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삶을 들여다보다, 이탈리아 09편
트라스테베레의 첫인상은 로마의 다른 곳과 조금 달랐다. 이는 귀족들의 터전이 아니었기에 좋은 돌과 정교하고 화려한 문양들을 사용하지 못한 탓도 있지만, 그런 세세한 것이 아닌 첫눈에 들어오는 분위기에서 오는 다름이 있다.
'뭔가 느낌이 조금 다른데... 단출하고 소박한 건물 때문인가? 그런 차이는 아닌데...'
'색감이 조금 다른데... 음... 뭐랄까... 채도가 좀 높다?'
길에서 느꼈던 작은 차이는 거리의 색감이다. 다른 곳보다 조금 더 진한 색감의 건물들이 만드는 거리는 오래된 시간이 만들어낸 검은색의 낡은 바닥 돌과 독특한 조화를 이룬다.
밝고 환한 색들로 채워져 있다지만, 기본적으로 낡음에는 삭막함이 따라온다. 낡음에서 삭막함을 걷어내고 생기를 불어넣는 최고의 재료는 자연이다. 이곳의 좁은 골목에서는 푸른 나무들을 생각보다 자주 접할 수 있다.
담벼락이 전부 담쟁이로 뒤덮여 있는 곳도 있고, 소심하게 담을 타는 담쟁이도 있다. 창가 선반에 작은 화분들만 있는 길도 있다. 하지만, 그것의 많고 적음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계획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다소 화려한 색감의 건물들은 검정 혹은 짙은 회색의 바닥과 벽을 덮고 있는 담쟁이나 화분들의 다양한 푸르름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사람이 만들어낼 수 없는 것들의 묘한 조화가 주는 매력이 있다.
단순한 벽, 단순한 창과 문들, 섬세하게 조각된 장식은 찾아볼 수 없지만 이런 무덤덤한 건물들이 만들어낸 길임에도 이미지가 기억에 남는 이유는 모두 제각각면서도 독특한 건물의 색과 오랜 시간이 그 위에 남겨 놓은 흔적 때문이 아니겠는가!
벽돌 위에 시멘트를 바르고 페인트도 여러 번 칠한 담벼락은 당장 허물고 새로 짓는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을 만큼 허름하다. 무심코 지나치면 아무에게도 주목받지 못할법한 오래된 길의 낡은 담벼락 한 부분은 얼마나 많은 장면과 기억들을 만들어 냈을까?
장면이 이야기가 되기도 하고,
기억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이야기가 장면이 되기도 하고,
이야기를 기억하기도 했을 그런 것들 말이다.
이 장면의 가장 최근 기억은 아이언맨 낙서가 아닐까?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며 길을 걷다 보면, 저런 이런 것들이 눈에 띈다. 혼자만의 의미를 부여해 보기도 하고, 갖고 있는 의미를 유추해 보기도 한다. 길을 걷는 재미다. 오랜 골동품점 같은 장면을 발견하는 행운은 덤이다.
좁은 골목들을 다니다 탁 트인 공간을 만나면 잠시 멈춰 서게 된다. 여러 갈래의 길이 만나는 지점에 생기는 자투리 공간일 수도 있고, 크고 작은 성당 앞에 만들어진 광장일 수도 있다. 어떤 장소이건 걷기를 멈추게 하는 것은 모두 같다. 그 멈춤으로 인해 우리는 잠시 쉬어갈 수 있다.
길은 목적지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 의식 속에 강렬한 장소로 기억되지 않는다. 단지 목적지로 잘 찾아가기 위한 특징들만 기억할 뿐이다. 그 특징이라는 것이 특징적인 건물일 수도 있고, 길 자체의 분위기일 수도 있다. 우리에게 길은 그냥 지나치는 공간이기 때문에 길 전체를 하나로 보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장소로 계획하는 일에도 소홀하다. 우리에게 길은 어디까지나 효율적이어야 하는 공간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을 얼마나 짧은 시간에 이동시킬 수 있느냐가 주된 관심사다. 다분히 공학적 혹은 계산적인 접근법이다. 이런 접근법이라면 길은 장소가 될 수 없다.
길은 많은 사람들이 스쳐 지나며 만들어 내는 수많은 장면들이 쌓이는 장소 그 자체이다. 길이 장소가 되기 위해서 사람들이 자유롭게 걸을 수 있어야 하고, 다양한 행위들이 발생해야 한다. 다양한 행위와 수많은 장면들은 사람들에게 길이라는 공간을 장소로 만들어 주는 기본 재료들이다.
장면이 이야기가 되기도 하고,
기억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이야기가 장면이 되기도 하고,
이야기를 기억하기도 했을 그런 것들 말이다.
그리고, 쌓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