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과 좀 싸울 수도 있지. 암만.
오늘 아침 결국 아이에게 화를 냈습니다. 어제 “엄마랑 이렇게 글 쓰니까 너무 좋다.”라고 말한 아이에게요. 저는 또 그렇게 아이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린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이는 졸업하는 형님들에게 송사를 쓰는 일을 맡았습니다. 글 쓰는 게 항상 어려운 아이가 송사 쓰는 것을 맡았다고 하면 칭찬을 해줘야 하거늘 으레 그렇듯 “글 쓰는 것도 힘들면서 왜 어려운 일을 맡았어.” 해버렸습니다. 아이는 “지난번 에세이 쓰는 걸 읽는 줄 알았어!”라고 항변했지만, 저는 그저 웃어넘겼습니다. 눈치 없는 신랑은 “에세이 발표인 줄 알았대.”하며 더 크게 웃었고요.
아이는 학교에서 말과 글을 가르치는 저에게 글쓰기를 물어볼 작정이었나 봅니다. 하지만 저조차 글 잘 쓰는 방법 따위는 모르니 가르쳐줄 것이 있을 턱이 있나요. 그저 하고 싶은 말, 해야 할 말을 물어보고 그것을 정리해 줄 밖에요. 곁가지로 새어나가는 아이의 말을 중심에 돌려놓는 일만 했을 뿐인데 벌써 12시 30분 아이를 재촉해 재우고선, 아이의 말을 종합해 대강 교사에게 보내놓았습니다. 마감이 코 앞이었기 때문입니다.
아침 8시 간단한 집안일을 마치고 아이를 깨웠습니다. 너무나 당연하게 아이는 비몽사몽이었죠. 일어나지 못하고 다시 잠자리로 파고드는 아이가 겨우 일어난 것은 8시 40분. 제가 마구 바빠질 시간이었죠. 막내 어린이집도 보내야 하고, 아이들 밥도 하고, 하루 스케줄도 정리해 주고, 옷도 봐주고. 정말 미친듯한 성수기 타임인 거죠.
겨우 눈곱 떼고 소파에 앉은 아이에게 “네가 한 말로 글 조금 정리해 봤어. 마무리해봐.” 하며 컴퓨터를 펼쳐놓고, 둘째와 막내의 쏟아지는 민원을 해결하기 위해 몸을 돌린 순간 아이가 저에게 화를 내었습니다. “내가 안 한 말만 잔뜩 써놨어!” 아이가 어제 써놓은 글에 겨우 2~3 문장만 첨언했을 뿐인데, 그것도 눈꺼풀 무거워지는 아이가 다 뱉은 말인데, 억울했습니다. 급한 대로 제가 채워놓은 문장은 모두 지웠습니다. “준후야. 엄마가 쓴 거 다 지웠어. 이제 네가 해봐.”
아이 목소리에 눈물이 잔뜩 묻었습니다. 저를 흘겨보는 눈빛에는 원망이 가득했죠. 눈치 없이 둘째는 내복이 없다며 중얼대기 시작합니다. 막내는 잠투정을 시작하려 합니다. 분홍색 유니콘 내복을 꺼내 둘째 아이에게 주었습니다. 저를 잔뜩 흘겨보며 “나는 이거 안 입어.” 하는데 이미 저는 감정 폭발. 빨랫감 틈으로 아이 내복을 던지기에 이르렀습니다. “입지 마.” 하고선 뒤돌아 섰습니다. 재빠르게 눈치를 챙긴 둘째랑 막내는 이미 사태를 직감하고 어미가 준 옷을 꿰입기 시작합니다. 질서 정연하게 화장실도 다녀오고, 차려준 밥을 냠냠 잘도 먹습니다. 서로 “이거 한번 먹어봐. 비벼 먹어봐” 하며 제 눈치를 보기 시작합니다.
“안준후 너 방으로 들어가.” 큰 아들 방으로 들어가서 내복이며 운동복이며 양말이며 챙겨다 안방에 갖다 주며 “옷 갈아입으면서 마음을 진정하고 나와.” 한 마디 했습니다. 하지만 옷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들락날락하며 중얼중얼 “엄마 내 긴팔 택견티셔츠 어딨어?”하는데 2차 폭발. 긴팔 택견복 따위는 우리 집에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죠. “우리 집에 긴팔 택견복이 어딨어! 얇은 티에 반팔 티 입어야지! 왜 갑자기 긴팔 택견복을 찾아!”라며 성을 내는 저에게 “긴팔을 입으면 따뜻하잖아!”라고 당연한 소리를 하는 아이에게 실소도 보내지 못할 만큼 분기탱천해 있었죠.
식탁에 앉은 아이에게 “엄마에게 왜 화를 내는 거야?” 기타 등등 해서 오만 말을 쏟아부어놓고도 속이 후련해질 리가 없죠. 말을 하는 와중에도 아이의 잘못이 아니라 나의 실수라는 것이 명명백백했거든요. 가만히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었어요. 나는 왜 열폭하는가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싶어요.
