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을 기다리는 사춘기소녀
하우스의 막내 미리가 갑자기 학교에서 간질발작을 하여 119에 실려 서울대병원으로 후송되었다. 사춘기 때 발병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하는데 그런 경우라 한다. 나는 손님접대를 위해 1박 2일 평창일정을 준비하는 중이라 하늘샘이 병원으로 급히 달려갔고 꼬박 1박 2일 병 수발을 들었다. 뇌파검사, MRI 검사를 위해 금식을 하는 동안 끊임없이 먹을 것을 찾는 그녀를 위로하고 달래고 협박하며 그렇게 이틀을 보냈다. 나는 손님을 부지런히 목적지까지 배웅하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비는 부슬부슬 내리고 안개가 자욱한 길을 헤치며 도착하니 눈이 꽹하게 들어가 창백한 미리와 꼬질꼬질한 하늘샘을 보니 마음이 울적해진다.
MRI 검사 일정이 계속 늦어지면서 힘들어했지만 그래도 잘 버티어 준다. 잠시 하늘샘이 자리를 뜨면 마치 엄마를 잃어버린 아이처럼 손목과 팔목에 주렁주렁 달린 줄을 아랑곳하지 않고 병동을 질주하여 쫓아간다. 지루한 기다림 끝에 수면마취를 하고 쭉 늘어져 이동식 침대에 누워 검사실을 나서는 미리를 보니 갑자기 울컷하며 눈물이 솟아난다. 에구... 엄마, 아빠의 사랑과 걱정으로 살아가야 하는 사춘기 소녀가 세상 사람들을 의지하며 살아가야 하는 인생이라니.. 주책처럼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이틀 꼬박 그녀 곁에서 지켜준 하늘샘에게 서둘러 아이스커피를 건네주고 대기실에 앉아 하염없이 창밖을 보며 눈물을 찍어낸다.
검사 시작 전에 마취가 깨어 다시 마취를 한 덕분인지 깨어나지 않는다. 침대 가득 소변실수를 하고 누워 자고 있는 아이를 보니 또 한 번 울컥한다. 나도 많이 늙었나 보다.
일어나 나를 보자마자 ‘초코파이’를 찾는다. 이틀 내내 금식을 한 탓에 먹는 얘기만으로도 눈을 감았다 떴다 한다. 의식이 가물가물한 상태에서도 그 옛날 도토리하우스에 입소하면서 불안과 헛증을 달랬던 초코파이가 미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기에 ‘초코파이 많이 사놓았어. 의사 선생님 만나고 퇴원하면서 먹자!!’를 수시로 말해준다. 드디어 일어나 앉아 저녁 밥차가 지나가자 눈을 떼지 못하고 '식사합시다!!. 를 외치며 식탁탁자를 꺼내 올린다.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여운지 잠시 하늘샘과 마주 보며 한참 웃었다.
*밥차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식사합시다!!'를 외치며 앉아 의사 선생님을 기다리고 있다.
옷을 갈아입히고 가퇴원 수속을 밟는다.
짐을 챙겨 내려와 병원로비 의자에 앉아 초코파이와 주스를 건네준다. 숨도 안 쉬고 먹어치우는 모습이 걱정되어 중간중간 물과 주스를 건네고 나니 다시 가방을 뒤져 하늘샘이 먹던 빵을 뒤져 먹겠다고 한다. 빵을 조금씩 떼어주니 잘 받아먹는다. 차에 태워 돌아오는 길에 뒷좌석에 앉아 라면을 먹겠다고 한다. 집에 가서 맛있게 끓여주겠다고 다짐하며 양평으로 양평으로 안개 자욱한 두물머리 강가를 지나 쉼 없이 달린다.
