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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신 Jul 20. 2023

빗금 같은 새벽

feat. 그건 아마 우리의 잘못은 아닐 거야


  보고 싶다.

술 취한 남자의 목소리는 끊길 듯 불안하다가도 이내 잠잠히 고른 숨으로 번진다. 더운 그의 숨에서는 술 냄새가 나지만 여자는 알 수 없다. 여름인지 겨울인지의 새벽, 낮은 웃음과 그냥 의미 없이 던지는 말들이 전류로 바뀌는 사이 누군가는 수화기를 손으로 꼭 쥐었다. 여자는 작은 도시 끝 낮은 빌라에 남자는 서울 한가운데 어느 술집에 눕거나 선 채로 각자의 시간을 보내며 떨어진 거리를 숫자로 환산했다. 기차표와 걸리는 시간을 가늠하다 아직 잠들었을 기차의 긴 몸체를 생각했다. 고요한 철근의 나신은 차가울 것이었다.



  나도.

여자는 오래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대답이 필요 없는 혼잣말에 가까운 말이었지만 여자는 남자도 알길 바랐다. 얼굴을 자주 보지 못할수록 조금이라도 속을 내보여야 한다고, 삐지고 싸우는 건 아마도 가까운 연인들의 사치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다시 둘은 가만히 서로의 숨소리를 들었다. 일정한 간격의 숨이 편안했다. 이대로 괜찮을까 하는 성기고 불안한 마음이 들 때마다 상대의 숨이 자신을 위로하곤 했다. 그곳이든 이곳이든 우린 잘 살고 있어. 입술 사이로 퍼질 보이지 않는 숨이 괜찮아, 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어떤 말은 입 밖으로 나오며 몸이 점점 커진다. 언어를 공기삼아 조금씩 부풀다 펑, 더 이상 지니기 힘든 감정이 되어 전신을 휘두른다. 그래서 그들은 자주 보고 싶다는 말을 삼켰다. 다시 시작할 아침에 그는 어제 남은 작업을, 그녀는 올해는 꼭 붙어야 할 시험 준비를 해야 했다. 잘 알지는 못하지만, 더 나아질지 확신조차 할 수 없지만 각자의 자리에서 생이 준비한 시간을 살아내야 했다. 얼마 뒤 사라질지 모를 감정 따위 조금 뒤로 미루는 게 현명했다. 아마 현명할 것이었다. 그들이 지닌 불안과 미숙함은 누군가의 잘못도 지불해야 할 비용도 아니었지만 감당해야 할 순전한 자신의 몫이었다. 이번에는 침묵이 오래갔다. 이만하면 끊을 때도 되었나 생각할 즈음 보고 싶다, 누군가 한 번 더 그 말을 꺼냈다. 남자는 이만 전화를 끊자고 했다. 응, 응. 그럴까. 잘 들어가. 그리움은 익숙한 습관이었다.



  몇 번인가 전화가 울렸다. 여자는 눈자위를 꾹 누르고 커튼 사이로 빛이 들지 않는 아직 짙푸른 새벽을 잠시 바라보았다. 여보세요. 잠긴 그녀의 목소리 뒤 일이 초의 공백이 지나고 남자는 말했다. 나 일층이야. 여자는 헝클어진 머리와 잠옷 그대로 운동화를 구겨 신고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남자는 점점이 센스등이 켜지고 꺼지는 것을 바라봤다. 5층, 4층, 3층, 그리고 1층. 여자의 숨이 가빴다. 어떻게 왔어. 택시 타고. 남자의 한 달 생활비가 서로의 얼굴이 마주 보는데 쓰였다. 그것도 아주 잠시 잠깐을 위해. 여자는 어떤 말도 하지 않고 남자를 안았다. 보고 싶었어. 살짝 땀이 밴 셔츠에 얼굴을 파묻었다. 나도. 그에게서 술 냄새가 난다고 그녀는 옅게 웃었다. 지금은 허다한 뻔한 날에 그인 빗금 같은 순간이라고, 이런 순간이 모이면 장마가 되겠다고도 웃었다.

  그들은 오래 안고서 여자가 사는 빌라 주위를 빙빙 돌았다. 가다가 멈춰 서서 남자는 여자의 운동화를 고쳐 신겼다. 그리고 다시 몇 개의 동심원을 그리듯 빙글빙글 돌았다. 그녀의 집 주위를 감싼 그의 걸음이, 열몇 개의 원이 그녀를 가까이에서 지켜주기를 그는 기도했다. 그리고 기도가 길을 잃어버리지 않기를 다시 기도했다.

  곧 환해질 시간을 위해 남자는 다시 택시를 탔다. 이번에는 택시를 타고 기차역으로 갈 거라고 했다. 조용히 푸름이 연해졌다.



  아직 새벽, 조금은 윤곽이 뚜렷해진 새벽, 그는 떠나고 그녀는 남았다. 모든 게 저의 자리로 돌아갔다. 다시 남자는 여전히 남자를 여자는 역시 여전히 여자를 버티고 살아갈 것이지만 그들에게는 빗금 같은 새벽이 있었다. 뛰쳐 돌아볼 얼굴이 있었다. 겹쳐진 틈과 온기는 한동안 그들을 오래 위로할 것이다. 그들을 가벼이 할 것이다.

  그들에겐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음악을 듣고 떠오른 이야기들을 가끔 적기로 혼자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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