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으로 파괴된 곳, 그리고 혁명의 불씨가 피어난 곳
1789년의 프랑스 시민혁명은 인류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가장 대표적 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파리의 혁명은 1789년 그 이전에도 있었고, 그 이후에도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에티엔 막셀의 반란'(1358) - 왕이 시테성을 버리고 루브르로 이사하게 만든 사건이다.
그리고, 루이 14세가 어릴 때 있던 귀족의 반란 '프롱드난(1648-1653)'은 루브르궁을 버리고 다시 베르사유궁으로 이전하게 만드는 중요한 계기가 된 사건 다.
이후 혁명 중 나폴레옹 3세가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지고, 항복했을 때, 시민들이 들고일어난다. 이것이 파리 코뮌이다. 1871년의 파리코뮌에 의해 가장 많은 왕가의 건물들이 파괴되었다.
파괴된 대표적 건물이 튈르리 궁으로, 루브르궁과 연결되어 있던 이 왕궁과 함께, 루브르궁도 파괴될 뻔했다.
그리고 루이 14세의 동생, 필립 오를레앙 공작이 지은 생클루 성도 그때 화재로 전소되었다.
루이 14세의 궁이 베르사유궁이라면, 오를레앙 공작의 궁이 바로 생클루 성이었다.
튈르리 궁과 생클루 성은 화재로 파괴되었지만, 지금은 각각의 궁에 딸렸던 정원이 남아, 당시의 궁이 얼마나 화려했을지 상상하게 한다.
파리시청과 팡테옹
왕정이 떠오르고, 종교건물이라 파괴되어야 했던 건축이 있는 반면, 시민혁명의 상징이자 표상이라고 할 수 있는 건물도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바로 파리 시청이다. 베르사유궁이 왕의 영광을 드러내는 왕궁의 정수라면,
시민혁명의 상징과 가치를 가장 잘 담고 있는 시민의 궁이 바로 파리 시청이다.
그리고 팡테옹은 프랑스 명사들의 안식처로, 시민혁명의 기반이 되는 계몽주의자들이 묻힌 곳이다.
나폴레옹 3세에 반기를 들었던 빅톨 위고의 장례식이 국장으로 치러진 곳이 바로 팡테옹이다.
나폴레옹 3세는 빅톨 위고의 장례식을 계기로 시민 반란이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하여 여러 가지 억제 장치를 마련했다. 우리나라의 3.1 운동이 순종의 장례식을 계기로 불길처럼 번진 것을 연상시킨다.
팡테옹은 루이 15세가 파리의 수호성인, 성녀 주느비에브에게 봉헌하기 위해 지은 성당이다.
그것을 혁명 때, 성당 건물을 몰수하고 종교적 색채를 지우는 리노베이션을 한다.
빅톨 위고의 장례식 이후, 프랑스의 이름을 빛낸 명사들, 국가를 위해 희생한 영웅들 중 선택받은 이들이 이곳에 안장된다. 예를 들면 볼테르와 루소, 마리 퀴리, 레지스탕스 운동을 활발히 전개한 독립운동가가 묻혀있다.
바스티유 감옥
바스티유 감옥도 프랑스 시민혁명의 시발점이 된 중요한 건축물이다.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감옥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바스티유도 혁명 때 허물어졌다. 1789년 7월 14일이 바스티유 감옥이 함락되고, 이날은 지금도 프랑스에서 가장 큰 국경일로 축하하고 있다.
바스티유는 전제군주의 폭정을 상징하여 시민혁명의 타깃이기도 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앵발리드로 쳐들어가서 대포와 총을 탈환한 민중들이 탄환이 저장되어 있는 바스티유로 달려간 것이다.
바스티유는 샤를 5세가 파리에 성벽을 쌓으며 파리를 지키고자 쌓은 성채이자, 자신이 파리에서 에티엔 막셀의 반란을 경험하고, 마레지구에 있던 왕궁에서 빠르게 피신하려는 목적도 있던 건축물이다.
