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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신 Sep 05. 2023

고양이와 그녀는 말한다

feat. 숲, 최유리



여자는 말한다


 혹시 처음 봤을 때를 기억해? 바들바들 떠는 너의 몸이 얼마나 작던지. 털도 제대로 나지 않은 채 삐- 삐- 작은 새처럼 아무 저항도 없이 울던 너를 다치게 할까 봐 두 손을 모아 조심히 그러안았어. 그리고 곧 네 심장 소리가 들렸지. 쿵쿵 쿵쿵. 얼마나 세차게 뛰는지 내 손가락에까지 진동이 울렸어. 쿵쿵 쿵쿵. 아마 그때일 거야. 눈곱이 가득 낀 눈을 간신히 뜬 네가 나를 보고는 손바닥에 몸을 더 파고들었지. 어쩔 수 없겠다고 생각했어. 너와 난 함께겠구나. 좋아하는 사람을 보면 얼굴을 붉히는 것처럼 이런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겠구나.

 그리고 네 이름을 생각했어. 널 닮은 이름을.



고양이는 말한다


 모리. 너는 내게 모리야. 인간의 말은 복잡해서 잘 알아들을 수 없지만 저 낱말을 말할 때면 너는 내 얼굴을 보고 또렷하게 발음하잖아. 모리야- 모리? 모리! 네가 저 알 수 없는 단어를 발음할 때면 잔뜩 귀를 세우지. 또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까. 인간의 얼굴이란 얼마나 많은 감정과 표현을 가지고 있는지, 그에 비해 거울에 비친 나의 얼굴은 얼마나 그대로인지 너무 우스워서 가끔 겹쳐 보기도 해.

 하지만 네가 입을 동그랗게 모아 '모'라고 발음하고 '리-'하고 인간의 웃는 얼굴이 되면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 꼬리를 살랑이며 나는 너에게 다가가지. 그러면 넌 보드라운 내 털을, 콧잔등을 쓸어내려. 누구의 허락도 요구도 필요 없는 우리의 온화한, 그 시간이 난 좋아. 모리라고 너는 말하고 나는 다가가고. 나는 기지개를 켜고 너는 웃지.

 모리. 나의 인간 모리.

 그런데 이젠 한없이 졸려. 오로지 내가 원하는 것은 잠과 잠, 또 잠이야. 종일 비가 오는 날처럼 몸이 한없이 늘어지면 난 몸을 둥글게 말아. 그리고 내 몸은 이내 깊은 바다처럼 고요해지지. 혹은 물을 잔뜩 머금은 진흙과 나무 그림자가 가득한 짙은 숲처럼 오래오래 침잠해.



여자는 말한다


 십오 년 전 그날, 넌 모리가 되었어. 숲이라는 뜻이야. 네 초록의 눈동자를 보고 쉽게 지어버린 이름이지만 이보다 너에게 어울리는 이름이 있을까.

 모리야. 네게 숲을 보여주면 좋겠어.

 창 너머 보이는 저곳. 저 한가운데서 보는 조각의 하늘과 순간으로 불어오는 바람, 새벽의 풀냄새, 잎과 바람이 만들어내는 소리, 사이의 숨, 저마다 다른 푸른색과 형태. 네가 네 이름 속을 거니는 상상을 해. 그리고 뒤돌아 나를 바라보는 상상. 거기의 넌 아직 어리고 높은 곳을 잘 오르지. 초록 숲의 초록 눈동자가 반짝이고. 역시 이보다 잘 어울리는 이름이 있을까.


 있지. 숲에는 개똥지바귀라는 새가 있어. 그 울음소리가 꼭 네 목소리 같아서 숲을 걸을 때마다 멈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야. 네가 날 따라왔을까. 여기서 날 기다렸던가. 그 소리가 들리는 하늘과 나뭇가지 사이에 한참이나 귀 기울이다 보면 다시 한번 울음이 들려. 그리고 난 깨닫지. 네가 아니구나. 넌 잠에 들었을 텐데, 하고.

 요즘 들어 부쩍 잠이 는 너를 보면 새가 되어 날아가 버리진 않을까, 두려운 생각이 들어. 살이 빠지고 털이 성긴 네가 다시 처음 봤을 때처럼 어린 새로 돌아가는 건 아닐까. 쿵쿵 쿵쿵, 그렇게 가만히 네 가슴에 손가락을 대고 박동으로 살짝씩 움직이는 내 손에 안심해. 그리고 네가 기지개를 켜기를, 이내 나를 부르기를 기다리지. 넌 잠에 들었을 뿐이니까.



고양이는 말한다


 네가 어떤 말을 하는 걸까 궁금한 적이 있어. 일정하게 오르내리는 내 등을 날을 세울 수도 없는 손톱으로 간질이며 너는 무엇을 그렇게 이야기할까. 내가 없는 장소와 시간에 대한 것들일까. 우리가 지나온 시간에 대한 것들일까. 어쩌면 다가올 시간일까. 나직하고 일정한 리듬으로, 다정한 숨을 가득 담고 너는 말하고 나는 들어. 나는 다만 들어.

