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담요 Aug 02. 2018

남겨진 것들의 반항

문태준 - 수런거리는 뒤란



  명절 때면 항상 아빠 손을 잡고 할머니 댁에 가곤했었다. 비록 흔히 이야기하는 '도시'의 상대적 개념으로서의 '시골'과는 다른 느낌이었지만 나에게는 그 곳이 '시골' 이라는 단어가 주는 정겨움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할머니 댁은 가끔 가는 곳이었기에 낯설기도 했지만, 또 이따금씩 방문하는 곳이었기에 익숙함을 주기도 하는 신비로운 공간이었다. 우리의 방문은 늘 예정된 것이었으므로 평소 할머니의 삶을 알기에는 어려움이 있을 테지만 그녀의 집에서는 늘 된장찌개의 구수한 향이 풍겨났다. 나에게는 그것이 곧 할머니의 냄새였고 할머니의 삶이었다.


  문태준의 시집 <수런거리는 뒤란>을 읽고 나는 오랜만에 시골집 문을 다시 여는 기분이었다. 가뜩이나 낡고 녹이슨 문인데다가 오랫동안 열지 않아 삐걱거리긴 했지만, 신비로운 공간답게 변함없이 마음 한 구석에서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구수한 된장찌개와 함께 따끈한 밥 냄새가 코끝을 찌르는 듯했다. 금방이라도 할머니가 털고무신을 신고 달려 나와 나를 안아줄 것 같은 따뜻함이 시마다 뚝뚝 묻어났다. 그러나 그 곳에는 결코 평화로움만 존재하지 않는다. 무섭도록 그리움을 상기시키는 것은 곧 지금은 그 따뜻함이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반증하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의 시집에서 내가 무엇보다도 주목했던 것은 강한 이미지성이었다. 시각적인 이미지는 물론이고 시인이 그리는 공간에서 들려오는 소리, 냄새, 온도, 분위기 등 모든 장면들이 나의 기억과 결부되며 살아 움직이는 느낌을 받았다. 아마 내가 시를 읽고 단번에 할머니 댁을 떠올린 것도 그의 시가 가지고 있는 생생한 이미지 탓이 컸던 것 같다. 그의 시집에서 단연 눈에 띄었던 시어는 '나무'였다. 나무는 어디에나 존재하는 것임에도 우리의 기억에 남을 만한 나무는 많지 않다. 만일 기억에 남는 특정한 나무가 있다면, 그 나무가 뿌리 내리고 있는 장소를 함께 기억하게 될 것이다. 이 때문에 나무는 우리에게 '언제나 그 곳 에 있을 것이다.'라는 안정감과 믿음을 준다. 마치 나에게 할머니 댁이 그러했던 것처럼 낯설지만 익숙한 존재로 언제 찾아와도 같은 모습으로 나를 반겨줄 것 같기 때문이다. 문태준의 나무들도 그러했던 것 같다. 그의 시집에 등장하는 호두나무, 감나무, 개암나무 따위의 나무들은 오가는 바람과 새를 함께 맞으며 오랜 시간 뿌리를 내려왔다. 마치 그가 바람처럼 오가는 동안에도 늘 한 자리를 지켰을 어머니와 아버지처럼 말이다. 그러나 언제 돌아가도 포근한 품의 온도도 세월을 피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나무와 함께 부모는 그 곳에서 점점 단단해졌고 동시에 메말라갔다. 그리고 모두가 그렇듯 피할 수 없는 세월의 흐름에 직면한다.

  문태준 시인의 시에는 따뜻함만큼이나 '병'이나 '죽음'의 이미지도 강하게 풍겨 나온다. '무덤' 이나 '喪(상)'과 같은 시어도 자주 등장하며 숙명적인 늙음과 죽음에 대해 끊임없이 언급하고 있다. 쥐와 뱀과 같이 죽고 죽이며 공생 불가능한 존재들을 등장시키며, 죽음을 앞둔 이들의 그 위태로움은 한층 배가되고 있다. 시에 등장하는 '숨소리'가 주는 이미지 역시 생명과 가장 직결되면서도 소멸의 이미지로 이어진다. 시인은 이 낡아가는 것들을 피하고 싶으면서도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단단히 뿌리박한 나무 사이를 휘감다가 사라지는 바람이나 날개 돋친 새처럼 나무를 벗어나 힘껏 날아가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 이유가 사라져가는 생명에 대한 두려움이었는지, 자신은 한 곳에 뿌리내린 삶을 살지 않겠다는 의지였는지는 모르겠으나 무슨 이유에서든 마주하고 사라지고 늙어가는 것들과 마주하기를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어디를 가도 결국 돌아올 곳은 한 곳이었을 것이다. 곡소리가 섞인 새의 끊임없는 울음소리만은 떠난 후에도 그 곳에 매어 있던 것을 보면 말이다. 이처럼 두려움과 그리움이 섞인 복합적인 감정은 '집착에 관하여'라는 시에도 여실히 드러난다.

다음은 시의 전문이다.


지주목에 쓸 요량으로 산에 올라 반나절 톱을 켰다

나무들이 지난 세월을 메치는 소리

쿵, 쿵 귀가 멍멍하다

지게에 쟁여진 나무들은 아직 맥박이 있다

아카시아 그 위에 난 길

나무의 숨통을 조르며 지나간 칡덩굴

너무 용쓰느라 죽는 줄, 썩어질 줄 몰랐겠지만

나무피질에 웅숭깊은 골, 하늘로 올라갔구나


  처음에 만난 문태준 시인의 시는 그저 따뜻하고 정겨웠다. 그가 노래한 농촌의 풍경은 그동안 잊고 있었지만 꼭 한번 다시 가고 싶은 추억 속의 장소를 떠올리게 했다. 그 정겨움은 그것이 사라졌거나 혹은 앞으로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불러오며 한층 더 따뜻하고 소중하게 느껴진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그의 시가 평화롭게만 느껴지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위태로움이 주는 서늘함은 끓어오르는 것을 늦출지언정 결코 식히지는 못할 것이다. 위태롭고 두려운 감정은 그리움과 정겨움을 사라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래도록 따뜻할 수 있도록 그것들을 자극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문태준의 시는 처음 시집을 열었을 때의 먹먹함과 온기가 뜨거움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뜨겁게 달아오른 것들은 차가운 환경에서 더 빨리 얼어버리기 마련이지만, 그의 시는 시집을 덮고 한참이 지난 후에도 미지근함으로 남아 오랫 동안 마음을 데우고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부재의 존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