첫 번째. 시간 약속을 지키지 못한 스트레스가 있었어요. 막내 터전은 이미 30분 이상 지각인데, 둘째와 큰 아이의 생떼까지 다 받아주고 있자니 몸이 눌리는 느낌이 들 정도였어요. 아이의 송사도 교사에게 오늘 안에 보내기로 되어있고, 아이와 소통오류로 교사에게 리허설 일정을 변경해 달라는 죄송스러운 말씀도 드려야 했죠. 존중받아야 할 나의 사회적 자아, 어른스럽고 약속 잘 지키는 페르소나가 무너지게 생긴 거였죠.
두 번째. 내가 나의 본업을, 돌봄을 하찮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었어요. 심하게 정직하게 말하면 혐오하는 거죠. 이제는 흔히 쓰지 않는 듯 하지만 아이를 데리고 외출하는 엄마들을 맘충이라고 불렀잖아요. 아이를 핑계로 매끈하기 그지없는 (하지만 실제로 매끈한가요?) 사회적 약속을 이행하지 않는다고요. 그 혐오 말을 스스로에게 적용하고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요. 변변한 벌이도 없고, 긴 경력단절 학력단절로 전문가도 아니고(되기도… 음… 어려울 것 같고.)
나의 본업은 돌봄과 육아고, 내 아이들을 지독하게 사랑하고, 아이들과 집을 돌봐야 하는 양이 꽤나 방대해 늘 바쁘게 사는 나의 삶. 그 삶이 나는 항상 부끄러웠던 것 같아요. 갑자기 전업주부로 정체화될 때면 화가 나요. 다들 노는데 혼자 설거지를 할 때, 동동거리면서도 아이들 식사를 제일 먼저 신경 쓸 때, 자립이 중요하다면서도 아침마다 남편 커피를 내릴 때, 남편이 아이들 옷가지며 물건이 어딨는지 전혀 모를 때, 치워도 집은 지저분하고, 집안일은 해도 해도 끝나지 않을 때, 저는 화가 나요. 내가 전업주부라는 것이 너무 세상에 투명하게 드러나니까요.
내가 전업주부라는 것을 감추기 위해 하는 일도 많아요. 이렇게 글도 쓰고요.(파는 글도 아닌데, 의미가 없어 보이죠.) 자원봉사 활동도 하고요(돈 버는 일도 아닌데 뭘 그리 하냐고 하죠), 글쓰기 합평교실도 나가고요(언제 투고하고 언제 작가 되냐고 하고요), 지역 환경위원회도 참여하고요(쓰읍…), 학교에서 수업도 듣고 매거진도 같이 만들고요, (왜…?) 인문사회학 책모임(자기만족 아니야?)도 나가요. 학교나 책방에서 수업을 진행(이건 뭐.. 돈도 벌고 명예도 있고) 하기도 하고요. 어떻게 하면 전문가가 되고 돈을 벌 수 있을까 머리털 빠지게 궁리해요.(나의 직업, 육아와 돌봄을 폄하하면서요.)
나는 내가 투명한 전업주부일 때 나는 화가 나요. 맛조개에 소금 뿌린 것처럼 감정이 훅 튀어나오고 콱 물죠. 나를 전업주부 만든 것들에 대해. 대부분 아이들이에요. 남편이고요. 세상이고요. 나고요.
나는 내가 돌봄을 사랑했으면 좋겠어요. 나의 일상도요. 더 잘난 사람이 아니라도 나를 사랑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셋이나 되는 내 새끼들을 돌보고 키우기 위한 절대적인 시간이 필요해요. 그 시간이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내 부캐들을 진행하는 시간도 존중받고 행복했음 해요. 나는 나를 사랑하고 싶어요. 그래서 사회적인 고정관념들에 덤비고 싶어요. 그런 오만한 꿈을 꿔왔는데, 저는 저 스스로 조차 고정관념에서 해방시키지 못했네요.
카페에 앉아서 아들에 대해 글을 쓰고 있는데, (미리 약속한) 아들이 찾아왔어요. 지난밤 글을 같이 고치자고요. “내 의견은 그래. 그런데 내 생각에는 너무 노는 얘기만 많이 쓴 것 같아. 특히 배드민턴은 나는 재밌었지만, 5학년들이 좋아하는지는 확실하지 않잖아. 그래서 나는 이 부분을 지우고 싶어.” 아들은 다짜고짜 화부터 내는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 얼마나 많았을까요. 그런데, 아침부터 맥락 없이 화낸 엄마한테 찾아와 자신의 의견을 솔직하게 얘기하는 거 보니 사랑의 힘이 대단한가 봐요. 저 진짜 우리 아이 사랑하거든요. 쉴 새 없이 사랑한다고 말하거든요. 저, 저도 그렇게 키울 수 있을까요. 쉴 새 없이 사랑한다고 말하며. 사랑을 느끼며. 늘 돌아갈 수 있는 곳이 내가 될 수 있게 만들 수 있을까요. 나를 미워하지 않게 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