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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신 Oct 21. 2023

환끼엠 투 헌드레드

feat. You might be sleeping , Jakob Ogaw


 티셔츠가 땀으로 흥건하다. 살갗과 면은 조금의 공백도 없이 달라붙어 여자 몸의 형태를 그대로 드러낸다. 길에는 간혹 떠돌이 개들이 고단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드러누워 있을 뿐 아무도 없다. 오직 사십 도에 가까운 빛과 온도만이 그녀를 졸졸 쫓아다닌다. 어디가. 나도 같이 가. 그러나 여자도 딱히 어딜 가려고 길을 나선 건 아니었다.


 근처에는 건물이라고 부를만한 건조물도 하다못해 가건물도 없이 잎이 많은 나무들만 저 멀리 있다. 돋보기에 빛을 쏘이는 작은 개미처럼 그녀만이 한 데서 움직인다. 오른쪽 왼쪽, 사선으로, 어디 갈 데도 없이 그저 빛의 선택을 피한다. 여자는 손차양을 만들어 해의 위치를 확인하고는 곧 저물 시간이 멀지 않았음을 안다. 저문다 해도 습하고 뜨거운 온도는 쉬이 가라앉지 않을 테지만 빛만 없어도 숨쉬기에는 좀 더 편할지 모르겠다고 여자는 생각했다.     


 그것도 병이야라고 누군가는 얘기했다. 그렇게 걷는 것이, 걷고 걷고 걷는 것이 병이라고. 네 안에 쌓여진 분노와 화가 그런 식으로 터져 나오는 거라고.

 여자는 말했다.

 그래서 걷는다고. 분노와 화에 숨 막혀 질식하기 전에 이렇게 터트리는 거라고.      


 이주 전 그녀는 서른이 된 김에 일하던 곳을 그만두었다. 김에,라고 말하는 건 우습지만 여자는 정말 서른이 된 김에 일을 그만두었다. 부부가 운영하는 동네의 작은 영어 학원이었다. 지원 씨가 아직 잘 몰라서 그러는데, 이게 다 지원 씨 좋으라고. 여자 사장의 말들을 겨우 참아내던 밤, 대충 넘기던 남자 사장의 문자가 여름비처럼 연속적으로 오던 어느 밤, 그러다 결국 지원아, 하는 문자에 소름 끼치던 밤, 여자의 인내를 지탱하던 실이 끊어졌다. 그만둬야 할 것 같아요. 여자 사장은 갑자기 그만두는 이유를 따졌다. 여자는 자신의 생일을 맞아 여행이 가고 싶다고 말했다. 눈알까지 벌게지며 화를 내는 여자 사장에게 미리 학원 프린트로 뽑아 놓은 종이를 내밀었다. What’s your favorite color? 색색의 컬러 프린트 뒷면에 지원아, 로 시작하는 다정한 고백이 인쇄된 이면지였다.


 누군가 베트남에 가면 커피와 국수가 그렇게 맛있다고 했다. 여자는 직항 티켓을 끊었다. 가본 적 없는 곳이었지만 사람 사는 데가 다 비슷하지 싶었다. 어차피 국수를 먹고 커피를 마시고 걷기만 할 테니 세면도구, 티셔츠 세장, 바지와 속옷도 세장, 가벼운 슬링백, 밤에 읽을 책 한 권만 챙겼다. 일주일치 여행 준비물이었다. 비수기인지 숙소를 구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사십 도를 웃도는 온도에 여행 간 사람들이 픽픽 쓰러진다는 말이 인터넷에서 돌았다. 뜨거운 온도에 쓰러지는 느낌은 어떨까 궁금했지만 자신이 쓰러질 것 같지는 않았다. 팔월 한여름에 태어난 그녀는 한없이 여름에 강했다.


 그러나 ‘강하다’의 배경이 한국의 여름이라는 것을 그녀는 간과했다. 데일 듯한 온도와 어항 속 같은 습도는 그녀가 여태 겪어보지 못한 것으로 뜨거운 길에 땀이 떨어지고 한길에는 아지랑이마저 일었다. 여기는 어디일까. 왜 나는 이곳을 걷고 있을까. 머리까지 얼얼한 아이스커피가 급했지만 정신없이 걸어온 탓에 그녀는 자신이 있는 곳의 위치를 몰랐다. 어제 마신 호안끼엠 호수 근처 커피가 맛있던데. 다행히 해는 살짝 저물어 시야가 편했다. 손차양을 만들지 않아도  먼 골목에 오토바이를 탄 남자가 있다는 것이 보였다. 여자는 빨리 걸었다. 있는 힘을 다해 정말 뭔가를 터트리기라도 할 듯이 아주 빨리.     


하이.

하이.

호안끼엠.

환끼엠? 투헌드레드.

오케이. 환끼엠. 투헌드레드.     


 몇 마디 없이 여자는 오토바이 뒤에 탔다. 한국 같으면 말도 안 될 일이라고, 사는 데가 다 비슷한 건 아닌 모양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저 앉았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바삭 마른 빨랫감 같은 시트였다.

 그녀는 어정쩡한 손을 풀어 남자의 허리를 안았다. 이내 젖은 몸에 바람이 닿고 상기된 뺨은 느슨하게 풀렸다. 시원하다. 그녀는 다른 것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시원함에 그저 몸을 내밀었다. 잡은 손을 양 옆으로 뻗고 싶은 충동을 챙기고 혼자 웃었다. 뭘 그렇게 아등바등 걸었을까. 이렇게 좋은 걸. 아, 이러려고 걸었나.

 바람에서 달콤한 와플 냄새가 났다.


 점점이 빛나는 건물의 조명이 가까워지고 여자는 새삼 도시와 사람들 사이에서 자유를 느꼈다. 내일이면 서른이었고 뭘 하든 괜찮을 것 같았다. 걷다 더우면 오토바이를 타면 된다고, 그러고 나서 근처 카페에서 머리가 깨지도록 시원한 커피를 마시면 되는 거라고 생각했다. 에그커피를 마실까 코코넛 커피를 마실까. 그리고 집에서 샤워를 하고 잠깐 책을 읽는 건 어떨까. 저녁은 아무래도 어제 먹던 길가의 쌀국수가 좋겠지.

 뭐 아무래도 좋은 그런 것들을 오토바이 위에서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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