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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시 은둔자 Oct 14. 2020

생드니 바실리카, 최초의 고딕 성당

프랑스 왕실 죽음의 안식처 (네크로폴)

생드니 바실리카, 우리나라의 종묘에 해당?

생드니(Saint Denis) 바실리카는 42명의 프랑스의 왕, 32명의 왕비, 왕자와 공주들이 영면해 있는 곳이다.

우리나라의 종묘와 두 가지 점에서 큰 차이가 있는데, 첫째는 왕실 네크로폴(nécropole: 죽은 자의 도시)이라 불리는 이곳은 왕들의 시체를 담은 관이 직접 묻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관을 장식하는 지상(gisant), 묘석의 횡와상은 누워서 기도하고 있는 조각들로,  오랜 시대를 증거 하는 귀중한 왕실 유물이다. 중세를 거쳐 르네상스 시대의 왕실 무덤 조각과 구조물은 프랑스뿐 아니라 유럽에서도 귀한 문화유산이다. 반면 종묘에 모신 신주는 죽은 이의 혼이 깃든 것으로 여기는 상징물이다. 둘째, 종묘는 이 씨 왕조, 즉 조선시대의 왕들만 모시고 있지만, 생드니 바실리카에는 3개의 다른 왕조, 즉 메로빙거(5세기-8세기), 카롤랑지엔(8세기-10세기), 카페시엔(10세기-19세기) 왕조의 왕들이 모여있다. 우리나라로 치면, 조선시대뿐 아니라 고려시대, 삼국시대의 왕과 왕비들이 모두 모여있는 셈이다.


생 드니 바실리카에 안치된 왕족들의 묘지와 지상(묘지의 횡와상), 위키피디아


"성당의 자리:하늘조각, 무덤" 이란 지난 글에서 얘기한 원리대로, 생드니 바실리카는 파리의 첫 주교 생드니의 무덤이 있는 자리에 지어진 대성당이다.

'성인의 곁에 더 가까이'를 뜻하는 « ad sanctos »란 말은 살아서는 순례를, 죽어서는 성인의 무덤 곁에 잠드는 것으로, 성인의 곁에 묻히면 성인과 함께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믿음을 나타낸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상을 좋은 자리에 묻어드리면, 조상의 좋은 기가 후손에게 닿을 것이라 믿는 풍수지리의 원리 '음택'이 있다. 그리고 자신이 죽어서도 조상의 곁에 묻히기를 원해, 집안의 가족묘, 선산이 조성된다.

반면 서양에서는 종교를 배경으로, 성인의 곁에 묻혀서 사후 천당에 도달하려는 구체적인 소망을 갖는다. 그런 소망이 드러난 것이 바로 성인의 무덤자리에 성당을 세우고, 귀족은 성당의 지하에, 일반 신자는 성당의 옆 공동묘지에 묻히는 것이다. 작은 도시들은 지금도 여전히 성당 곁에 묘지가 있지만, 대도시들은 공동묘지를 따로 조성한다. 파리가 확장되면서, 성당 곁에 있던 묘지들을 모아서 이장(?) 했는데, 그것이 바로 덩페호슈로에 있는 카타콤브이다. 파리 안의 공동묘지는 좌안(센 강의 왼쪽)에 몽파르나스와 우안(센 강의 오른쪽)에 페르라쉐즈가 대표적이다. 파리와 근교의 공동묘지에서는 하나의 무덤 안에 가족이 함께 묻히는 합장이 흔하다. 부부뿐 아니라 자녀들도 같은 무덤에 묻힌다.

우리의 무덤은 주거가 자리 잡는 '양택'과 떨어진 곳에 조성되는데, 서양의 무덤은 마을의 중심에 자리 잡은 성당 구역에 포함되어 삶 속에 녹아있다. 파리의 공동묘지들은 모두 도심 안에 공원처럼 조성되어 가족들이 묘지를 방문하는 외에도 관광객들이나 방문객이 파리의 유명 인사들 묘지를 참배하기도 한다.


