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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신 Aug 11. 2023

오래된 우리는 그곳에 남아

feat. 부산에 가면, 최백호



부산 어느 결혼식장 복도 / 계절 상관없는 오후



 천장에는 거대한 환풍기 날개가 돌고 그 아래 두 사람이 서 있다. 분주하게 축하하는 사람 너머 정지한 듯 가만히 선 두 남녀. 여자는 입술을 살짝 깨물다 겸연쩍게 웃고는 고개를 숙이고, 남자는 순간 그런 여자의 목덜미를 바라본다. 짧은 단발 아래 솜털이 가지런하다. 후- 하고 불면 들풀처럼 날릴 듯, 한때 겹치듯 자신의 얼굴을 묻던 가는 목 등. 문득 여자가 고개를 들고 입을 열고 또 그냥 닫는다. 남자는 웃고 만다.     



남자    여전하네요.

여자    ... 못 알아볼 뻔했어요.

남자    못생겨져서요?

여자    (당황하며)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둘은 가볍게 웃는다. 여자의 얼굴에서 긴장이 조금 풀린다.


여자    잘, 지내죠?

남자    그렇죠, 뭐. (여자의 얼굴을 바라보며) 가족들도 다 잘 계시죠?

여자    네, 덕분에요. 그나저나 여기서 보게 될 줄 몰랐어요.

남자    ... 비도 오고 바쁠 텐데 온다고 고생했어요. (주위를 돌아보며) 가족들은?

여자    아, 볼일이 있어서 혼자 들렀어요. 저도 가려던 참이에요.

(침묵)

여자    오늘 올라가죠?

남자    그렇죠, 일도 있고.

(다시 침묵)


 남자는 당신이 올 줄 알았다고 말하지 않았고 여자는 이렇게 우연으로라도 만나길 오래 바랐다고 말하지 않았다. 어떤 말도 어떤 몸짓도 어려웠다. 각자에게는 가족과 생활이 있었고 그들은 지금 이대로에 만족했다. 과거는 너무 멀었다. 그들이 공유한 시간은 이미 뒤섞이고 조각나 흰모래밭 너머 바다에 침전한 유물이 되어 있었다.

 만약 시간이라는 게 흐르지 않고 그 자리에 머문다면 과거의 그들은 여전히 그곳에서 손을 잡고 먼 길을 걷겠지만 현재의 그들에게 다음이란 없고 다음이 없는 관계는 겨울 바다처럼 차고 새벽 첫차처럼 외로울 것이다. 그들의 눈이 마주치는 동안 몇 개의 단어와 순간들이 물결처럼 반짝였지만 이내 그 사이로 긴 공백의 시간이 내려앉았다. 뭐라 말할 수 없는 감정이 접착제처럼 달라붙어 남자와 여자는 아직도 그 자리에 어쩔 줄도 모르고 멈춘 듯 서 있다. 눈을 보다가 피하다가 남자의 희게 센 몇 가닥의 머리를 보다가 아마도 흴 자신의 머리칼을 쓸어내리다가 여자는 하마터면 눈을 붉힐 뻔했다. 사랑보다 지난 시간에 대한 늦은 애도였다.


남자    여기도 참 많이 변했어요.

여자    길도 사람도 다 변하죠. 우리도 그렇고.

남자    인혜 씨는 그대로인데요? 나만 늙었죠, 못생겨지고.

여자    (삐죽 흘겨보며) 그러지 마요, 정말.

남자    (웃음) 그래도 바다는 아직 바다겠죠.


 턱에 살집이 조금 붙고 가는 주름이 있어도 남자도 아직 그대로라고 여자는 생각했지만 그걸로 그쳤다. 한 하객이 그들 사이로 지나가고 침묵이 이어졌다. 꽃가루가 그들에게까지 날아왔다.


여자    그만 갈게요.

남자    아래까지 바래다줄게요.

여자    괜찮아요. 조심히 가요. 건강하고. 아프지 말고.

남자    그럴게요. 건강할게요, 아프지 않고.

(침묵)


 남자는 악수를 해야 할까 생각했다. 안는 건 안 되겠지. 남자가 손을 내밀고 여자는 무심결에 손을 잡고 걸어가듯 옆에서 잡았다. 잡은 손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두 손은 조금 더 살랑이다 남자는 한 번 꾹 힘을 주고 힘을 뺐다.


 그들의 어깨가 점점 멀어지고 여자는 놓아진 손을 다른 손으로 쥐었다. 여자가 자신도 모를 무언가를 후회할 때 남자는 땀이 살짝 밴 손을 마른 얼굴에 대었다. 아마 그들은 다시는 만나지 않을 것이다. 발화되지 않은 무언無言과 공기만 제 자리에 남아 요동을 견뎠다. 그들이 다시 각자의 생활로 돌아가면 남은 것들만이 그들의 이야기를 이어갈 것이다. 보이지 않고 말할 수 없는 것들만이 소곤대고 한때의 열병을 끌어안을 것이다. 오래된 바다에 오래된 그들만이 그곳에서 여전히 손을 잡고 서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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