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느비에브 성녀에서 프랑스의 혁명영웅을 기리는 명사의 전당으로
생드니 바실리카가 프랑스 왕가의 무덤이라면, 혁명의 영웅들이 묻힌 곳은 바로 팡테옹이다.
팡테옹은 신고전주의 양식, 극 고대의 그리스와 로마 양식이 혼합되어 있고, 고딕 양식도 포함된 절충주의 양식으로 보기도 한다. 팡테옹의 파사드는 로마의 팡테옹을 본떠서 지어졌는데, 정면의 열주 위로 문구를 새긴 중간 부분 (아키트라브+트리글리프)이 있고, 그 윗면에 삼각형 상단부(박공과 유사)가 지붕과의 사이를 막고 있다. 불어로는 이 부분을 프롱통 (fronton, 영어로는 페디먼트 pediment)이라고 하는데, 이곳을 조각으로 장식해서 건물의 목적과 기능을 알린다. 하지만, 프랑스인들의 은유(알레고리)와 상징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 안에 담긴 의기를 읽기 어렵다.
이 알레고리를 알면, 현대 건축 이전의 전통건축이라고 불릴 수 있는 건축에 담긴 조각이나 장식이 전달하는 메시지를 읽을 수 있게 된다. 아는 만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건축 언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팡테옹은 성당으로 태어나서, 시민혁명을 통해 영웅들의 무덤으로 바뀌어 오늘에 이른다. 그런데 팡테옹의 운명은 프랑스의 혁명과 복고 왕정, 그리도 제정시대와 또 다른 혁명기에 따라 변화된다. 즉, 성당에서 영웅들의 무덤으로, 다시 성당으로, 그리고 최종적으로 명사들의 무덤 팡테옹으로 변화에 변화를 거듭한다. 그 부침의 역사가 팡테옹 프롱통의 조각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프롱통은 네 번째 바뀐 뒤 정착된 것이다. 팡테옹의 정면을 장식하고 있는 프롱통에는 조국과 혁명의 메시지가 담겨있다. 그 건축 언어가 전달해 주는 이야기를 함께 따라가 보자.
루이 15세는 자신의 병이 낫게 되면, 성당을 짓겠다는 서원을 하고 이 성당을 짓는다. 성당은 성녀 주느비에브를 기리는 성당으로, 이 성녀는 파리의 수호성인이다. 5세기에 훈족으로부터 파리를 지켜준 성녀이고, 팡테옹이 자리 잡은 언덕(센 강으로부터 23미터 높이의 나름 언덕!)은 그녀의 이름을 따서 주느비에브 언덕으로 명명된다. 그녀는 생드니 주교의 무덤이 있는 곳에 성당을 짓기도 했다.
로마시대에 이 언덕에는 포럼이 있었고, 이후 주느비에브 수도원(abbaye Saint-Geneviève)이 자리한다. 주느비에브의 무덤이 이 언덕에 있던 수도원 성당에 안치되고, 프랑스 왕으로 처음 세례를 받은 클로비스 왕과 왕비 클로틸드도 주느비에브 성녀의 곁에 묻힌다. 지금도 당시의 수도원 흔적을 볼 수 있는데, 프랑스의 명문인 앙리 4세 중-고등학교가 이 수도원에 자리를 잡고, 클로비스 타워, 성당, 수도원 중정(Cloître)등이 보존되어 있다.
루이 15세가 생 주느비에브를 기리는 성당을 지으면서, 성당의 지하에 공동묘지를 마련하는데, 이것은 부르봉가의 왕족들을 안치하기 위한 것이었다. 건축가 수플로(Soufflot)는 성당을 지으며, 빛을 발하는 십자가를 천사들이 둘러싸고 있는 프롱통 부조를 조각가에게 주문한다. 팡테옹 앞의 길은 이 건축가의 이름을 따서 붙여졌다.
시민혁명으로 성당의 색깔이 지워지고, 그 위에 혁명을 기리는 부조가 제안된다. 1791년에 이곳에 '조국이 위대한 이들에게 감사하며'라는 문구를 파사드 프롱통 아래 새겨 넣고, 프롱통의 부조는 가운데 조국을 상징하는 여신이 영예의 관을 애국자와 군인에게 수여하는 것으로 제안된다. 그리고 혁명과 자유를 상징하는 알레고리들로 장식된다.
