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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 eden Jan 24. 2021

나의 첫 단편 시나리오 (1)

작가로운 생활

각자 다른 형태의 학대를 겪은 여자와 아이가 의도치 않게 서로에게 위로가 되고, 그로 인해 서서히 변화되는 과정을 담았다. 그들을 통해 우리는 자신을 돌봐야한다는 이유로 당연스레 타인에게 무관심하진 않은지, 그러면서도 스스로를 아끼기보다는 누구보다 가혹하게 굴고 있진 않은지 생각해볼  있다면 좋겠다. 조금  바라자면, 도움이 필요한 이의 신호에 너무 늦지 않게 답할  있게 되길.


저런 작의를 품고 2018년 썼던 단편 시나리오가 있다. 구상은 훨씬 이전에 했지만 시나리오를 배울 기회가 생기면서 즐거움과 고통을 오가며 비로소 쓸 수 있었던 이야기. 이후 자기만족과 함께 책장 구석에 박아두었는데, 요즘 내 상황과 최근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이 맞물려 자꾸 생각이 거기에 머물기에 오랜만에 꺼내보았다.

그때는 아이가 없었고 (낳지 말까 고민했던 시기다) 그저 이런 일이 없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썼는데, 그 이후부터 지금까지 늘 현실은 영화나 드라마와 비교할 수 없이 잔혹하다. 그러나 늘 더 큰 희망을 보여주는 것도 현실이다. 그렇다면 여전히 더 나은 세상을 바라며 할 수 있는 일이 있지 않을까. 인간다운 인간으로서, 작가로서, 이젠 아이가 있는 엄마로서.

아직 구체적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일단 글로서 변화를 바랐던 마음을 다시 상기하기 위해 미흡한 이야기를 꺼내두기로 했다.




1. 지은의 집. 거실 (낮)    

체리색 창틀과 격자무늬 불투명 시트지가 붙은 거실 창문은 오랜 세월이 느껴진다.

창 옆으로 1인용 좌식소파와 테이블, 맞은편엔 소형 TV가 놓여있다.

벽면에는 종이를 잘라 만든 선인장, 유니콘, 여자 뒷모습이 담긴 액자가 나란히 걸려있다.

그 위로 키보드 치는 소리 주기적으로 들린다.


2. 동. 부엌 (낮)    

싱크대 옆 식기건조대에 밥공기, 종지, 수저세트가 하나씩 널려있다.

그 옆 선반엔 커피가 반쯤 찬 커피메이커와 유리컵 서너 개가 걸린 컵걸이가 있다.

부엌 쪽창문은 꽃덤불 모양을 새긴 종이로 가려놓아, 잘린 종이 사이로 햇빛이 겨우 든다.

계속해서 들리는 키보드 치는 소리.     


3. 동. 침실 (낮)    

침실 중앙에 뚫린 창문을 중심으로 우측에는 침대, 좌측에는 책상이 놓여있다.

반바지, 헐렁한 티셔츠, 머리를 질끈 묶고 화장기 없는 얼굴을 한 지은.

오른쪽 귀에 이어폰을 꽂고 책상 앞에 앉아 컴퓨터 모니터를 응시한 채 키보드를 치고 있다.

책상 위에 놓인 두 개의 모니터 중, 왼쪽 모니터에는 영상이 플레이되고 있다. 영상 속에서는 한 남자가 바다를 배경으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오른쪽 모니터에는 남자의 인터뷰 내용이 담긴 한글 파일이 떠있다. 파일에는 ‘3800/해양생물학자 앤드류/해매다 봄이 되면 북극과 가까운 베링해에는 수만 마리의 고래가 몰려든다. 그곳을 가득 채우는 플랑크톤과 갑각류 때문이다.’라고 적혀있다.

이어서 ‘고래는 따뜻한 남태평양에서 새끼를 키우고, 새끼가 어느 정도 자라면 베링해로 이동한’이라고 글자가 입력된다. 그때 들리는 초인종 소리.  

고개만 살짝 돌려 현관 쪽을 의식하는 지은, 다시 키보드 두드리는 데 열중한다.

닫힌 창문에 아이보리 린넨 커튼이 드리워져있다.    


