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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어'라는 말이 불편한 당신에게


나를 알거나 나의 모든 글을 읽으신 분들은 알겠지만

난 올해 1월, 갑상선암 수술을 받았고 한 달 가까이 회복을 위한 시간을 가졌다. 몸의 회복뿐 아니라 마음의 안정을 위해서라도 쉬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고, 많은 사람들도 그렇게 이야기해 주었다.


“좀 쉬어.”

“건강이 최고야.”

“다 필요 없어. 너만 생각해.”

나를 위한 걱정이 묻어나는 말들이었다. 그래서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다. 진심 어린 위로로 받아들였다.


어느덧 4개월이 좀 더 지나 다시 일상으로 천천히 돌아오는 길목인 오늘 나는 또 그 말을 들었다. 상담교육시간에 뵙게 된 반가운 선생님과의 인사 자리였다. 이런저런 안부를 전하였고, 선생님은 내 이야기를 반갑고 따뜻하게 들어주셨다. 다 들은 선생님은 마지막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뭐 그렇게 열심히 해, 쉬어야지.”

"제가 그런가요." 하고 자리를 마무리했지만 그 말이 나를 멈춰 세웠다. 뒤돌아오는 마음이 조금 불편해진 걸 느꼈다. 사실 아프고 나서 글을 쓰기 시작했고 그 전의 나는 이런 감정들을 대수롭지 않게 흘려보냈다.


“뭐, 다 나 잘 되라고 하는 말이지.”

“예민하게 굴지 말자.”

그래서 괜찮은 척, 아무렇지 않은 척 지나쳐왔고, 심지어 불편한 감정에 오래 머무는 사람들과의 대화에 어쩌면 이해하는 척이나 공감하는 태도를 취했지도 속으로는 ‘저렇게까지?’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자기감정을 누르고 흘려보내는 것이 더 성숙한 태도라고 자만하고 미숙한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요즘 나는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내 마음이 어떤 반응을 하고 있는지, 왜 이 말이 불편했는지를 더 정직하게 들여다보고 싶어진다. 그게 진짜 나를 찾는 과정이고, 내담자를 이해하는 감정적 기반이기도 하다는 깨달음 나에게 닿았기 때문이다. 요즘 내가 생각하는 성숙한 상담사란, 어떤 감정이든 흘려보내기 전에 잠시 멈춰서 그 감정의 뿌리를 들여다보는 사람이다. 특히 반복적으로 느껴지는 감정이라면, 더더욱 그 자리에 머물러야겠다. 그 태도여야지 내담자의 어떠한 마음의 한 지점에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잠시 머무르고 기록해보려 한다. 또 주변 환우나 환우를 곁에 둔 이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필요성도 인지되어서 오늘 나의 마음을 기록해 본다.

*** 10년 전 연구이기는 하지만 찾아보니 관련 기사가 있었다.

출처: 미시간주립대학교 박희선 교수팀 & 더 커뮤니케이션즈 엔자임, 유방암 환자 200명 대상 조사. 한겨레신문, 2015.11.11.

암 환자들이 듣고 불편했던 말, 3가지가 나와있었다.

“원래 아프고 그런 거니까 당연하게 여기세요”

“괜찮아요? 힘들어 보여요”

“유방암 치료가 힘들다고 하던데 어떡해요”


어떤 느낌이 드시나요? 다양한 생각이 있을 듯하여 궁금하다. 나의 추측은, 고통에 대해 무시당하거나 덜 존중받는 느낌이 들거나, 수술 후 겉모습에 대한 판단을 들었을 때, 내가 걱정하던 모습과 일치함을 확인받은 불편감, 또 치료에 대한 걱정이 앞으로 내가 가야 할 길에 대한 막막함과 무력감에 더 힘을 보태지기 때문인 것 같다.

사실 모든 대화나 언어는, 한쪽만의 부족함이나 잘못으로 그 대화가 별로였다고 할 수는 없다. 어쩌면 그 말을 한 사람보다 그 말을 듣는 이가 갖고 있는 마음의 창이 더 중요한 것 같다. 그래서 저 문장, 워딩이 잘못이라기보다 그 말을 듣은 이가 인생의 큰 고비를 건너거나 건널 준비를 하는 환 우리는 것을 고려하였을 때 더 아프게 들릴 수 있다는 뜻이다.

오늘 나에게 ‘쉬어라’ 말씀을 주신 선생님과의 대화도 그러하다. 사실 나는 그분에게 내가 쉬면서도 상담공부나 수련을 놓지 않고 싶음을 인정받고 싶어, 주절이 주절이 내가 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하였기에 진심 어린 걱정을 하셨을 터이다. 하지만 나는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컸기에, 쉬라는 말을 전혀 다른 의도로 들린 것이다.

이런 언어의 상징성과 양방향성을 이해하고, 이 글을 조금 유연하게 읽어주셨으면 한다. 누군가에게 쉬라는 말을 했어서 어쩌지나? 혹은 앞으로 쉬라는 말을 해주기 조심스럽지 않아도 된다. 그렇게 말해서 실제 불편하다는 것보다는 내 마음의 걸리는 어떤 지점을 보겠다는 거니까 말이다.