 그런데 요즘은 모리야, 하고 울거나 화를 내는 일이 많아졌어. 내가 소변 실수를 하고 밥을 먹지 않아서일 거야. 아마 그렇겠지. 하지만 알잖아. 나 원래 깔끔한 성격이라는 걸. 아마 이러는 것도 금방 그만둘 거야. 그러니 날 밀어내지 마. 날 네게 둬, 지금처럼.


 아니면 잠이 내 눈가에 종일 머무르거나 나의 숨이 가빠져서일까. 웅크리고 자다가 눈을 뜨면 네가 옆에 누워 있어. 얼굴을 마주 본 채로 우린 서로의 달싹이는 몸을 보지. 너는 내 유리 같은 눈을 하염없이 보고 난 너의 팔등을 핥아. 괜찮아. 괜찮아. 내가 몸을 말아 등을 내어주기도 해. 기대도 돼. 난 그렇게 말하는 거였어. 너도 알겠지만.



여자는 말한다


 나른한 잠, 뒷머리에서 꼬리까지 이어지는 곡선, 곧게 뻗은 흰 수염, 모리하고 부를 때마다 쫑긋 목소리를 향하던 귀, 네가 누워 있던 자리의 온기, 잼통 속의 털, 내 몸에 닿던 진동, 유리구슬처럼 투명한 눈, 부푼 빵을 닮은 발과 까슬한 혀, 네가 잡은 무당벌레, 느리고 우아한 걸음, 그리고 다시 긴 잠.

 나의 고양이, 모리.

 나와 다른 너의 그 모든 것.


 가끔 난 생각했어. 너와 난 마치 숲의 나무와 바다의 파도처럼 다르다고 말이야. 나는 낮을 살고 너는 밤을 살아. 나는 자주 잠을 뒤척이지만 너는 오랫동안 깊게 잠이 들고. 하지만 바다를 건너는 바람이 숲에 닿고, 숲에서 흘러간 물이 바다에 닿듯 우린 연결되어 있어. 왜인지는 몰라. 그냥 그래. 우린 다르지만 이렇게 만났고 시간을 공유해. 누구도 알지 못할 시간들, 마음들, 바람들, 웃음들을 안고 있어. 이건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 사라지지 않아. 정말이야. 정말 그럴 거야. 어떤 일이 있어도.

 모리. 나의 고양이, 모리야. 그런 건 사라지지 않아.



고양이는 말한다


 만약에 말이야. 내가 긴 잠에 들게 되어도 걱정하지 마. 난 졸릴 뿐이야. 너도 알잖아. 나만큼 잠을 사랑하는 생명체도 없어. 그리고 네가 돌아왔을 때 내가 문 앞에 없대도 놀라지 마. 몸을 움직이는 게 점점 힘들어져. 잠만이 달콤하지. 어쩌면 난 늘 좋아하던 네 옷장에 들어가 긴 잠에 들어있을지도 몰라. 온통 네 냄새가 진동하는 공간에서 빠져든 잠은 따듯할 거야. 너를 만난 것처럼 기적 같은 잠일 거야.

 하지만 기억해 줘. 푸르스름한 빛이 조금씩 환하게 비치고 습관처럼 네가 나를 안는 새벽, 시원한 풀향이 나는 네 손가락에 얼굴을 비비는 새벽, 네 뺨에 내 뺨을 살며시 가져다 대는 새벽. 나는 너를 온통 그런 새벽처럼 가르릉해.

모리. 나의 인간, 모리야.

 그러니까 다 괜찮아.



여자는 생각한다


 모리, 어제는 네가 꿈에 나왔더라. 그런데 신기했어. 보통 때면 꿈인 걸 알아채고 널 끌어안고 울다가 깨고 마는데, 어제는 웬일인지 우리의 모습이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예전처럼 같이 모로 눕거나 눈이 내리는 창 밖을 보는 거야. 나는 뻔한 잔소리를 하고 넌 귀를 벅벅 긁으며 심드렁하게 창문을 보지. 정말 그때처럼, 우리가 우리이던 그때처럼 말이야. 그리고 침대에 누워 머리맡의 네 곤한 숨소리에 나는 안심을 해. 우리는 여전히 우리구나. 처음으로 네 꿈을 꾸고 마음이 편안했어. 이런 날이 올까 했는데 삼 년이 채 걸리지 않았네. 있지, 난 이제는 가끔 잘 웃기도 하고 네 생각을 하지 않기도 해. 바닥에 가라앉을 줄만 알았는데 이렇게 나를 살고 있어. 내가 항상 이래. 넌 이런 나를 원망할까.


 모리야.

 단 한 번만이라도 널 안을 수 있다면 좋겠어. 사람들이 소원을 빌듯 나는 너를 빌어. 너의 체온과 보드라움과 숨을 빌어.

 모리야, 나의 모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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