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도저에 치이면 아프다.
나는 얼빠가 아니다. 대학 때 처음 만났던 남자친구도 25살까지 모태솔로였으며, 나도 모르게 잘생긴 사람들은 괜히 피했던 것 같다.
그런데 살면서 딱 한 번 얼굴만 보고 만난 적 있다. 잘생긴 남자, 살짝 과장해서 서강준 같은 느낌의 남자.
그는 볼일이 있어서 우연히 우리 사무실에 들렀고, (그 당시 그의 표현에 의하면) 나를 보고 한눈에 반했다고 했다. 그래서 필요도 없는 서류를 굳이 굳이 떼어갔고 서류에 대해서 나에게 이것저것 질문했다.
나는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는 사람과 한참을 실랑이했던 차라, 예의 바르고 한 눈에도 잘생긴 그와의 대화가 너무 힐링이었기에 평소보다 조금 더 친절히 안내를 했었던 것 같다.
그 다음날이었나? 사내 메신저가 띠링 울렸다.
‘안녕하세요. 어제 서류받아간 ㅇㅇㅇ입니다. 너무 친절하게 설명해 주셔서 감사드려요’
아 직원이었구나? 잘생긴 그의 얼굴이 바로 떠올랐다. 나도 눈치는 있으니, 그가 보내온 메시지가 감사 인사와 함께 다른 의미까지 담고 있다는 것을 느꼈고 내심 기분이 좋았다.
내가 호의적으로 대화를 이어가자 그는 불도저로 변하였다.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대며 내 핸드폰 번호를 알아갔다. 그때부터 본인의 아침부터 저녁까지 나에게 보고하는 것은 물론이고, 나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댔다.
애석하게도 나와 개그코드가 참 잘 맞았기에 초반에 주고받았던 대화들은 각박한 회사생활에 단비 같았다.
그가 기세 좋게 밀어붙이는 점 또한 남자답고 매력적이었다.
(일단 잘생겼는데 뭐든 안 좋아 보이겠는가)
서로 잘 알지도 못했지만, 폭포수처럼 자신의 감정을 쏟아내는 그에게 나는 마냥 휘둘렸다. 그의 달콤한 말에 홀랑 넘어갔다. 사무실 앞으로 데리러 가겠다며, 밥 한 번 먹자는 말을 들었을 때 그제야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가 알고 있는 나는 진짜 내가 아니기에.
실제로 나는 일 핑계를 대며 한두 번 약속을 미뤘다. 그러면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지에 대해서 고민도 많이 했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그는 불도저처럼 끊임없이 다가왔으니, 이 정도 마음이면 괜찮을까? 진심일까? 하는 생각에 마음을 굳혔다.
‘오늘 진짜 이쁘네요. 맨날 그렇게 이쁜가요?’
유독 그는 나에게 이쁘다는 말을 자주 했다. 사실 사람의 심리상 본인이 듣고 싶은 말을 상대에게 많이 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드디어 만나는 당일. 분위기 좋은 곳에서 식사를 하고 그냥 끝내기 아쉽다며 날 끌고 들어간 칵테일바에서 그를 제대로 알게 되었다. 나는 단 술은 좋아하지 않는 데다가 칵테일처럼 섞은 술은 잘 받지 않기에 간단하게 기네스를 시켰다. 그런데 그는 그곳의 단골인지, 바텐더에게 ‘늘 먹던 걸로’를 시전 하며 (잘 기억나지 않지만) 갓파더 같은 독한 술을 주문했다.
어두운 바에 일렁이는 촛불 건너로 보이던 그가 처음에는 무척 멋져 보였다. 잘생기면 싸우고 화가 나도 얼굴 보면 풀린다는데 이런 얼굴이 바로 그런 얼굴인가 상상을 하고 있던 무렵, (조상신이 도우셨는지) 그는 취했다. 그리고 자기 자랑을 마구마구 늘어놓기 시작했다.
‘저 진짜 그렇게 잘 생긴 거 아니에요. 진짜 안 잘생겼어요. 킬킬’
물론 나도 이쁘다는 소리를 들었으니, 당연히 ‘ㅇㅇ씨도 너무너무 잘생기셨어요’ 답례를 하는 게 예의라 생각했다. 그때부터 ‘나 안 잘생겼어요’ 돌림노래가 시작될 줄이야.
