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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신 May 28. 2024

우리는 불쌍하지 않아요



열두 살 아이의 말버릇은 불쌍해였다

아이 불쌍해라 불쌍해서 어떡해

방긋 웃으며 너도 불쌍하구나, 인사했다


불쌍한 엄마와 불쌍한 가난과 불쌍한 교과서와 불쌍한 뉴스와 불쌍한 웃음과 불쌍한 운동장이 지천에서 데굴 구르고


살아있는 모든 것들과

죽어버린 모든 것들에게

다정한 위로를 건네듯

우리는 모두 불쌍하여라


저기, 혹시 등이 굽은 불쌍함은 어디에서 구원받을 수 있나요

잠이 오지 않는 밤 아이는 가끔 손을 모았는데


어느 날 아이의 동생이 울었다

나는 불쌍하지 않아

아이는 놀라 말을 따라 했다

나는 불쌍하지 않아

둘은 함께 손을 잡고 마른 강바닥을 달렸다


축축한 몸으로 남의 집으로 돌아온 둘은 지우개를 들고 서로의 몸을 지웠다

ㅂ ㅜ ㄹ ㅆ  ㅏ ㅇ ㅎ ㅐ

몸애 새겨진 글자를 하나씩 정성 들여 지우고 

밀고 남은 지우개와 지우개 똥은 앞마당에 묻었다


주전자에 끓인 물을 섞어 머리를 감았다


동생과 번갈아 씹던 껌을 씹었다


마지막 유치가 아이의 입에서 빠졌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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