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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시 은둔자 Nov 01. 2020

마리 앙투와네트의 종말

프랑스의 마지막 여왕,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다

그녀가 베르사유궁의 왕실 여주인으로 호령하던 시절, 그녀의 가볍고 경솔한 행동들은 많은 구설수를 낳고, 온 백성을 미움을 받는 여왕으로 등극해 있었다.

시민혁명의 불화가 베르사유궁에 닿아, 그녀는 왕궁에서 쫓겨나 파리의 튈르리 궁에 갇히는 포로의 신세로 전락한다. 그리고, 남편인 루이 16세를 설득하여 함께 프랑스를 탈출하다 실패하여, 바렌에서 잡혀오고, 감옥처럼 감시받는 왕궁이 아닌 진짜 감옥 탕플 타워에 갇힌다.

단두대의 전실로 불리는 콩시에르주리 감옥에서 재판을 받는 과정에 그녀는 어느덧 성숙한 인격의 왕관 잃은 여왕, 모성이 강한 엄마로 변해 있었다. 결국 그녀는 인간으로의 위엄을 지키며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다.

그리고 그녀의 이야기는 베르사유궁을 지은 태양왕 보다 더 많은 인기를 누리며 회자되고 있다.




루이 16세는 1793년 1월 21일에 처형된다. 처형 전 날인 1월 20일 루이 16세는 마리 앙투와네트와 남은 두 아이, 딸 마리 테레즈와 아들 루이 샤를, 그리고 자신의 여동생 엘리자베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한다. 다음날, 그는 가족들을 더 이상 보지 않고 처형장으로 떠난다. 아들에게는 왕의 인장(옥새)을, 아내에게는 결혼반지를 전해달라고 부탁하고, 묵주반지는 손가락에 끼고 떠난다. 그는 처형 전 날도 편하게 식사를 하고 잠도 잘 자고 일어났다고 한다. 루이 16세는 자신들의 조상과는 달리, 정부를 두지 않은 드문 왕이고, 신앙심이 깊은 왕이었다.

루이 16세가 죽기 전에 남긴 말은 다음과 같다. "내게 씌워진 모든 혐의에서 나는 무죄입니다. 나는 죄 없이 죽습니다. 바라건대, 내 피로 프랑스 백성들의 행복이 공고해지길 바랍니다."


왼쪽, 탕플 타워에서 루이 16세가 처형되기 전날 가족들과 작별인사를 한다. 오른쪽, 콩코드 광장 단두대에서 처형된 루이 16세.   위키피디아



왕이 처형된 이후에, 마리 앙투와네트는 콩시에르주리로 옮겨져서 재판을 받고, 처형된다. 루이 16세가 죽고, 아직 8살이 되기 전인 그의 아들 루이 샤를은 자동으로 루이 17세의 타이틀이 생기지만, 이미 폐위된 왕의 아들이니, 명목상의 왕일 뿐이었다. 그리고 루이 샤를은 이 탕플 타워(Tour du Temple)에서 10살의 나이로 죽음을 맞는다.

사실, 모든 프랑스인들이 왕을 처형하는데 동의하는 것은 아니었다. 왕당파라 불리는 이들은 왕이 처형돼 이후에도 탕플 타워를 지속적으로 찾아와서, 왕을 기리며 추모했다. 이런 행렬은 나폴레옹이 집권을 한 이후에도 지속되어, 나폴레옹의 명으로 탕플 타워를 허물게 된다. 하지만, 복고 왕정시대에 루이 16세의 동생 루이 18세가 왕위에 오르고,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와네트의 기념비를 생드니 바실리카에 안치한다. 그리고 루이 18세는 그 두 사람이 처형되고 묻혔던 마들렌 공동묘지의 자리에 두 사람을 기리는 속죄의 샤펠(Chapelle expiratoire)을 짓는다.   


왼쪽,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와네트, 루이 17세가 갇혀있던 탕플 타워. 오른쪽, 루이 16세를 기리는 속죄의 샤펠. 위키피디아


루이 16세가 처형된 이후에, 그녀는 콩시에르주리의 감방으로 옮겨지고, 그곳에서 3개월가량 (8월 2일 - 10월 16일까지) 지내게 된다.

