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드럽게, 부드러운, 부드럽지만, 부드러워서, 부드럽고도, 부드러우면서, 부드러워야, 부드러워야지, 부드러움을 가지고, 부드럽다 하더라도, 부드러워지도록.
'부드러운'으로 생각이 찰랑일 무렵 ‘부드럽지 않아도 괜찮아요. 할 수 있는 만큼 오늘의 나를 인정하세요.‘라는 말이 다가왔다. 어떤 말은 다가온다. 사람처럼 성큼성큼 걸어와 눈을 마주친다. 눈이 마주친 이상 달아날 수는 없다. 그 아이가 나를 알듯 나도 그 아이를 안다. 어떤 냄새나 사물, 동물, 심지어 어떤 일까지도.
한 번에 알게 된다는 말은 그런 뜻이다.
몸 상태가 좋지 않아 며칠을 쉬었더니 한 달은 요가를 하지 않은 것 같다. 그 사이 몸이 잊어버린 건 아닌지 불안하다. 완전히 회복되지는 않았지만 오늘의 나만큼만 하자는 마음으로 요가원을 찾았다. 그런데 평소에 '부드러운'이라는 말을 자주 쓰시던 선생님이 오늘은 '부드럽지 않아도'라는 말을 한다. 오늘 이곳에 온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그것만으로도 멋진 수련을 한 거예요. 요가원을 향하던 나의 마음과 다르지 않다. 매트 위에서 충분히 숨을 쉬고 오자, 안되면 안 되는 대로 되면 되는 대로.
「시간과 공간을 낳는 것이 몸이라면, 그것들의 한계를 아는 것도 몸이에요」 어제 일기장에 옮긴 이성복 시인의 시론의 한 부분이다. 나는 이 몸으로 시간과 공간을 사는 동시에 뻗어나갈 수 있는 한계를 알고 있다.
비둘기 변형 자세를 하고 있을 때였다. 선생님이 다가와 오른쪽 어깨를 고정시킨 채, 왼쪽 가슴을 더 내밀며 발을 잡고 있는 팔꿈치를 위로 향하게 하라고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계속 내 몸을 밀고 당기며 ‘움직이지 않아도, 안에서 계속 움직이려는 힘을 만들어보라’고 말했다. 나는 의문이 들었다. 겉으로 멈춰 있는데, 안에서의 노력만으로 정말 무언가가 변할 수 있을까. 보이지 않는 애씀이 언젠가 빛을 발할 수 있을까. 사람도 몸도 변한다는 말을 믿고 싶다. 하지만 지금의 나에게 그 자세는, 돌이 물처럼 흐르는 것만큼이나 멀다. 수련이 끝난 뒤 바로 옆에서 그 자세를 유지하던 분에게 혹시 처음부터 그 자세가 편했던지를 물었다. 그분은 아니라고, 몇 달 전만 해도 자세가 불가능했었다는 말을 했다. 에이, 설마요. 아니에요, 정말 하다 보니까 변했어요.
한계를 아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한계를 정하지 않고서 천천히 몰입의 시간을 갖고 나아가는 일 역시 중요하다. 거기에 들이는 시간만큼, 공간만큼 나의 자리는 조금씩 확장될 것이다.
오늘 나는 오늘만큼 부드러울 것이다. 그리고 조금 더 단단하고, 깊고, 가벼울 것이다. '부드러운'이 내가 바라는 몸의 유일한 형용사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