회에 따르면 휴업 의사를 밝힌 터미널이 수십 개가 넘는다고 한다.


그런데, 지방 곳곳에서 떠난 고속버스들이 도착하고, 또 지방 곳곳으로 향하는 고속버스들이 출발하는 서울 고속버스터미널은 아직은 건재한 모습이다.


서울고속버스터미널 전경


고속도로 개통과 함께 출발한 고속버스 산업


고속버스는 법령상 “규정에 맞는 시외고속버스 또는 시외우등고속버스를 사용하여 운행 거리가 100km 이상이고, 운행구간의 60% 이상을 고속도로로 운행하며, 기점과 종점의 중간에서 정차하지” 않는 버스를 의미한다.


예외 규정도 있지만 중간 정차를 하게 되면 ‘시외버스’로 분류한다.


우리나라에서 고속버스의 역사는 고속도로 개통과 함께 시작했다. 최초의 고속버스는 경인고속도로를 달렸다. 1969년 4월 12일 서울과 인천을 연결한 한진고속이 그 최초다.


경부고속도로는 1969년 8월 15일 서울과 수원을 연결한 동양고속이 최초, 호남고속도로는 1970년 12월 30일 서울 전주 간 노선을 개통한 광주여객이 기록으로 남았다.


고속도로가 생기기 전 우리나라는 철도가 운송 수단의 대명사였다. 물론 시외버스가 일부분을 맡긴 했었지만 도로 상황과 차량 수준이 형편없었다. 그런 가운데 서울과 부산을 4시간 30분 만에 연결하고 전국을 일일생활권으로 만든다는 고속도로는 말 그대로 혁명이었다. 그 첨병으로 고속버스가 등장한 것.


승례문 방향에서 바라본 서울역 일대. 대한설탕 건물 왼편으로 터미널이 보인다. (사진: 서울역사아카이브)


당시 우리나라에서 고속버스 운송 사업 경험을 가진 사업자는 없었다. 고속버스도 외국에서 들여와야 했다.


그래서 정부는 경험을 보유한 미국 사업자가 참여하도록 했고 고속버스 구매 자금은 해외 차관을 연결해 주었다. 만약 고속버스 사업자로 선정되기만 한다면 초기 자금에 큰 부담 없이 사업을 펼칠 수 있었다.


1968년 11월 우리나라 최초의 고속버스 사업자로 6개 업체가 인가를 받았다. 한진관광, 동양고속, 광주여객, 한일여객, 천일여객, 코리아 그레이하운드(Korea Greyhound Limited, KGL). 


지금의 금호고속인 광주여객, 대구 경북에 기반을 둔 한일여객, 부산 경남에 기반을 둔 천일여객은 시외버스를 운영해온 회사였고, KGL은 미국 측이 50% 한국 측이 50%인 합자회사로 미국 측 주주는 여객운송사업 경험을 보유한 사업자였다. 


한편, 1969년 말이 되자 인가를 받은 사업자들이 경부고속도로 노선에 9개 업체, 경인고속도로 노선에 3개 업체로 늘었다. 이때 추가된 곳이 속리산관광, 유신고속, 한남고속, 삼화교통 등이다. 


1971년 즈음엔 중앙고속과 동부고속도 후발 주자로 참여한다. 재향군인회에서 설립해 버스 30대로 출발한 중앙고속은 1977년 그레이하운드를 인수해 대형회사로 성장한다. 금호고속, 동양고속, 동부고속 등은 여객운송업을 기반으로 사업을 다각화해 재벌로 성장한다.


서울 시내에 산재한 고속버스터미널


1969년에 서울에서 인천과 수원 노선이 생기고, 1970년에 서울에서 대전과 대구 노선이 생기자 고속버스 업계는 활기를 띤다. 하지만 출발점이자 종착점이기도 한 서울에는 통합된 버스터미널이 없었다. 


1970년대에 고속버스터미널은 서울 도심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강남에 고속버스터미널이 생기기 전까지 고속버스 회사들은 터미널을 따로 운영했던 것.


그중 한 곳이 동대문 맞은편에 있었다. 현재 'JW메리어트 동대문 스퀘어 서울'이 있는 자리다. 이곳을 터미널로 쓴 업체는 광주여객, 한남고속, 한일여객, 천일여객이었다. 이들 4개 업체 모두 벤츠에서 버스를 도입해 공동으로 관리 하기 위해서 한 장소에 모인 거였다.