왼쪽은 도심에 자리잡은 몽파르나스 묘지, 멀리 몽파르나스 빌딩이 보인다. 오른쪽은 1815년 공원으로 조성된 페르라셰즈 언덕 모습, 한 귀퉁이에 묘지가 보인다. 위키피디아 


 




생드니 바실리카의 역사

생드니 바실리카의 역사는  파리에 처음 파견된 드니( Denis) 주교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아직 가톨릭이 국교로 인정받지 못하고, 탄압을 받던 시기, 로마에서 파리로 전교 사명을 띠고 왔던 드니 주교는 250년경 몽마르트르 언덕(Montmartre)*에서 머리가 잘리는 처형을 당한다. 전설에 따르면 드니 주교는 잘린 자신의 머리를 들고 5km 떨어진 생드니(Saint Denis) 지역**, 지금의 바실리카 자리에서 멈추었다고 한다. 성인으로 추대된 드니 주교는 생드니(Saint Denis)가 되고 그의 무덤 자리가 지금의 왕실 공동묘지, 바실리카 생드니로 확장된 것이다. 그의 무덤에서 시작하여, 작은 성소가 지어지고, 이후 점점 규모가 커져 바실리카가 되고, 이후 고딕 성당의 면모를 갖추며 1966년부터 주교좌성당, 즉 주교가 주관하는 대성당(카테드랄, cathedrale)이 된다. 대성당으로 번역되는 카테드랄은 카테드르(cathedre)가 있는 성당을 듯한다. 카테드르는 등받이가 높은 고딕식 의자로, 주교만이 앉을 수 있다. 즉, 카테드랄은 주교좌성당을 뜻하고, 이것이 대성당이라고 번역되는 것이다.


왼쪽, 노트르담 대성당 성모의 문에 있는 생드니 주교의 조각상. 오른쪽은 생드니 바실리카 북쪽문 팀판에 새겨진 드니 주교의 일화. 위키피디아


475년경 신심이 깊은 귀족, 생 주느비에브(파리의 수호 성녀)는 생드니의 무덤이 있는 성소에 종교건축을 짓기 시작한다. 이후 바실리카 양식으로 증축된다. 로마시대의 신전은 사제만이 들어갈 수 있는 신성한 공간이었다. 가톨릭 성당이 민주적으로 신자들을 안으로 들이고, 다 함께 미사를 보는 의식을 하면서, 바실리카와 같은 많은 사람을 수용할 수 있는 건축 공간이 필요하게 된다. 그리하여 바실리카가 기능을 달리하여 종교건축으로 쓰이게 된다. 이후 바실리카는 중요한 성인이 묻혀서 순례객들이 많이 찾는 종교 건축물을 이른다.

즉, 건축 양식으로의 바실리카는 로마시대의 많은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는 넓은 공간으로, 포럼을 구성하는 건물이었다. 그리스 시대에는 법정으로, 로마시대에는 상업, 정치, 법률 기능을 담당한 많은 사람이 모이는 곳이었다. 가톨릭에서 성당으로 쓰이게 된 후로는 성인이 묻힌 종교 건축물을 뜻한다. 종교시설과 관련된 많은 용어들이 다양하게 있는데, 각 단어의 뜻을 구분하면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알 수 있다. (파리의 130개 성당들 중...)   


*몽마르트르 언덕(Mont+mart(y)re)의 이름은 '순교(martyre)의 언덕(mont)'을 뜻한다.

**생드니(Saint Denis) 지역 : 이 지역 이름도 성인으로 추대된 드니 주교, 즉 생드니의 이름을 땄다.






생드니 바실리카, 최초의 고딕 성당

12세기에 쉬제(Suger) 수도원장은 바실리카 성당을 최초의 고딕 양식으로 증축한다. 즉 프랑스에서 시작된 고딕 양식은 그가 창조했다. 