집에 오자마자 급한 데로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부어 놓고 잠시도 기다리지 못하고 먹으려 달려든다. 다 먹고 나자마자 ‘밥!’을 찾는다. 마취 풀리고 갑자기 너무 많이 먹는 것 같아 오늘은 자고 내일 아침에 밥과 국수를 만들어 주겠다며 달랜다. 잠시 약을 가지러 간 사이 천사 같은 하늘샘이 미리의 샤워를 돕는다. 떡진 머리를 정성껏 씻기고 말려서 재운다. 하늘에 천사가 있다면 지상에는 이런 사람들이 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미리를 위해 밥을 짓고(최근 여자빌리저들의 폭식을 걱정하며 음식은 그때그때 소비하는 것으로 하여 집에 찬밥이 없었으므로..) 좋아하는 칼국수를 끓여 황도통조림을 후식으로 차려 내려간다. 황도 통조림은 내가 어렸을 때, 몸이 아프면 엄마가 챙겨주던 힐링음식이다. 그때는 왜 아플 때만 맛난 것을 챙겨주는지 속상해하며 억지로 먹었던 그 음식이다. 미리는 새벽에 일어나 돌아다녔지만 그래도 소리치거나 울지는 않았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과 칼국수를 보고 다시 방으로 들어간다. 안 먹는다고 한다. 여러 번 물어봐도 안 먹는다고 한다. 미리는 자신의 의사가 매우 명확하다. 강제로 시키면 소리소리 지르고 울기 시작한다. 할 수 없이 ‘배 고프고 먹고 싶으면 나와서 먹으렴..... 지금 아니라도 돼’하고 돌아서 나오는데 따라나서며 식탁에 차려진 음식 앞에 앉는다. 뜨거운 칼국수를 들어다 놨다 하며 조금씩 입에 가져간다. 밥도 얹어 만다. 그리고 조금씩 먹기 시작한다. 모든 도토리식구들이 쳐다보고 있는 모습에 웃음이 난다. ‘아이고 부담스러워 먹겠나??? ’ 나는 돌아서 나오는데 윤지언니가 나와서 자기도 달라고 한다. 막 아침밥을 챙겨 먹고 난 후인데도...
추적추적 여름을 재촉하는 빗소리를 들으며 다 식은 커피를 들고 마당에 나와 앉는다. 3일간 정신없던 시간은 어디서 무엇으로 남을까...
누군가를 돕는다는 것, 나 아닌 다른 사람의 삶에 깊이 개입한다는 것... 따지고 보면 우리는 타인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타인을 향한 삶만이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니 자신의 삶과 타인의 삶이 조화롭게 작동해야 건강할 수 있다는 것을 새삼 환기해 본다.
함께 걱정해 주고 선뜻 나서서 우리의 빈자리를 채워준 배움터 누리 선생님들, 그리고 염려해 주고 걱정해 준 캠프힐마을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있어서 정말 세상은 조금 더 좋아질까?
요즘 들어 도토리하우스에서 함께 살고 있는 빌리저들의 삶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더욱 비만이 심해지는 빌리저들을 보며 우리가 너무 허용적인가? 너무 절제하는 것에 대한 의식이 없는 걸까? 만일 가족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면 어땠을까... 등등..
지난주 초에 화장실에서 샤워하다가 간질발작을 하여 일순간 큰 일을 치를 뻔했던 영신이의 터진 입술을 보며 문득 위기의식을 느끼기도 했다. 가족들이 여러 가지 상황으로 돌보지 못하는 이들을 돌본다는 것에 어떤 수준의 책임감이 부여되는 걸까... 업무상 과실이라는 잣대를 우리에게 들이대면 합당하게 수긍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는 하늘이 우리를 도와 험한 일을 경험하지 않았지만 나이가 들어가는 나는 순간순간 어떻게 하는 것이 최선일까를 아직도 고민하고 있다. 이 일은 하면 할수록 전문가... 에서 멀어지는 일이라 여기저기서 고백하기도 한다. 그래서 도전하고 싶은 걸까? 아니면 더욱 겸손해져야 한다는 말일까..
15살 사춘기 미리가 평생 뇌전증 약까지 복용해야 한다는 사실이 마음 아픈 초여름.. 비 내리는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