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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숙 Jan 23. 2022

마리아 반지의 비밀

딸편 Vol.1


엄마에게는 오래된 경대가 있었는데, 경대를 열 때 들리는 경첩 소리가 좋아 나는 자주 여닫곤 했다. 수수한 엄마의 경대는 아담했다. 작은 나무 경대 안에 들어있는 보석함은 더 작았다. 보석함 안에 엉켜있는 목걸이, 귀걸이, 팔찌, 반지를 푸는 일이 방과 후 즐거움인 시절이 있었다. 한 열 살쯤 됐으려나.


누가 훔쳐갈 일도 없는데, 간밤에 사라진 건 없는지 확인하며 하나하나 호명을 하는 게 일종의 의례였다. ‘엄마 일할 때 하던 귀걸이, 결혼반지, 할머니한테 물려받은 목걸이, 여행 때 산 팔찌 그리고 마리아 반지.' 이상하게도 마리아 반지는 출신도 배경도 없는 그냥 마리아 반지였다.


마리아 반지는 보석함에서 제일 귀한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내 눈엔 제일 예쁜 물건이었다. 타원형의 금색판에는 마리아의 얼굴이 곱게 새겨져 있고, 그 주변은 하얗게 빛나는 보석들이 감쌌다. 여느 때처럼 마리아 반지를 매만지다 문득 처음으로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근데 이건 무슨 반지야?"

그냥 묻지 말걸. 정말 알고 싶냐고 묻는 아빠에게 나는 당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엄마가 너 낳고 울어서 달래 주려고 산거야.”

처음엔 귀를 의심했다가, 농담이라고 생각했다가, 결국 부정하기에 이르렀다. 날 낳고 운 엄마에 대한 서운함이었을까, 철없는 아빠에 대한 분노였을까? 뜨거운 것이 울컥 올라왔다.


나는 위로는 언니, 아래로는 남동생을 둔 둘째 딸이다. 그제야 그동안의 설움이 이해되는 것도 같았다. 매일 아빠가 입버릇처럼 달고 살던 우리 가족의 기대주 첫째 딸, 우리 집안 제사를 이을 귀한 아들. 내게 붙는 수식어가 없었던 이유는 없어도 될 존재였기 때문이었나. 그날 밤, ‘나는 누구인가’를 되뇌며 닭똥 같은 눈물로 이불을 적셨더랬다.


마리아 반지 사태 이후, 둘째 딸의 항거가 시작됐다.

엄마가 남들에게‘지연 엄마’ ‘지연아~’, 항상 언니의 이름으로 호명되는 게 싫어서

“지금부터는 ‘지소동 엄마’(삼 남매 이름의 앞 글자를 딴 것이다)해.”라고 하거나, 부모님에게 이유 없이 다른 형제들을 위한 양보나 이해를 요구받을 땐 그 이유를 따져 물었다.


아빠는 삼 남매가 다투는 게 싫어 먹는 것도, 노는 것도 뭐든지 세 개씩 사 오던 분이셨는데, 둘째 딸이 삐딱선을 타고난 이후로는 부단히 더 애를 쓰셨던 것 같다. 그렇게 나는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하고, 서운한 게 있으면 따져 묻는 ‘표현하고, 쟁취하는 데 익숙한 아이’로 자랐다.


둘째 딸이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응답하라 1988>의 ‘덕선이’를 떠올린다. 특히, 생일이 조금 빠른 언니와 항상 생일 파티를 같이하는 덕선이의 그간의 설움이 폭발하는 장면.

“왜 나만 계란 프라이 안 해줘? 내가 계란 프라이를 얼마나 좋아하는데”에서 덕선이도 울고 나도 울고, 이 땅의 둘째 딸들은 모두 눈물을 훔쳤을 것이다.

(덕선이 눈물의 생일 파티를 모르시는 분은,, CLICK ▶ https://youtu.be/Ncj4VMMph6s)


그 시절의 설움은 독립적이고 강한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형제들 사이에서 자연히 습득한 눈치는 사회생활 만렙에 기여하였고, 표현 잘하고 적극적인 태도는 원만한 대인관계에 큰 몫을 했다. 사실 언니는 K-장녀로서 대단한 부담감이 있었을 것이고, 남모를 고민도 많았을 테다. 남동생은 드센 누나에게 남성성을 짓밟히며 남몰래 주먹을 쥐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오히려 내 비위를 맞추느라 고생 많았을 형제들에게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다.


‘어머 외동인 줄 알았어요~’ ‘아 둘째라 혼자서 척척하는구나.’라는 말을 들어도 더 이상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감사히 얻은 장점은 잘 지키고, 지금의 나를 사랑하면 그만인 것이다. 그럼에도 아직 마음 깊은 곳에 울고 있는 어린아이를 품고 있는 둘째 딸이 이 글을 본다면 토닥여주고 싶다. 고생 많았다고, 스스로 꼭 안아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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