 왼쪽, 아베 쉬제 수도원장의 모습, 오른쪽의 원, 천사가 성모에게 그리스도의 잉태 소식을 알리는 장면, 성모의 발 아래 엎드린 쉬제. 위키피디아


쉬제는 요한 묵시록에 묘사된 천상의 예루살렘을 땅 위에 짓고자 했다. 아포칼립스(요한 묵시록)에 묘사된 천상의 예루살렘은 성스러운 도시, 벽은 금으로 이루어지고, 보석들로 장식된 빛의 거처였다. 그는 성서에 따라 신의 거처를 이상적인 비전과 우주적 완벽성을 따르고, 빛으로 충만한 곳, 절대적이고 순수한 존재만이 자리할 수 있는 공간으로 정의하고, 이를 지상에 실현한 것이 바로 최초의 고딕 성당, 생드니 바실리카였다.   

그래서 고딕 양식은 하늘을 향해 높이 솟아오르는 건축, 기둥이 받치는 높은 벽에 창을 내고, 색색의 스테인드글라스로 창을 장식해서 아름다운 빛이 가득 채워진 공간을 만드는 것이 핵심이다. 서쪽의 파사드를 장식하는 커다란 스태인드 글라스 장미창을 내고, 천정을 더 높게 하기 위해 교차형 첨두아치를 도입한다. 높아진 벽을 가로로 지탱하는 구조물 플라잉 버트레스도 고딕 양식의 특징이다.


왼쪽, 생드니 바실리카의 장미창, 오른쪽은 더 높은 층고, 더 넓은 창을 가능하게 한 외관 플라잉버트레스는 벽의 하중을 지탱한다. 위키피디아




생드니 바실리카의 지상(gisant)들


13세기에 생루이(루이 9세)는 16개의 지상에 해당하는 기념 조각을 만들게 한다. 이는 왕 자신과 자신의 후손들이 프랑스의 정통성을 이어받는 왕조임을 공고히 하려는 목적을 가진 사업이었다. 후일 부르봉 왕조가 무너진 자리에 황제로 등극한 나폴레옹은 자신도 이 생드니 바실리카에 묻히고 황실 무덤을 조성하여, 프랑스의 황제로써 정당성을 자리매김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15년간의 짧은 통치기간이 끝나고 다시 부르봉 왕조가 복귀되면서, 왕으로 등극한 루이 16세의 동생 루이 18세에 의해 복원된다.  

생드니 바실리카가 프랑스의 왕실 네크로폴로 종교적 정치적으로 중요한 장소이다 보니, 시민 혁명기에 중요한 타깃이 된다. 그리하여 왕들의 무덤이 파헤쳐지고, 유린당한다.

바실리카의 납으로 된 지붕은 뜯겨서 유럽과 전쟁을 벌이던 시민들에 의해 무기로 만들어진다.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와네트, 콩코드 광장의 단두대에서 처형된 두 사람의 시체는 복고 왕정의 왕, 루이 16세의 동생 루이 18세가 이곳에 고이 모셔놓고, 조각도 안치했다. 


생 드니 바실리카에 있는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와네트의 묘지 조각, 루이 18세에 의해 만들어졌다. 위키피디아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적인 지상으로 프랑수와 1세, 앙리 2세와 카트린 드 메디치의 지상이 있고, 루이 12세와 안 드 브르타뉴의 지상이 있다. 아래쪽 누워있는 조각인 지상은 죽은 자의 사실적인 모습을, 위쪽은 경건한 모습으로 기도하는 이상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내려온 종교적이고 이상적인 죽음과 더불어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시각으로 죽음을 바라보는 두 개의 세계가 공존하는 것을 보여준다. 바실리카에 최초로 묻힌 다고베르 왕(603 혹은 605 - 638 혹은 639)으로, 메로빙거 왕조의 왕이다. 


왼쪽 생 드니 바실리카에 있는 루이 12세와 안 드 브르타뉴의 지상, 오른쪽 다고베르왕의 무덤.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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