자! 그럼 나는 왜 ‘쉬어’라는 말이 불편할까?

이 말은 처음 듣는 말이 아니다. 수술 전에도, 입원 중에도, 퇴원 후에도… 수없이 들었다. “쉬어야지.” “무리하지 마.” “아직 환자잖아.” 처음엔 위로로 들렸다. 두 번째도, 세 번째도, 고마운 말이었다. 그런데 마음 한 켠데 그 말이 자꾸 반항심이 든다.

왜일까. 불편함이라는 이 감정에 잠시 머무르고 적다 보니 이유가 5개나 떠올라서 숫자까지 붙여진다. 흘려버릴 수 있던 한마디에 이런 속내가 담긴다는 게 나도 놀랍다.

1. 공감 없는 조언처럼 들려온다.

"좀 쉬어"라는 말은 때때로 상대의 상황을 깊이 이해하지 않은 채 던져진 말처럼 느껴질 수 있다. 예를 들어, 내가 너무 바빠서 지쳐 있는데, 사정도 모르는 사람이 “그냥 좀 쉬어” 하면, “내가 게을러서 이런 거야?” 하는 죄책감이나 “내 현실은 몰라주네” 하는 소외감이 생기기도 할 것이다.


2. 실제로 쉴 수 없는 현실을 무시당한 느낌이다.

꼭 환우가 아니더라도 "쉴 수 없는데 어떻게 쉬어?"라는 마음의 소리가 있을 수 있다. 양육자나 워킹맘,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가장 등은 실제로 쉬기가 어렵다. 그런 상황에서 “좀 쉬어”는 현실을 외면한 말처럼 느껴진다. 사회생활을 하고 있던, 이러한 삶의 무게를 지닌 환자라면 어떠할까? 나의 상황도 그러하다. 오히려 “쉴 수 없어도, 네가 힘든 건 알아”라는 말이 훨씬 위로가 될 것 같다. 그리고 나는 적당한 일과 공부의 시간이 즐겁다. 거기서 오는 나의 만족감이 있다. 이런 마음은 존중받지 못한 느낌이다.


3. 내가 약하다는 것을 암시하는 말처럼 들린다.

“내가 지금 뭔가 잘못하고 있다는 뜻인가?”

이 말은 종종, ‘지금 너는 너무 힘들어 보여’ → ‘너는 과하게 애쓰고 있어’ → ‘그래서 네가 잘못하고 있어’로 해석되는 과정이 된다. 좀 더 비약하자면 내 상태에 대한 상대의 평가처럼 들려서 순간적 방어, 저항감이 생기는 것 같다. 어쩜 이 저항감 자체가 나라는 사람이 살고자 하는 의지일 수 있다.


4. 책임을 내려놓는 게 두려워서 그렇다.

어떤 사람에게는 “쉬어”라는 말이 곧 멈춘다 = 무너진다는 뜻일 수 있다. 오랫동안 애쓰고 살아온 사람일수록 쉬는 법을 잊었거나, 쉬는 걸 불안하게 여길 수도 있지 않을까? 나 역시 대학원을 졸업하고 지금까지 두 아이를 출산한 1년씩을 제외하면 계속 공부나 일을 해왔다. 그러니 나에게는 '쉬어'라는 말은 '너의 삶을 그만하라, 너의 책임을 포기하라, 네가 해온 것들은 별 것이 아니다'는 뜻처럼 들리기도 했던 거 같다.

5. ‘쉬어야 한다’는 또 다른 압박처럼 느껴진다.

요즘은 '회복', '쉼', '자기 돌봄'이 중요한 키워드이다. 나도 많은 글이나 상담 장면에서 이 용어를 참 많이 쓴다. 또 수술 이후 조금 회복이 되었을 때, 내가 선택한 것에 ‘쉼을 위한 집단상담프로그램’이었다. 거기서도 나는 ‘쉰다는 게 뭘까?’를 계속 생각한 것 같다. 그래서 ‘힘 빼고 살자’라는 글을 쓰게 된 것 같다. 쉰다는 건 조금 힘을 빼는 시간을 갖자는 거 아닐까 하고... 그런데 사실 ‘쉬어야 한다’그 말 자체도 또 하나의 과제가 되어버리는 것 같다. “왜 너는 아직도 쉬지 못하니?” 같은 묵직한 조언으로 들린다.


나는 아직 ‘환자’고, 그 안에 있는 마음

몸은 많이 회복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환자’이고 추가적인 치료도 필요하다. 그 말은 나 자신에게도, 세상에게도 조금 더 배려가 필요하다는 의미라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내 마음은, ‘회복 중인 내가 지금 이걸 한다고 해서 뭐가 문제야?’라는 방어적인 생각과 ‘그래도 이 시간도 의미 있게 살고 싶다’는 욕구 사이를 오가고 있었다.