바스티유가 함락되고, 민중들은 바스티유를 허물면서, 나온 돌로 콩코드 다리를 짓는데도 사용하고, 일부의 돌은 바스티유 감옥 모형을 깎아서 기념품으로 팔기도 했다. 지금도 바스티유 광장에는 바스티유 감옥이 있던 자리의 흔적이 길에 남아있다.
팔레 루와이얄
팔레 루와이얄(royal, 왕의)은 말 그대로 '왕의 궁'이다. 다른 어떤 곳도 노골적으로 '왕의 궁'이란 이름을 붙이지는 않았다. 사실 이곳은 '추기경의 궁'으로 시작해서 왕의 궁으로 귀결된 곳이다.
1628년 루이 13세의 재상 추기경 리슐리외가 왕이 머무는 루브르궁 가까운 곳에 자신의 궁을 짓는다. 그리고 1636년, 리슐리외가 죽으면서 루이 13세에게 자신의 궁을 유산으로 넘긴다. 루이 13세는 리슐리외가 죽은 지 6개월 후에 죽음을 맞는다. 그의 아들 루이 14세가 당시의 루브르궁 보다 더 현대적인(?) 추기경이 물려준 궁에서 머물고, 이때부터 팔레 루와이얄로 불리게 된다.
추기경은 샤를 5세 성벽이 허물어지면 도시 안에 넓은 땅을 확보하게 된다. 왕궁 루브르와도 가깝고 넓은 땅에는 화려한 아파트망을 들이고, 정원을 조성해서 쾌적한 환경을 제공한다. 건물의 1층에는 정원을 감상하며 비가 와도 쾌적하게 이동할 수 있는 갤러리(회랑)가 4면을 둘러싸고 있다. 게다가 한 구역에는 몰리에르가 상시 연극을 올릴 수 있는 극장도 짓는다. 그 극장이 지금의 코미디 프랑세즈로 이어진다. 당시의 추기경궁 규모를 보면, 리슐리외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18 세기말, '왕의 궁'이란 이름이 붙은 이곳에서 시민혁명의 불씨가 피어난다.
팔레 루와이얄은 루이 14세의 동생 필립 오를레앙 공작에게 넘어간다. 이때부터는 더 이상 왕이 살지 않는 이름만 '왕의 궁'이 된다. 그리고 이곳에서 혁명의 씨앗이 배양되고, 역사에 혁명의 무대로 기록된다.
그의 후손 필립 에갈리테(égalité, 평등)는 루이 16세의 처형에 찬성하는 표를 던진 사람이다. 후일 그의 아들 루이 필립이 왕으로 등극한다.
즉, 부르봉가의 직계가 물려받은 왕좌가 부르봉가의 방계인 오를레앙가로 넘어간 것이다. 하지만, 부르주아 왕이라고 불린 루이 필립도 다시 혁명으로 쫓겨난다.
필립 에갈리테가 팔레 루와이얄을 소유하고 있을 때, 그는 이 건물로 임대업을 해서 돈을 벌었다.
그리고 1층에는 다양한 상점들이 입점했는데, 카페, 레스토랑(당시에 문 연 레스토랑 Grand Véfour 그랑 베후르는 지금도 영업 중), 도박장 등이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창녀들도 여기저기 영업을 하는 그런 유흥의 장소였다. 바로 이곳의 카페에서 기자인 카미으 데물랑(Camille Desmoulins)이 사람들을 선동해서 앵발리드로 무기를 탈환하러 몰려간다. 그리고 왕당파였던 젊은 아가씨 샤를롯 코흐데(Charlotte Corday)가 근교 호텔에 머물며, 이곳의 상점에서 마라를 살해할 칼을 샀다고 한다.
이곳은 현재 헌법재판소, 국가자문위원회, 분쟁조정 법원이 자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