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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유미 Mar 19. 2020

노 게임, 노 게인 (上)

나는 게임을 하지 않는다. 부루마블 같은 보드게임은 물론이고 스타크래프트 같은 전술게임과 카트라이더, 테트리스, 윷놀이, 고스톱, 카드게임, 바둑, 오목 등등등 종류를 막론하고 아무튼간에 살면서 게임을 해본 적이 거의 없다. 어릴 때 몇 번 동생과 함께 해본 적이 있지만 금세 흥미를 잃었다. 일단 잘하지 못하는 일에는 쉽게 흥미를 잃는 성향인 데다가 경쟁에 관심이 없어서인 것 같다. (사실은 아직도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다. 다만 게임을 할 때마다 쉽게 이겼던 경험이 축적되었다면 게임을 좋아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중학교 1학년 즈음인가 친구들 사이에서 스타크래프트(이하 ‘스타’)가 유행이었다. 남자 애들은 스타를 하지 않으면 교우관계를 유지하기가 힘들 정도였고, 여자 애들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잘 나가는’ 여자 애들은 스타도 잘 알았다. 잘 나가는 여자 애들은 남자 애들이랑 자연스레 어울리는 방법을 잘 알았다. 못 나가는 아이인 데다가 게임에 별 관심이 없었던 나는 자연히 스타에도 관심이 없었다. 잘 나가는 여자 아이들의 일과보다는 못 나가는 여자 아이들의 일과가 조금 더 편안해 보이기도 했다. 일단 교실 뒤에서 쉬는 시간마다 말뚝박기를 하느라 시끄러운 남자애들 중에서 한 명을 골라 사귀어야 잘 나갈 수가 있다는 게 정설이었기 때문에 그대로 영영 못 나가는 여자애로 남고 싶었다. 그때는 대체 남자 친구를 왜 만들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나이였다. 게다가 서로가 서로의 궁둥이에 얼굴을 박은 채 괴성을 지르던 시끄러운 애들 중 한 명과 사귀어야 한다니, 연애가 뭔지는 몰랐지만 나중에 후회할 거라는 건 알았다. 그렇게 나는 못 나가는 여자애로 남고자 유행의 물결과는 상관없이 스타와 담을 쌓고 지냈다.


그런데 하필이면 친구 지나(가명)는 잘 나가고 싶어 했다. 너는 왜 잘 나가고 싶다는 건데,라고 따질 수는 없었다. 잘 나가는 애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게 당연했다. 사실은 잘 나가든 못 나가든 상관이 없고, 잘 나가는 애들이 부럽지도 않으면서 모두들 부지런히 ‘잘 나가고 싶은 척’을 하느라 바빴다. 못 나가는 애가 되는 건 상관없었지만, ‘언제든 잘 나갈 수 있는 애’ 정도로는 보여야 했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 순간 조롱과 멸시, 따돌림의 대상이 되는 건 한순간이었다. 그러니까 지나는 옳았고, 나는 지나의 ‘절친’이니까 당연히 지나와 함께 잘 나가고 싶은 여자 애들이 하던 노력에 동참해야 했다.


우리는 스타를 배우기 시작했다. 나의 스타 스승은 남동생이었다. 나와는 달리 아주 어릴 때부터 게임이란 게임은 다 좋아했던 동생은 비교적 어린 나이 때부터 스타를 시작했다. (한때 프로게이머가 되고 싶다며 프로게이머의 훈련 시간만큼 게임을 하던 근성을 보이기도 했다. 근성과 중독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오가던 동생의 호시절은 ‘컴퓨터 사용 금지’라는 명령이 떨어지면서 끝이 났다.) 사람은 역시 좋아하는 일을 해야 능률이 오른다는 걸 동생의 게임 실력을 보면서 깨달았다. 반면 사람은 역시 싫어하는 걸 억지로 할 때는 좋은 성과를 내기는 힘들다는 사실을 내 게임 실력을 통해 알게 되었다. 동생은 여전히 어설픈 내가 귀찮았던 건지 어느 날 그냥 치트키를 알려주는 게 낫겠다고 말했다.


마법의 주문 하나면 곧장 게임에서 이길 수 있다니! 참 편리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렇다면 왜 모두들 이길 수 있는데도 치트키를 쓰지 않고 게임을 하는지 궁금했다. 문장 하나만 입력하면 이 게임에서 내가 이길 수 있는데, 왜 모두들 그걸 알면서도 하지 않는 거지? 사람들은 매번 질 수도 있는 싸움을 새롭게 시작하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전술을 통해 판도를 뒤집을 방법이 없나 고민하고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마우스를 죽어라 클릭하며 게임 속 전쟁을 지휘했다. 나는 동생에게 배운 치트키를 넣어 게임을 이긴 후 알았다.


아, 결과를 알면 재미가 없구나.

사람들이 질 수도 있는 게임을 매일같이 반복하는 이유는 당연히 게임을 하는 과정이 짜릿하고, 재미있는 데다가 승패를 예측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오는 쫄깃함이 있기 때문이었다. 열넷의 나는 그 단순한 메커니즘을 이해하기까지 참으로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하나 더, 좋아하지 않는 일은 아무리 계속해보려 해도 한계가 있다는 것까지도 받아들이게 되었다. 나는 여전히 지나를 좋아했고 고등학교까지 같이 가고 싶은 절친이었지만 게임까지 같이 할 수는 없었다. 이제 관건은 어떻게 하면 지나에게 “나도 잘 나가고 싶지만, 스타는 안 할래.”를 잘 말할 것인가였다. 곤란한 말을 돌려 말하는 재주가 턱없이 부족하던 나는 지나에게 며칠 동안 이실직고하지 못하고 고민만 했다. 잘 나가는 지나한테 걸림돌이 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나 주승원(가명)이랑 사귀기로 했다?”

어느 날 하굣길에 지나는 뜬금없이 폴짝 뛰면서 충격 고백을 했다. 지나도 남자 친구가 생겼다는 게 충격이기도 했지만, 지나와 사귀기로 했다는 남자애가 게임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얼굴이 하얀 모범생이었기 때문에 나는 더 충격을 받았다. 그간 잘 나가는 애가 되기 위해 했던 노력과는 별개로 지나는 그렇게 잘 생긴 모범생 남자 친구가 생겼고, 자연히 우리는 스타를 배울 필요가 없어졌다. 지나가 우리 반에서 제일 잘 생긴 남자애랑 사귀면서 스타 없이도 잘 나가는 애가 되었기 때문이다. 지나의 갑작스러운 연애 소식이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주승원한테 고맙기도 했다. 첫 연애에 들뜬 지나는 스타 따위는 까맣게 잊고 살았다. 나 역시 덩달아 게임을 배우던 수고스러운 일을 그만둘 수 있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주승원에 대한 나의 호감은 분노로 바뀌었다. 2학년 누나랑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다는 사실이 발각되어 지나와 헤어졌기 때문이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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