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라야니 Mar 26. 2024

핸드폰, 인터넷을 3개월 끊었더니

정보로부터의 디지털디톡스

처음엔 끊으려고 했던 게 아니었다. 붓다선원에 입소하게 되면 핸드폰은 종무소에 제출하고 필요한 경우에 잠시 쓰고 다시 제출하면 된다. 그런데 입소 후 일주일간 폰디톡스를 한 후 핸드폰을 열어봤더니 잠수선언을 해둔 덕분인지 연락온 곳도 없었고 꼭 봐야 할 뭔가도 없었다. 매달 5만 9천 원의 요금도 아까웠다. 몇 번이고 망설이다가 일시정지를 3개월간 신청했다. 그렇게 3개월간 정보로부터의 디톡스가 시작되었다.


불편했던 것을 하나 꼽아보자면 날씨가 궁금했다. 그러다 차츰 익숙해지자 전날밤바람의 차가움이나 별들이 구름에 가려져 보이나 안 보이나로 다음날 날씨를 점치게 되었다. 나중에는 비가 오든 눈이 오든 따뜻하든 춥든 그러려니 했다. 추우면 옷을 하나 껴입었고 눈이 오면 오는 대로 눈을 쓸면 뿐이었다. 내일이 아닌 오늘만을 사는 나날들이 계속되었다.


핸드폰을 붙잡고 있지 않고 묵언을 지키자 즐거움이라곤 짧은 산책과 일기 쓰기 정도였다. 가져간 펜이 닳는 것을 보며 마음 졸여가며 글씨를 최대한 조그맣게 적으며 펜과 노트를 아껴아껴가며 정성껏 썼다. 꾸준히 법문을 들으며 일기장에 필기도 해둔 탓에 나중에는 법문을 복습하며 아 이때 그 말씀이 이런 뜻이었구나 하고 혼자 별표를 치며 감탄하기도 했다. 그때 힘들었는데 잘 넘긴 거 같다며 지금 아무런 진척이 없는 것 같아도 일기장의 저 때에 비하면 많이 성장했구나 하며 자신을 돌아보기도 했다. 돌이켜보니 그게 그곳에서의 즐거운 여가시간이었다. 핸드폰과 인터넷 디톡스가 24시간 수행을 지켜주었음을 하산해서야 알게 되었다.


평소 폰으로 웹툰과 웹소설 보기를 즐겨했는데 명상할 때마다 내가 살면서 봤던 모든 웹툰과 웹소설들이 번갈아가며 등장했다. 좋아했던 드라마, 영화, 유튜브 영상이나 짤, 애니메이션도 쉴 새 없이 머릿속에서 상영되었다. 다 까먹은 줄 알았던 등장인물의 이름들과 사소한 에피소드에서 인상 깊었던 장면까지 몇 시간이고 반복되었다. 여기 명상을 하러 온 건지 머릿속의 이것들을 다시 보러 온 건지 헷갈릴 정도였다. 처음에는 재밌다가 나중에는 화가 나다가 나중에는 또 생각났구나 하고 그러려니 할 무렵쯤 되자 상영이 드디어 멈추었다. 명상중 잠깐 떠올랐다가도 음 또 나왔네 하고 금방 다시 숨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기까지 거의 70일이 걸렸다. 100일 수행이 아니라 한두 달 수행을 했더라면 이것들만 보다가 수행이 끝날 뻔했다.


"수행이란 선과 불선의 척도를 세우는 것이다. "라는 스님 말씀이 깊이 와닿았다. 선의 힘을 가진 소설, 만화, 영상, 애니메이션은 명상 중에 떠올라 나를 괴롭히는 일이 없었다. 물론 그런 것들이 거의 없긴 했지만. 영성책이나 영성 관련 영상들에 대한 생각은 망상으로 명상 중에 떠올라도 금방 쳐낼 수 있거나 오히려 깊은 숙고가 일어나게 하여 다시 명상에 집중하는데 도움이 되게 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 일상에서는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지는 소설, 만화, 영상, SNS 등이 실상 우리의 감각적 욕망을 자극하고, 우리의 성냄을 당연시 여기게 하고, 게으름과 나태를 힐링으로 둔갑시키고, 고요한 마음을 들뜨게 하여 뭔가를 원하게 하거나 후회하게 하고, 진리에 대한 의심을 키워나가게 했던 것임을 이번 디톡스로 알게 되었다. 머리로 어렴풋이 알고 있던 것을 100일간 가슴으로 다시 알아나갔다.