커튼 위로 타이틀 <종이 고래>        


4. 동. 현관 (낮)    

얼굴만 살짝 내밀 수 있을 정도로 현관문을 빼꼼히 여는 지은.

현관문 밖 바닥에는 전단지가 널려있고, 그 위에 택배상자 놓여있다.

손만 쭉 뻗어 택배상자를 들고 들어오는 지은.    


5. 동. 거실 (낮)    

택배상자를 열자 ‘페이퍼커팅 아트북: 미지의 꿈’이라는 책이 들어있다.

책장을 넘겨보던 지은의 손이 어느 페이지에서 멈춘다. 펼쳐진 페이지를 유심히 바라보는 지은.

검은 혹등고래 도안이 담긴 페이지다.    


CUT TO    

페이퍼커팅 칼의 칼날이 선을 따라가며 종이를 매끄럽게 자른다. 계속되는 능숙한 칼질에 잘려나가는 종이.

칼질에 집중하던 지은이 뻐근한 듯 잠시 고개를 젖히자, 테이블에 놓인 물건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페이퍼커팅용 고무매트, 그 위에 고정된 혹등고래 도안, 가위, 자, 마스킹테이프 등이다.

거실 창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햇빛을 받으며 다시 칼질을 이어가는 지은.    


6. 동. 침실 (낮)    

등에 실이 꿰어진 종이 고래가 열린 창문틀에 걸린다.

바람에 종이 고래가 흔들리고, 그 위로 고래가 바다를 헤엄치는 소리-

매달린 종이 고래를 올려다보며 만족스러운 듯 살짝 입꼬리를 올리는 지은. 창틀에 기대서서 창밖을 둘러본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오래된 빌라촌 골목.

진한 화장에 짧은 치마를 입고 하이힐을 신은 여자가 맞은편 빌라에서 나와 유유히 골목을 빠져나간다.

지은의 시선이 여자를 쫓는다. 그 위로-    


지은(N)   예쁜 외모의 범고래는 사람들에겐

                친근하지만 사실 바다의 포식자입니다.

                범고래는 태평양을 건너느라 지친

                새끼 고래를 공격하고,

                이로 인해 새끼 고래 50퍼센트가

                죽음을 맞습니다.     


빌라촌 길가에는 이팝나무 흰 꽃들이 피어있다.

나무 기둥에는 ‘조망권 침해하는 초고층 아파트 건설 반대’ 현수막이 걸려있다.

이 광경을 무표정하게 훑어보던 지은의 시선이 맞은편 빌라 창문에서 멈춘다. 그 위로-    


지은(N)   그런데 가끔 베링해에선 놀라운 광경이

                펼쳐집니다. 바다의 수호자라 불리는

                혹등고래가 자신의 새끼도 아닌,

                다른 고래들을 지키기 위해

                범고래와 싸움을 벌이는..

               (아이 창문에 시선 멈추면 내레이션 OUT)    


다섯 살쯤 돼 보이는 남자아이가 창문에 입김을 불어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다.

그림이 사라지자 다시 입김을 불어 그림 그리기를 반복하는 아이.

결국 사라지는 그림에 실망한 듯 입을 비죽 내밀고 밖을 내다본다. 그때, 아이와 지은의 눈이 마주친다.

미동 없는 표정으로 선 지은과 달리, 아이는 동그란 눈을 하고 지은을 보다가 눈을 반달로 만들며 웃는다. 그리고 인사하듯 손을 흔들어댄다.

잠시 지켜보다가 곧 커튼을 치고 안으로 들어가버리는 지은.

아이보리 린넨 커튼 위로 검은 종이 고래가 흔들거린다.    


7. 동. 부엌 (밤)    

냉장고 안에는 우유, 달걀 서너 개, 봉지김치, 생수 몇 통이 들어있다.

지은은 달걀을 꺼내려다 관두고 김치만 집어든다.

이번엔 냉동실을 열자, 위칸에는 냉동볶음밥이 빼곡히 차있고, 아랫칸에는 음식물쓰레기봉투가 대여섯 개쯤 얼려있다. 냉동볶음밥 하나를 꺼내는 지은.    


8. 동. 거실 (밤)    

테이블에 앉아 TV를 보며 밥을 먹고 있는 지은.