그리고 '쉬어야 한다'는 말은 내가 선택한 어떤 ‘행위나 일상’을 무효화하거나 불필요한 것처럼 느끼게 했는지도 모른다. 마치 지금 이 시간, 내가 하는 공부나 글쓰기가 즐거운데도, 뭐 하냐고 쉬라면서 이 행위를 덜 중요한 일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언어의 양방향성에 대해서도 언급했듯이 그 말이 틀렸다는 건 아니다. 나는 정말 쉬는 게 필요하다. 하지만, 진짜로 필요한 건, 단순한 ‘행위로써의 쉼’이 아니라 ‘존재로서의 이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왜 그렇게 움직이려 하는지, 그 안에 어떤 마음이 있는지 알아봐 주는 말이 필요하다.

“쉬어”보다는, 이런 말은 어떨까?

“그동안 정말 애썼겠다.”

“지금 이 시간도 너한텐 의미 있을 것 같아.”

“몸은 어때? 마음은 어때?”

“네가 뭘 하든, 나는 응원해.”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을 정도로 회복돼서 다행이야.”

“쉬고 싶을 땐 쉬어도 되고, 하고 싶은 것도 하고”

아까 소개한 기사에서 암 환자들이 듣고 위로받았다는 문장들은 이러하다.

“다른 사람들처럼 당신도 나을 수 있을 거예요.”

“힘든 치료 과정을 견뎌 내는 당신이 자랑스러워요.”

“치료에 전념할 수 있도록 제가 도울게요.”

“수술받으면 좋아질 거예요.”

“얼마나 힘들지, 어떤 기분일지 알 것 같아요.”

회복을 믿어주고, 현재를 살아가는 나를 인정받는 말들이다.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면서, 혹은 관계에 따라 구체적인 도움을 주는 말들인 것 같다.

“좀 쉬어”라는 말은 흔한 위로의 언어임이 확실하다. 그러나 병을 알게 된 순간부터 ‘쉬어라’, ‘건강이 제일이야’, ‘다 필요 없고 너만 생각해’ 같은 말이 반복해서 들릴 때, 사람에 따라 그 말이 마치 내가 지금 하고 있는 노력과 회복을 가볍게 만드는 말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몸은 환자지만, 마음까지 환자로 규정되길 원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무조건 적인 쉼=멈춤'이 아니라, '존중받는 회복' 그것이 진짜 환자에게 필요한 말 아닐까?



그리고 ‘쉬어’라는 말이 불편한 당신에게


‘쉬어라’는 말이 불편하게 느껴진다면 그건 당신이 그만큼 오래도록 애써왔다는 증거이다. 누구보다 열심히, 누구보다 책임감 있게 살아왔기에 멈추는 것조차 어색하고 두려운 마음 아닐까?


‘열심히 하는 나’도 소중하지만, ‘잠시 멈출 줄 아는 나’도 괜찮은 사람이라는 걸, 이제는 조금씩 받아들이도록 조언을 남기고 싶다.


내 안의 불안이 쉼을 방해하고 있지는 않은가 점검해 봤으면 좋겠다. 나의 가치를 어떠한 성취나 일로만 증명하지는 않았을까? 하고 말이다. “이 시간에 뭐라도 해야 하지 않나?” 하는 불안이 밀려와 마음이 더 조급해지는 거라면 내가 나를 좀 멈춰보자.

그리고 타인의 시선이 나에게 영향을 준다. 남들이 일하는 시간에 쉬면 괜히 죄책감이 들고 눈치가 보이기도 하고, 이 정도 아픔이면 일할 수 있지 않나? 하는 마음의 소리가 들린다면 타인의 속도에 맞춰 나의 리듬을 억지로 조절할 필요는 없다는 걸 기억하길



나 자신을 ‘휴식, 쉼’을 허락하지 못하는 마음이 담겨 있었지는 않은지, 내가 생각하는 쉼은 무엇인지도 돌아봤으면 한다.


그래서 스스로 생각하면 좋겠다.

• 나는 왜 쉴 때 마음이 불편해지는 걸까?

• 나는 어떤 순간에 마음이 정말 쉬는 느낌을 받는가?

• 나는 지금 ‘쉬어야 하는 이유’를 증명하려 들고 있진 않은가?


당신에게 쉼은 어떤 의미인가요?

지금, 그 질문 앞에 잠시 멈춰 서 보는 건 어떨까요.

나의 성찰의 시간이 누군가에게 다정한 위로가 되었기를 바라며 글을 마칩니다.




그리고 덧붙이는 마음,

이 글을 쓰면서 문득 조심스러워지는 지점이 있다.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쉬고 싶은 욕구가 삶의 진심일 때가 있고, 실제로 쉬어야만 버틸 수 있는 몸과 마음의 고통이 있는 이들도 있다. 그런 이들에게는 “쉬는 게 제일 중요해요”라는 말이 정말 절실하게 필요한 말이기도 할 듯하다. 내가 멈추지 못할 때 잠시 멈추도록 잡아주는 것 말이다. 그리고 ‘쉬고 싶고 쉬어야 하는 사람들에게 쉬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선택인지’도 알아주면 좋겠다. 그 사람의 에너지, 의지, 회복 속도를 고려하지 않은 채 “이게 도움이 될 거야”라고 말하면, 선의의 조언이 엄청 난 무게가 되어 누를 수 있기 때문이다.


힘 빼고 살자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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