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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그마 Feb 22. 2024

오빠 믿지?

믿으면 안 됩니다.

불도저에 치이고 멘탈을 다시 회복하기까지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오히려 나에게 꼭 필요했던 시간이었다고 생각했기에. 그리고 또 철없게도 저런 스타일만 피하면 다 괜찮을 줄 알았다.


하지만 인생이, 사랑이 그렇게 쉬울 리가


매일같이 업무차 우리 사무실에 들르는 남자가 있었다. 그는 늘 서류 뭉치를 들고 와서 관련된 서류를 떼어갔다. 바빠 죽겠는데 늘 많은 서류를 들고 와서 부탁을 하니, 멀리서 그가 걸어오는 모습만 보여도 나도 모르게 '아오 바쁜데, 오늘은 또 얼마만큼 가져온 걸까?' 하고 신경이 쓰였다. 그렇게 몇 달을 보내면서 조금씩 정이 들었었나 보다.


멀리 나가 있는 남편을 그리며 편지를 쓰던 부인이, 편지를 위해 자주 찾아오던 우체부와 사랑이 싹튼 것 마냥 나도 모르게 그와 친근해졌다. 처음에 그는 나에게 그렇다 할 호감을 보이지 않았지만, 점점 간단한 인사말을 붙이고 고생한다며 간식을 건네주며 친근하게 다가왔다. 서류를 떼는 와중에 주고받던 서로의 푸념 몇 마디에 우리는 조금씩 더 가까워졌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날씨가 더워졌다며 슬쩍 커피를 건넸다. 슬리브에 자신의 명함을 꽂은 채.


그 당시 불도저만 조심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가득 찼던 나는 몇 개월에 걸쳐서 아주아주 천천히 다가온 그가 괜찮아 보였다. 게다가 다른 회사 사람이니 사내연애하다 헤어졌을 때 생길 곤란함도 없다며 요란하게 행복회로를 돌려댔다.


 말속에서 그의 심성도 느껴졌다. 나 같으면 불같이 화를 내고 펄쩍펄쩍 뛸 일을 그는 그저 '어쩔 수 없지, 고객님이 원하는 대로'의 선한 마인드로 대하고 있었다. 행여나 내가 작은 욕이라도 하면 깜짝 놀란 표정으로 나의 과격함을 다독였다.


그를 보는 나의 눈빛이 달라진 것을 사무실 친구가 눈치챘다. 정말 하늘에 맹세코 나는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그와 같은 고등학교를 다녔다던 내 친구는 알음알음 그 사람에 대해서 정보를 캐왔다.


"내가 충격적인 거 들었는데 놀라지 마라?"


왠지 모르겠는데 친구는 무척 신나고 흥분돼 보였다. 이 친구가 이렇게 들뜰 이유는 하나겠지? 나쁜 쪽이다.


"왜? 애들이라도 패고 다녔대?"


사실 전혀 그럴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나, 내 무의식이 나도 모르게 대답했다. 그냥 그 친구가 신날 이유를 괜히 맞춰보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최악의 스토리를 내가 듣기보다 먼저 말하기를 택한 걸까?


아니길 바라면서, 차라리 바지에 오줌이라도 쌌다는 이야기이기를 바라면서 대답을 기다렸다.


"어? 뭐야 어떻게 알았어? 근데 막 패고 다닌 건 아닌데 교묘하게 패거리 만들어서 애들 왕따 시키고 선생님 엿맥이고 다녔대"


아 신이시여 대체 나한테 왜 이러십니까.


내가 그렇게 양아치들이 갖고 놀기 좋은 만만이 같았던 걸까?

전에 놈은 술에 취해 자폭이라도 했지 이 사람은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다.

착하고 우직하고, 상대를 전적으로 이해하고 맞춰줄 것 같았던 사람도 결국은 그런 척이었고 날 교묘하게 속였다.


속은 것은 둘째치고 나는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본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부끄럽지만, 가발 때문에 낮아진 내 자존감을 남자로 채우려고 했던 것 같다. 아니면 단순히  애정결핍일 수도 있다.


그와 저녁을 먹은 두 번째 날. 궁금한 것이 많다는 핑계로 은근슬쩍 학창 시절에 대해 돌려 물었으나 정확한 답변은 들을 수 없었다. 게다가 그는 사귀자고 한 그 다음 주부터 친구들과 여행을 간다며 연락도 잘 되지 않았다.


"오빠 믿지요?" 했던 그의 얼굴이 떠오른다.

이 좁은 동네에서 그런 하찮은 거짓말을 믿을 것이라 생각한 것일까? 내가 그토록 바보 같아 보였을까? 아니면 그냥 알아도 모른척 해 달라는 것일까?


이상하게도 데이트할 때 그는 늘 나중을 기약했다. ‘나중에 우리 여행도 가고... 나중에 더 유명한 맛집도 가고..'


그러나 그에게 스킨십이란 건 나중이 없었나 보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데이트를 마치고 차에서 내리려는데 그가 갑자기 날 막아선다. 

가까이 훅 다가온다.


키스를 하려고 내 얼굴 그리고 머리 쪽으로 그의 손이 더 뻗어오는 순간 (손도 몇 번 안 잡은 상태였다. 나는 유교걸이다.) 모든 것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정나미도 훅 떨어졌다. 탈모인들은 다 이해하겠지만, 적은 머리숱이나 가발 때문에  다른 사람이 머리 만지는 걸 경계하게 된다. 마치 강아지처럼(?) 내 머리에 손을 댈 수 있는 사람은 내가 인정하고 허락한 사람뿐.


갑작스레 들어온 그의 손길에 정신이 들고 경계 경보가 세차게 울렸다.


그간 내 자존감 때문에 흐린 눈으로 보고 싶은 것만 보며 대했던 그를 제대로 다시 보게 됐다.


얼마 뒤, 내 가발에 대한 이야기를 당당하게 했다. 이번엔 미안한 듯 연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당당하게 이래도 나를 받아줄 수 있냐고 직접적으로 물었다. 


나를 교묘히 속여가며 대하는 사람에게 나는 본인보다 용기 있고 나은 사람임을 보여주고 싶었다.


늘 그렇듯 그는 또 한 번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라며 바쁜척 돌아갔고 얼마 안 가 감쪽같이 자취를 감추었다. 그만 만나자는 카톡을 남긴 채.


내가 그의 비굴함에 짜증이 나서 만나서 얘기하라고 다그쳤지만, 하늘이 말렸다. 사무실에 비상이 떨어져서 우리 팀 모두가 한동안 전원 야근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 이후 다른 직원한테 업무를 넘겼는지 어쨌는지 다른사람이 서류를 들고 온다.

끝까지 야비하다.


혹여나 나와 같은 상황을 겪고 있는 분이 있다면 말해주고 싶다.

가발을 쓴다고 차이는 것은 우리 때문이 아니라고.


오히려 가발은 채반이다.

양아치 쓰레기 거르는 채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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