한편, 이곳에 고속버스터미널이 생기기 전에는 오래도록 노면전차 차고로 쓰였다.


1973년 동대문 고속버스터미널. 흥인지문 맞은편의 동대문시장 끝자락에 있었다. (사진: 서울역사아카이브)


차내에 화장실이 있는 이층버스 그레이하운드는 서울역 건너편 동자동의 게이트웨이타워(벽산빌딩) 자리에 터미널이 있었다. 한진고속은 서울역 건너 서소문 방향 봉래동에 터미널이 있었는데 현재 그 자리에 한진빌딩이 있다. 


동양고속은 서울역 건너 숭례문 방향의 세브란스 빌딩 자리에 터미널이 있었다. 이외에도 고속버스 회사마다 을지로와 종로 등으로 터미널이 흩어져 있었다고.


서울 도심에 산재한 고속버스터미널들은 여러 가지로 불편했다. 매표소와 대합실은 물론 화장실 같은 편의 시설이 부실해 승객들의 불만을 샀다.


또한, 도심 터미널들은 승객들을 태우고 내리는 기능만 했기 때문에 박차장(泊車場), 차량이 대기하거나 정비하는 공간이 부족했다. 그래서 서울시는 흑석동에 버스회사들이 공동으로 쓰는 박차장을 마련해 주기도 했다. 


이렇게 서울 도심 곳곳에서 승객을 태우고 내리는, 그리고 수시로 박차장을 오가는 대형버스들은 교통혼잡의 원인으로 꼽히기도 했다. 


한편, 정부는 통합된 고속버스터미널을 계획하는데 1975년 3월 KIST의 보고서를 기점으로 영동지구, 지금의 반포동이 입지로 대두된다. 


이 보고서에서 언급한 영동지구의 장점 중 하나는 “땅값이 저렴하여 터미널을 위한 충분한 대지면적은 물론이고 고속버스 운행을 위한 부속시설을 마련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당시 서울시는 지주들이 소유한 5만평의 땅을 시 소유의 체비지와 맞바꾸고 ‘서울시 영동 1지구 구획정리사업’에 포함한다. 그렇게 들어선 것이 반포동의 서울고속버스터미널이다. 


1976년 1차 준공 무렵의 반포동의 서울고속버스터미널의 승차장. 이때는 임시로 가건물과 승차장만 있었다. (사진: 서울역사아카이브)


흔적 없는 옛 터미널


이번에 고속버스터미널을 탐구하게 된 배경은 이전 기사에서 다룬 ‘서소문역사공원’ 때문이었다. 공원 자리를 고속버스터미널로 개발하려고 했던 어느 공무원이 남긴 자료에서 서울 도심에 고속버스터미널이 산재했던 것에 호기심이 간 것.


덕분에 1970년대에 시골 친척 집에 가기 위해 동대문에서 고속버스를 탔던 기억이 났다. 그리고 SNS 등에 물어본 지인들에게 서울역 건너편에서 그레이하운드를 탔던 추억도 끌어낼 수 있었다.


그곳들을 모두 방문해 보았다. 혹시나 과거 흔적을 볼 수 있을까 하고. 역시나 아무 흔적 남지 않았다. 


2022년 7월의 흥인지문과 JW 메리어트 호텔. 1970년대에 호텔 자리에 고속버스터미널이 있었다.


다만 동대문 건너 옛 고속버스터미널 자리에 들어선 호텔 앞에서 표지석 한 개를 볼 수 있었다. 그 자리가 예전에 노면전차 차고였고 우리나라 최초의 화력발전소가 있었다는 설명 뿐 표지석에 고속버스터미널 관련 내용은 없었다.


서울역 인근에 고속버스터미널이 있었고, 동대문과 종로와 을지로에도 터미널이 있었다는 것은 어린 시절에 그곳들을 이용한, 적어도 50대 중반 이후의 기억 속에만 남은 듯했다. 


그런데 지방 버스터미널이 점점 사라지는 현실에서 서울의 터미널은 영원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터미널 주변이 계속 개발되는 모습인데 어떤 바람이 터미널에 불어올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터미널은 개발 관점에서 보면 너른 땅일 뿐, 혹시 머지않은 훗날 서울고속버스터미널의 흔적을 그리워할 이들이 나오게 될지도 모른다.


서울고속버스터미널 승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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