물론 자기 딴에는 자신이 잘생기기만 한 게 아니라 얼마나 남자다운지 대한 어필도 하고 싶었을 터. 자신의 미모 덕에 학창 시절 얼마나 인기가 있었는지를 돌림 노래처럼 개굴개굴 외쳐댔다.
그러나 말이 길면 군말과 잔말이 나오기 마련.
고등학생 시절, 그는 소위 말해 잘 나가는 학생이었고 지금 생각하면 학폭이라고 할 만한 행동도 했다고 서슴없이 떠들어댔다. 반성한다는 둥, 지금이라면 절대 그러지 않을 거라는 둥 꼬인 혀로 헤실거리며 말하는 그가 이제는 더 이상 멋있어 보이지 않았다. 엮이고 싶지도 않았다.
문제는 그는 여전히 나를 맘에 들어한다는 것. 그리고 사실 정식으로 사귀자는 말도 하지 않았기에, 굳이 내가 미리 선 긋고 나댈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직장 내 사람이기에 딱히 불화를 만들고 싶지도 않고 천천히 멀어지면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근데 내 속도 모르는 불도저는 끊임없이 직진해 왔다. 사무실 쪽으로 찾아오며 나를 자꾸 불러 내려고 했다. 그리고 아무 사이도 아닌데 주제넘게도 나에 대해 간섭하기 시작했다.
‘볼살 귀엽긴 한데, 살 조금만 빼보면 어때요? 내가 옛날에 100kg 넘을 때 사진 보여줄게요’
그는 자신이 학창 시절 뚱뚱했는데, 살 빼고 이렇게 잘 생겨졌다는 식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해대며 긁지 않은 복권 이야기를 툭하면 꺼냈다. 지금의 나라면 긴말하지 않고 ‘당신이 맘에 들지 않네요’하고 단칼에 거절했겠지만, 어렸던 나는 무지했고 이 사람을 겪어낼 수밖에 없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그와의 만남이 맛집 투어가 아닌 굶고 강변을 뛰는 것이 되었을 때 확실히 깨달았다.
이 사람은 나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며, 계속해서 나를 자꾸 쥐고 흔들 사람이라는 것을.
내가 가발이야기를 하면 무조건 떨어져 나갈 사람이라는 것을.
이렇게 하면 나에게서 떨어져 나가겠지 싶은 마음에 그에게 미안한 듯 연기하며 이야기를 꺼냈다.
사실 항암치료 부작용 때문에 가발을 아직 쓰고 있다고.
안 그래도 큰 그의 눈이 더 커졌다. 흠칫하는 게 눈에 보였다.
나를 위한 최소한의 배려였는지, 본인이 생각하기에 그게 멋져 보인다고 생각했는지 묵묵히 내 말을 듣기만 했다.
그리고 그가 연락하는 횟수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고, 얼마 안 가 헤어졌다. 사실 헤어진 것이라고 할 수도 없다. 사귄 것이 아니니까.
그는 어이없게도 가발 때문이 아니라 자신은 날씬한 사람이 좀 더 매력적이라고 생각해서 우리의 관계가 끝난다는 식으로 둘러댔다. 그래도 끝까지 책임지지 못할 것 같아서 손 끝 하나 대지 않았다고 끝까지 (자기 자신에게) 멋진 남자인 척했다.
그래 고맙다 병신아.
덕분에 불도저처럼 밀고 들어오는 사랑이 무척 예의 없는 방식의 사랑이란 걸 깨달았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남자답고 추진력 좋은 사람 아니냐고 이야기할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아니었다.
내 감정과 내 판단이 제대로 정해질 틈도 주지 않고 그저 도파민에 이끌려 단편적인 것만 보고 ‘내가 너 좋아해, 잘해줄게 너도 분명 날 좋아할 거야’ 식으로 밀어붙이고 같은 감정을 강요하는 건 너무 일방적이다.
이렇게 자기감정대로 불도저처럼 구는 사람은 나르시시스트일 확률이 높아 상대를 자기 입맛대로 바꾸려는 경향도 강하다. 이들에게 상대의 감정은 중요한 게 아닌 것 같다. 그저 상대를 갖고 싶은 인형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물론 내가 인형 같다는 의미는 아니다.)
제 멋대로 들이대놓고 또 얼마 안 가 헤어짐을 이야기할 때 그의 안중에 내 감정에 대한 존중은 없었던 것이 확실하다. 왜냐하면 그는 몇 년이 지난 얼마 전까지도 나에게 안부 메시지를 보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