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이 나오기만 기다렸다

by 도시 탐험가

많은 이에게 사랑받는 책이 있다. 이 시리즈가 나오기만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좀만 늑장 부리면 구할 수도 없다. 그러고 보면 유명 브랜드에서 한정판이 나오면 줄 서서 사는 현상 같기도 하다.


‘올재 클래식스’ 이야기다. 어느 비영리 사단법인에서 동서양의 다양한 ‘고전’의 번역본을 출판하는 시리즈다. 그동안 나온 책을 보면 <사기>, <한비자>, <수호전> 등 중국의 경전과 소설, <징비록>, <지봉유설>, <삼국사기> 등 한국의 저술이 있다. 물론 <국부론>, <종의 기원>,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등 유럽의 고전도 있다. 2019년 10월 25일에 낸 32차까지 모두 150권 넘는 책을 낸 거다.


올재 클래식스는 발행 부수가 한정되어 있다. 매 시리즈는 권당 5,000부만 인쇄해 4,000부는 일반에 판매하고 1,000부는 복지시설 등에 기부한다. 완판되더라도 다시 찍지 않는다. 구하기 힘드니 인기 있는 걸까?


이 책들은 저렴하다. 한 권에 2,900원이다. 한 시리즈가 보통 네 권이니 웬만한 책 한 권보다 싸다. 저작권 해결된 책들과 재능 기부, 후원 등으로 가격을 낮춘다고 한다. 제작비 때문인지 이 책들은 조금 촌스럽다. 오렌지 색의 표지가 눈에 확 띈다. 게다가 그 표지와 내지는 얇고, 작은 활자가 한 페이지를 가득 메워 읽기에도 불편하다. 그래도 저렴하니까 인기 있는 걸까?


올재_교보 매장.jpg ▲ 올재 클래식스 발매된 날 풍경. 광화문 대형서점 매장에 사람들이 줄을 서서 책을 집는다.


올재 클래식스의 새 시리즈는 매번 금요일 오전에 어느 대형서점의 인터넷 사이트와 광화문 매장에서 먼저 판매된다. 나머지 물량으로 토요일 오전부터 전국의 지점으로 풀리고. 내 경험에 의하면 보통은 사이트 열리고 얼마 후 인터넷 물량이 소진되기 마련이었다. 일하다 보면 놓치기 일쑤였다.


그래도 2016년까지는 직장이 광화문이라 점심시간에 들러서 살 수 있었다. 그런데 인기 있었던 시리즈의 경우는 점심시간에 가도 ‘매진되어 죄송합니다’라는 안내문만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토요일 아침 집 근처 그 서점 지점이 문 열 때 달려가야 한다.


내게는 특히 2018년 10월 25일 금요일에 발매된 28차 시리즈를 구하기 위한 우여곡절이 많았다. 며칠 전부터 페이스북 페이지에 새로운 시리즈가 발매된다고 예고되어서 나는 설렜다. 읽고 싶었던 ‘조지 프레이저’의 <황금가지>와 <묵자>가 포함되어 더욱 기다려졌다.


그래서 금요일 오전 11시에 시작되는 인터넷 구매를 위해 알람을 미리 맞춰 놓았다. 아침부터 바쁜 일은 오후로 미루었다. 그런데 하던 일에 살짝 몰입해서 깜빡, 평소 조용하던 전화까지 울리는 바람에 깜빡. 그만 인터넷 사이트 입장 시간을 놓쳐버리고 말았다. 역시나 11:00가 넘으니 사이트가 버벅댔다. 고작 몇 분 늦었는데. 그래도 연결이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구매 버튼을 눌렀다.


올재_구매 대기.jpeg ▲ 올재 클래식스 28차 인터넷 구매 페이지 화면. 11시에 오픈되자마자 클릭했으나 이미 1500명이 넘게 대기하고 있었다. ⓒ 강대호


그런데 벌써 “현재 동시 주문량이 많아 장바구니 접속 대기 중입니다”라는 메시지가 떴다. 내 앞에 1,500명이 넘게 있었다. 여기서 ‘새로 고침’ 버튼을 누르면 순서가 더 밀리기 때문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초조한 시간이 지나고 마침내 구매 페이지로 넘어갔다. 떨리는 손으로 정보를 입력하고 그다음 단계로 가려는데 이미 “한정 물량 소진”이라는 메시지가 떴다. 아직 11시 30분도 안 된 시간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토요일 오전에 집에서 제일 가까운 지점으로 달려갈 수밖에. 불금 모임이 있었지만, 평소처럼 마시질 못했다. 긴장했는지 잠도 깊게 들지 못했다. 오픈 시간보다 일찍 서점 건물 주차장으로 들어가는데 앞서 들어가는 차들이 보였다. 오피스 건물이라 토요일에 출근할 리가 없는데 말이다.