사실, 시민혁명은 군인의 의미를 극적으로 바꾸는 계기가 된 역사적 사건이다. 혁명 이전 군대에서 싸우는 군인은 돈을 받고 싸우는 용병을 뜻했는데, 시민혁명으로 자신의 국가(사실 국가란 개념도 이 시기에 명확해진다) 안위를 위해 돈을 받지 않고 싸우는 시민군이 생겨난다. 그리고 국가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군인은 애국자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나폴레옹에 의해, 혁명의 전당은 프랑스의 위인들의 무덤을 지하에 안치한, 팡테옹(모든 신을 위한 신전)으로 변신한다. 나폴레옹은 시민혁명과 전쟁으로 영웅이 되었으나, 스스로 황제로 등극하며, 혁명과는 거리를 두게 된다. 그리하여 혁명의 색채가 너무 진한 프롱통을 천으로 가려 놓는다.
복고 왕정이 돌아와서, 루이 16세의 동생 루이 18세는 팡테옹을 다시 생 주느비에브 성당으로 복원시킨다. 문구는 라틴어로 새겨 넣고, 프롱통 부조도 첫 번째의 빛을 발하는 십자가로 바꿔 넣는다.
복고 왕정을 1830년 7월 혁명이 무너트리고, 루이 필립 도를레앙을 프랑스 시민들의 왕으로 옹립한다. 부르주아 왕이라고도 불렸는데, 혁명과 왕이 애매한 관계를 맺게 된 것이다. 하여튼 루이 필립은 성당을 다시 팡테옹으로 되돌린다. 그리고 '조국이 위대한 이들에게 감사하며'라는 문구도 다시 새겨 넣는다. 부조의 중앙에는 두 번째 프롱통과 같이 조국의 알레고리가 영예의 관을 양쪽에 수여하는데, 이번에는 구체적인 명사들의 얼굴이 새겨지게 된다. 이것이 정치적인 이슈를 낳기도 하지만, 조각가는 외부의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작품을 고수한다. 그러나 작품이 완성되기 전에 구설수에 오르지 않기 위해, 막으로 가린 채 작업을 해나간다.
작품이 너무 궁금했던 빅톨 위고는 프롱통으로 올라가서 작품을 보고 만족스러워하며 조각가에게 칭송의 편지를 보냈다고 하고, 프롱통의 부조가 공개되고 난 뒤에 여러 불만의 소리들도 있었다고 한다.
여하튼,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작품은 불멸을 상징하는 별의 관을 쓴 조국 알레고리가 오른쪽 아래 혁명의 모자를 쓴 자유의 알레고리에게 영예의 관을 받아 양쪽에 수여를 하고, 왼쪽 아래 역사의 알레고리가 역사를 써나가고 있는 장면이 중앙을 차지한다. 오른쪽은 계몽주의 철학자 루소와 볼테르가 앉아있고, 라파예트를 비롯한 혁명주의자들이 영예의 관을 받아 들고 있다. 루소와 볼테르는 서로 라이벌 관계였는데, 프롱통에서는 나란히 앉아있고, 지하의 무덤에서는 두 사람의 기념 조각이 서로 마주 보고 있다. 왼쪽에는 나폴레옹을 비롯한 전쟁의 영웅들이 영예의 관을 받아 들고, 끝에는 군사학교의 학생들도 자리한다.
프랑스를 위해 목숨을 바친 애국지사, 프랑스의 이름을 드높인 명사들로 팡테옹에 잠든 이들은 다음과 같다.
시작은 프랑스의 혁명가, 미라보와 마라, 계몽주의 철학자, 장 자크 루소와 볼테르였다. 빅톨 위고와 에밀 졸라, 장물랑, 앙드레 말러, 알렉상드르 뒤마, 피에르와 마리 퀴리 부부가 묻혔는데, 마리 퀴리는 최초의 여성으로 선택되었다.
빅톨 위고는 나폴레옹 3세의 희망과 오스만의 주도하에 진행된 역사 이래의 가장 큰 대대적 파리 정비에 강렬하게 반대하고 저항한 지식인 중 한 명이다. 그는 나폴레옹 3세를 나폴레옹 1세의 가장 큰 수치스러운 업적 중 하나라고 했으며, 나폴레옹의 친위쿠데타에 반대하다 영국의 망명길에 오르기도 했다.
빅톨 위고의 그 유명한 '노트르담의 꼽추'는 중세시대의 파리와 노트르담 성당에 대한 깊은 이해와 사랑을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1885년 빅톨 위고의 장례행렬이 팡테옹으로 향할 때, 시인이자 작가, 정치인이었던 그를 추모하는 인파가 거대한 물결을 이뤘다. 당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던 정부는 추모의 인파가 반란을 일으키지는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장례를 조심스럽게 준비한다. 우리나라에서 1919년 순종의 장례를 계기로 모인 인파들이 제국주의자들에게 반기를 든, 3.1 운동이 거대한 물결이 되어 전국적으로 퍼졌던 역사가 떠오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