100일 수행을 마치고 하산할 적에 핸드폰의 웹툰/웹소설 앱을 보자마자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지워버렸다. 몇 년간 유지했던 유튜브 프리미엄도 재신청하지 않게 되었다. 그 허망하고 유익하지 않은 것들과 명상중 머릿속에서 싸우느라 지쳐 나가떨어졌던 시간들이 떠오르면 저도 모르게 진저리가 쳐졌다. 실상 그런 것들은 주로 내면의 자신과 마주하기가 두려워 외면할 때마다 외부의 자극을 찾아 도피행각으로 보았던 것들이다. 극심한 스트레스 상황에서 무의식적으로 찾아보았던 것들. 내면의 깊은 상처를 모른 척 덮어버리고자 체하고 탈 나는 줄도 모르고 아무거나 집어삼켰던 것들. 이제 비로소 다 토해내고 위장을 깨끗이 비운 느낌이었다.


일상에서는 또한 이러저러한 궁금증들이 일어나면 인터넷에서 3초 만에 검색하여 답을 찾곤 하였다. 그러나 여기선 그럴 수 없으니 자꾸 떠오르는 궁금한 것들은 메모를 해두고 나중에 꼭 찾아봐야지 했다. 묵언수행을 해야 하니 다른 사람에게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라 처음엔 답답하기도 했다.


시간이 좀 지나자 호기심을 갖고 궁금했던 것들의 거의 대부분은 굳이 몰라도 되는 잡념인 것을 알았다. 마음은 집중상태가 아니면 내키는 대로 뭐든지 생각하려 하는 경향이 있어 말 그대로 "아무거나" 덥석 물어 늘어졌다가 금방 싫증을 내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떼쓰는 어린애였구나 싶었다. 뭔가 궁금한 것들이 일어날 때마다 그 어린애의 요구에 응하는 노예가 되어 검색한다. 그러다 검색이 꼬리에 꼬리를 잇다 정신 차려 보면 전혀 연관 없는 영상을 키득거리며 보거나 인터넷 쇼핑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제야 내가 이걸 왜 보고 있지, 이걸 왜 사게 되었더라 한다. 그렇게 낭비했던 아까운 시간들이 참으로 많았다. 디톡스 이후 이제는 뭔가 궁금한 마음이 일어나도 떼쓰는 어린애를 바라보듯 그 마음을 피식 웃으며 다소 넘길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럼에도 꼭 알고 싶은 몇몇 궁금한 것들도 여전히 남아있었다. 거기에 대한 호기심이 점점 커져갔고 그 호기심은 탐구욕이 되었고 그 답에 대해 시간을 들여 스스로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마침내 묵언을 깨고 스님이나 다른 수행자에게 꼭 물어봐야 할 정도가 되면 그 질문과 답에 대한 내용을 마음 깊이 새길 수 있게 되었다. 그러한 질문과 답들은 삶의 진실한 자양분이 되는 것이었고 그 자양분이 되기 위해서는 혼자 깊이 오랫동안 숙고해 보는 시간이 꼭 필요했던 것 같다.


알아야 할 것을 알아야 할 때는 몰라야 할 때 몰라야 한다. 그러나 정보로부터의 격류 속에 휩쓸려 떠밀려내려가고 있는 와중에는 무엇을 알아야 하고 무엇을 몰라야 하는지 그것을 또렷이 볼 힘이 없다. 그래서 감각적 욕망을 자극시키는 온갖 정보의 홍수 속에서 괴로워하면서도 괴로운 줄을 모른다. 괴로움에 중독이 되면 그 괴로움도 달콤하게 여겨지기 때문에. 그 잠시의 달콤한 것을 끊어내기 위해 용기를 내야 한다.


진정 보아야 할 것을 보기 위해서 눈을 감는다. 단순히 들어오고 나가는 숨을 보며 고요한 집중을 통해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선이 아닌가를 보는 힘을 키워나간다.


지혜로운 사람은 목이 마르다고 해서 소금물을 마시지 않는다. 어렵고 힘들더라도 바닷물을 증류하고 시간을 들여 깨끗하게 정수된 물을 마실줄 안다. 많이 마셨던 소금물을 다 토해내고 깨끗한 물로 몸과 마음을 다 채우고 돌아온 지금, 다시는 갈증이 난다고 소금물을 마시지 말아야지 하고 결심해 본다.





작가의 이전글 붓다선원, 그 100일 수행의 시작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