그 차에서 내린 사람들을 주차장 엘리베이터에서 만났는데 역시나 모두 서점이 있는 지하 1층에서 내렸다. 서로를 의식하는 게 느껴졌다. 다행히 그 지점에 할당된 물량은 충분했다. 괜히 앞다투어 뛰었다가 어색하게 웃고 말았다. “지난번 ‘삼국지’는 눈앞에서 놓쳤거든요” 나보다 빨리 달린 남자는 묻지도 않은 말을 했다.


토요일 오전 늦잠은 못 잤지만 소중한 아이를 얻은 것 같았다. 그런데 나뿐만이 아니었다. 지인들 SNS에 이 시리즈를 구했다는 인증샷이 그 주말 내내 올라왔다. 그런데 왜 올재 클래식스 시리즈를 좋아하는 나 같은 사람들이 많은 걸까.


어릴 적 어떤 친구는 소장가치가 있다고 솔직하게 얘기했다. 인터넷 중고책방에 나온 가격을 언급하면서. 물론 되팔려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 물량이 많지는 않은 거 같다. 재단과 서점 측에서도 크게 신경 쓰는 거 같지도 않았다.


내 경우를 생각해보면 올재 클래식스는 그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들 마음을 파고든 거 같다. 나는 책 읽는 것도 좋아하지만 ‘책’이라는 상품을 무척 좋아한다. 이 시리즈를 구매하는 지인들도 그렇다고 했다.


나는 책꽂이에 꽂힌 ‘책등’을 바라보면 맘이 편해진다. 가끔 순서를 바꾸기도 하면서 마음을 달래기도 한다. 다양한 색깔, 크기, 디자인의 책 그 자체가 주는 외적 아름다움이 내적 아름다움 못지않다.


특히 출판사들이 내는 시리즈를 순서대로 꽂아보면 그 외적 통일감과 안정감은 대단하다. 그 내용이 주는 아름다움을 더해주는 것 같다. ‘문학과 지성사’의 시집과 ‘민음사’, ‘열린책들’, ‘문학동네’의 소설이 그런 책들이다.


올재_교보 진열.jpg ▲ 올재 클래식스 28차 ⓒ 강대호


올재 클래식스도 내게는 같은 맥락이다. 책장 곳곳에 꽂힌 주황색 책들을 보면 묘하게 위로가 된다.


이 시리즈를 내가 좋아하는 점이 하나 더 있다. 함께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페이스북 페이지를 통해 함께 읽는 캠페인이 진행된다. 하루에 30페이지 정도 읽다 보면 두꺼운 책도 어느새 맨 뒷장이다. 종이가 얇아 너덜너덜해지고, 활자가 작아 한 페이지에 많은 문장이 들어가는 바람에 눈은 아프지만 읽는 재미는 비싼 책 못지않다.


‘올재 클래식스’를 보면 오래전 ‘계림문고’나 ‘삼중당문고’가 생각난다. 어릴 적 용돈 받을 때마다 어떤 걸 살까 설레던 기억. 그렇게 한 권씩 사서 읽고 모으는 재미가 쏠쏠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문고본들은 정체성이 확실했다. 책꽂이에서 자기의 영역을 확실히 차지했으니까. 전집에도 전혀 밀리지 않는 위용이 있었다.


그렇지만 집을 옮기는 과정에서는 제일 먼저 버림받기 마련이었다. 값싼 책은 먼지 날리는 무거운 짐일 뿐이었으니까. 이래저래 사라진 그 책들이 그리워진다. 그래서 올재 클래식스 시리즈에 맘을 주고 있는 것 같다. 어떤 시리즈가 새로 나올지 설레게 하는 책이니까.


(2019년 10월 25일에 ‘올재 클래식스 32차’가 발매되었다. 이 글은 2018년 28차 발매 때 경험을 담은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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