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돼 도망쳐
가발 덕분에 제대로 된 연애가 시작되기도 전에 나는 같은 이유로 두 번이나 차였다.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만약 연애가 오래 지속되었다면 어땠을까? 결국 끝은 정 주고 맘 줬다가 얼마 안 가 버려지는 눈물 가득한 이별이었으리라. 가발이 연애에 서툰 내가 그 양아치들에게 휘둘리는 것을 사전에 차단해 준 것이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그렇지만 조금도 슬프지 않았냐고 묻는다면 선뜻 아니라고 할 순 없겠다.
다행히도 그 무렵, 영원한 나의 우상 이효리 언니의 민박집이 오픈하였고 무심한 듯 툭툭 던지는 그녀의 이야기로 나는 많은 위로를 받았다.
그중에도 ‘나 자신이 좋은 사람으로 바꾸려고 노력하면 좋은 사람을 만나게 된다.’라는 말이 유난히도 또렷이 기억에 남기에, 뭔진 잘 모르겠지만 내가 좋은 사람이 아녔으니 저런 양아치들이 꼬인 것이고 내가 바뀌면 이번에는 정말 좋은 사람이 나에게 찾아올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품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쓰레기들을 만난 탓을 내 탓으로 돌리는 것 같아서 나 자신을 좀 토닥여주고 싶지만.
그래서 자존감이나 회복탄력성과 같은 심리 관련 책도 많이 읽었다.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말에 큰 맘먹고 PT도 등록했다. 마음 수련한다는 생각으로 라탄 공예 클래스도 다녔다. 남자를 만나려는 의도가 아니라 여러 사람들을 다양하게 겪어보자는 마음에 직장 내 동호회도 들어갔다.
자기 계발이 재밌다는 것을 이때 깨달은 것 같다.
사연 없는 인생은 없다고 했던가 라탄을 엮으며 신혼인데도 각 방을 쓴다는 예쁜 언니의 이야기와 동호회 내에서 간간이 들려오던 오피스 와이프 이야기에 정신이 혼미했다.
참 미안하고 잔인한 이야기지만, 사지 멀쩡하고 머리털도 다 있는 사람들도 그런 일을 겪고 있다는 것이 나에게 위로가 되었다.
세상에 내가 제일 불쌍한 줄 알았더니, 아니었을 때.
비슷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부터 나는 밝아졌다. 바닥까지 갔던 내 감정이 솟구쳐 올라왔다.
업무 중에도 이전에는 혹시나 상대방이 나의 가발에 시선이 가지 않을까? 가발 쓴다고 무시하거나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과도한 친절을 베풀었었다. 무조건 먼저 사과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게 하고 싶다는 생각이 사라졌다. 적당히 이성적으로 행동하고 아닌 것에 대해서는 거절도 할 줄 알게 되었다. 그렇게 (내 생각에는) 나는 조금씩 제대로 된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이었다.
집안 행사 때 오랜만에 만난 친척들이 용돈을 줄 때, '괜찮아요' 하며 손사례를 치는 와중에 주머니에 용돈을 슬쩍 찔러 넣어주시면 '감사합니다' 하고 배시시 웃게 되는 소위 용돈 소매 넣기라고 불리는 그것을 당했다. 다른 팀 팀장님에게.
물론 용돈은 아니었고, 팀장님의 친구의 아들의 핸드폰 번호가 적힌 쪽지.
팀장님은 부서 발령 이후부터 계속해서 나를 눈여겨보셨다고 했다(여자분이시다. 오해 방지를 위해 덧붙인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여러 시험들을 잘 통과했는지, 언젠가부터 나를 보는 눈에서 꿀이 떨어졌다.
팀장님은 나에게 자기 친구 중에 제일 좋은 친구라며, 좋은 시어머니가 될 것이니 걱정 말고 아들 한 번 만나보라고 부추기셨다.
아들이 너무 착하고 가족밖에 모르는 통에 아무한테나 소개 못 시켜줬다는 말을 좀 더 끝까지 정신 차리고 들었어야 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