콩시에르주리는 혁명 당시 처형장의 전실로 불리고 있었다. 이곳의 감옥에 수용된다는 것은 처형의 날이 멀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왼쪽, 시테궁에 딸린 콩시에르주리의 마리 앙투와네트 감방, 오른쪽, 콩시에르주리 위에 있는 혁명 재판장에서의 마리 앙투와네트. 위키피디아


콩시에르주리는 시테궁의 한 영역으로, 이전에는 왕의 근위대들이 대기를 하던 넓은 홀과 지금도 남아있는 시테궁의 중세 흔적인 네 개의 타워에 연관된 부속 시설들, 그리고 혁명 당시처럼 감옥이 있었다. 이 감옥은 무엇보다 시테궁이 왕궁으로의 기능을 잃은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재판의 장소였기 때문에, 재판에서 유죄의 판결을 받은 죄수들을 수감하는 감옥이 필요했던 것이다.

로베스 피에르가 권력을 잡고 공포정치를 펼치던 시기에는, 재판과 처형이 바로바로 이루어져서, 콩시에르주리는 단두대의 전실이라는 무서운 별명을 얻게 된다.

마리 앙투와네트도 이곳으로 옮겨지고 재판을 받게 된다. 재판 당시, 그녀는 남편이 죽었기 때문에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 그녀의 재판은 20시간 동안 지속되었다. 당시의 마리 앙투와네트는 건강이 나쁜 상태였다. 로베스피에르는 마리 앙투와네트가 하혈을 해서, 의사를 불러 그녀를 검진하게 한다. 의사는 그녀가 자궁암으로 2-3달 밖에 살지 못할 것이라고 한다. 그러자 로베스피에르는 그녀의 재판을 서두르게 된다. 그녀가 자연사를 하는 것과 처형을 당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너무나도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로베스피에르는 그녀는 반드시 시민혁명의 적으로 유죄판결을 받고 처형당해야만 한다고 판단했다.

로베스 피에르는 루이 16세의 처형을 투표에 부치고, 이런 말을 했다고 전해진다.

" 루이 카페는 어쩌면 죄가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가 무죄가 되면 우리의 혁명이 유죄가 된다! "

그리고 루이 16세는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다.

마리 앙투와네트는 재판장에서 자신에게 씌워진 혐의들에 대해 스스로 방어를 했고, 베르사유궁에서의 가볍고 경솔한 여왕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을 갖춘 인간으로 자신을 변호하고, 재판장에 자리한 여자들에게, 자식을 사랑하는 모성을 가진 어머니로서의 자신을 이해해 달라고 호소했다.

그녀의 감옥에는 항상 두 명의 병사가 지키고 있었고, 그녀를 옆에서 상시 감시하는 여자도 딸려 있었다.

처형장으로 가기 전에, 그녀의 긴 머리는 짧게 잘려 나갔다. 단두대의 칼이 머리카락으로 방해받지 않게 하기 위한 준비였다. 단두대로 향하는 수레에 올라 탄 마리 앙투와네트는 38살 생일을 앞두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머리가 하얗게 세어서, 마치 60살의 여인처럼 보였다고 한다. 그녀는 콩코드 광장에 설치된 단두대에서 처형이 되었는데, 루이 16세가 9개월 전에 처형된 같은 장소였다. 콩코드 광장(그녀가 처형될 때에는 혁명 광장, 그녀가 결혼식을 할 때에는 루와얄 광장)은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와네트가 결혼을 하고 축하하는 불꽃놀이 행사가 대대적으로 벌어진 곳이었다. 그런 장소에서 23년 후에 두 사람 모두 단두대에서 머리가 잘리는 상황이 되리라고 그 누가 상상을 했었을까.    


감방에서 나와 처형장으로 가는 수레로 향하는 마리 앙뚜와네트, 콩시에르주리에 있을때의 초상화,  콩코드 광장의 단두대에서 처형된 마리 앙투와네트,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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