시선은 TV에 고정한 채 밥을 떠 넣고 있는데 그때, 휴대폰 진동이 울린다.

휴대폰 화면에 뜬 ‘김우석PD’ 전화. TV 소리를 줄이며 전화를 집어드는 지은.


지은   여보세요. 네, 피디님..

           작업 전에 영상 쭉 봤는데, 이상 없어요..

           네, 모레 말씀하신 시간까지 보낼 수 있어요.

           네, 꼭 맞춰서 보낼게요.. 네.. (전화 끊는)

    

휴대폰 내려놓으며 깊게 한숨을 내쉬는 지은.

테이블에 놓인 물컵을 드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컵에 금이 가있다. 컵 안에 든 물 표면이 미세하게 떨린다.    


9. 동. 침실 (낮)    

책상 앞에 앉아 키보드를 치고 있는 지은.

잠시 타이핑을 멈추고 고개를 갸웃하더니, 빼두었던 왼쪽 이어폰을 꽂는다.

영상을 뒤로 돌려보는 지은, 또다시 고개를 갸웃거린다.

모니터 영상 속 남자, 거센 바람을 맞으며 배 위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미간을 찌푸리며 양쪽 이어폰을 꾹 눌러보는 지은.     


지은   (이어폰을 귀에서 빼며)

            most threat to whales..?    


그때, 짧은 휴대폰 진동이 울린다. 휴대폰 보면-     


‘김우석 PD

지은씨 잘되고있지?

자꾸 닦달해서 미안한데 이거 기한 못맞추면 진짜 일나거든.

내일오전 11시까지! 늦으면 안돼 절대! 부탁!’    


지은, 살짝 피곤한 표정으로 문자를 짧게 입력하고, 책상에 휴대폰을 던지듯 내려놓는다.

이어폰을 끼우려는 순간, 다시 울리는 휴대폰 진동. 무시하고 이어폰을 꽂는데, 또 한 번 진동이 울린다.

인상을 쓰며 휴대폰 화면을 확인하는 지은.

짜증스러운 지은의 표정이 천천히 굳는다.

 

10. 동. 침실 (낮)    

책상 서랍이 열리자 그 안에 건전지, 볼펜, 일회용 라이터 등 잡다한 물품들이 어지럽게 섞여있다.

서랍 속 물건들을 뒤적여 일회용 라이터를 꺼내는 지은.    


11. 동. 옷방 (낮)    

구석에 쌓아놓은 박스와 몇 달치 되는 양의 휴지, 세제, 샴푸, 생수 꾸러미가 여기저기 놓여있다.

가구라고는 낮은 서랍장 하나와 담요로 덮어둔 행거뿐이다.

구석의 박스들 중 하나에서 핸드백을 찾아 뒤적이는 지은. 핸드백에서 담배와 명함 하나가 나온다.

명함에는 ‘푸른상담센터 / 상담전문가 임민영 / 가정폭력 · 데이트폭력 · 가족상담 · 에니어그램’ 이라고 적혀있다.

명함을 다시 핸드백에 넣다 말고 안을 유심히 들여다보는 지은.

핸드백 깊숙이 넣었다 뺀 지은의 손가락 사이에 목걸이가 걸려있다.

목걸이 끝 작은 십자가 펜던트가 달랑거린다.    


12. 동. 침실 (낮)    

창틀에 기대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지은.

티셔츠 안쪽으로 이전 씬의 목걸이를 하고 있다.

휴대폰 화면을 켜자, 문자메시지 나타난다. 발신자 ‘아빠’.    


‘노인네 오늘 새벽에 갔다.

손녀 얼굴 보고싶다고 노래를 하더니만....’

‘남자놈 잘못 만난게 뭔유세라고.... 평생 틀어박혀살래?’     


지은은 휴대폰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담배를 깊게 빨아들인다.

창밖으로 뿜은 담배연기를 바라보는 지은.

연기가 흩어지자 아이 집 창문이 보인다. 창문에는 흰 종이들이 덕지덕지 붙어있다.

더 자세히 보려는 듯 눈을 가늘게 뜨는 지은.

그때, 아이가 창문을 향해 걸어온다.

창틀에 둔 캔에 담배를 비벼 끄고 안으로 들어가는 지은. 캔에서 미세한 연기가 피어오른다.

그 너머 보이는 아이 집 창문,

또 다른 종이를 붙이려고 애쓰는 아이 왼손에는 붕대가 감겨있다.   

 

13. 동. 침실 (밤)    

컴퓨터 모니터에서 나오는 불빛만이 어두운 방안을 밝히고 있다.

모니터 속 영상에서는 새끼 혹등고래가 어미 혹등고래 주변을 헤엄치다가 다가와 몸을 비빈다. 그리고 마치 귓속말을 하듯 얼굴을 가까이 대고 작은 소리를 낸다. 그 위로-    


지은(N)   굉음을 내는 것으로 알려진 혹등고래.

                 하지만 새끼 혹등고래는 범고래나

                 수컷 혹등고래의 접근을 막기 위해

                 속삭이는 방식으로 대화합니다.  

                 자신은 물론 엄마를 지키기 위한

                 독특하고 친밀한 소통법인 거죠.

                 물론 어미 고래의 모성애도 대단..

 

그때, 날카로운 여자의 고함 소리 들린다.

흠칫 놀라 열린 창문 쪽을 바라보는 지은.

휴대폰 화면 켜보니 12시 47분이다.

지은, 창밖을 내다보는데 골목에 사람은 없고, 불 켜진 아이 집 보인다.    

창문을 등지고 선 아이. 그런 아이를 향해 빗자루, 맥주캔, 쓰레기통 등이 날아든다. 이어 아이 엄마가 비틀거리며 다가와 아이 뒷덜미를 잡는다.

상황을 쫓는 지은의 눈동자. 숨소리가 가빠지고, 손이 떨린다. 눈을 크게 뜨고 두리번거리는 지은. 시선이 아이 옆집에 가 닿는다.

옆집 남자는 창문 앞 책상에 앉아 노트북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다. 아이 집에서 큰소리가 날 때마다 키보드 치던 손을 멈추길 두어 번. 양손으로 머리를 쥐어 싸매더니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간다.

이를 지켜보다가 책상 위에 놓인 휴대폰을 낚아채듯 손에 쥐고 다시 창문 앞에 선 지은.

그 사이, 아이 집 창문엔 커튼이 처져있다.


14. 아이의 집. 현관문 밖 (밤)    

노란 포스트잇 한 장이 아이 집 현관문 밖에 붙어있다. 포스트잇에 이렇게 쓰여 있다.

‘이 건물에 그쪽 혼자 삽니까? 조용히 좀 합시다!!!’

  

15. 지은의 집. 침실 (밤)    

침대 위에 몸을 웅크리고 누운 지은. 고통스러운 듯 얼굴이 점점 일그러진다.

   

- 인서트 / 범고래에게 물리는 새끼 고래. 고통스러운 고래의 울음소리 들린다.  

  

지은의 침실.

배를 감싸 안고, 식은땀에 젖은 얼굴을 침대에 파묻는 지은.    


- 인서트 / 포경선에서 던진 작살에 맞는 고래, 빨갛게 물드는 바다.    


지은의 침실.

창문으로 새어들어오는 가로등 불빛을 받아, 종이 고래 그림자가 벽에 새겨진다.    


16. 동. 침실 (낮)    

지은 집 창문을 통해 아이 집 창문 보인다.

창 여기저기에 붙은 예닐곱 개의 하얀 종이들.

지은은 창가에 서서 아이 집 창문에 붙은 종이들을 살펴보고 있다.

익숙한 모양새에 고개를 들어 자신의 창틀에 붙은 종이 고래를 바라보는 지은.

시선이 다시 아이 집 창문을 향한다.     


지은   (나지막이) 고래..    


그때, 아이 집 창문에서 아이가 빼꼼 얼굴을 내민다.

지은은 그 모습에 순간 얼어붙었다가 천천히 안도의 숨을 내뱉는다.

아이는 반달눈을 하더니 지은을 향해 손을 흔든다.

머뭇거리는 지은과 달리 계속 손을 흔드는 아이.

지은이 무언가 결심한 듯 침실을 나서 현관으로 향한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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