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백한 여자는
문을 열고 나오려다가
문 앞에 재이가 서 있는 것을 보고 멈칫했다
재이는 문고리에서 걷어 낸
검은 봉투를 들고 머뭇거렸다
아니 그게 제가 문을 열려던 건 아닌데-
라는 말을 할 수도 없고 하지 않을 수도 없고.
찰나의 순간이 5년처럼 흐르고 있던 그때
드르르륵 전투기 소리가 들렸다
이내 커다랗고 새빨간 캐리어를 끌고 한 여자가
고시원 안으로 들어섰다
"이모님 안녕하세요!"
재이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
재이는 이모님이라는 호칭이 당황스러웠지만
손에 들고 있는 밀대와 검은 봉투를 움켜쥐며
그녀의 호칭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휴 여기 역에서 왜 이렇게 멀어요?"
고요한 고시원에 빨간 캐리어의 목소리가 가득 찼다
"203호가 어디예요 이모님"
빨간 캐리어는 동그랗고 무해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그러나 재이는 고시원에 대해서
청소도구의 위치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멍하니 서 있는 재이와 창백한 여자를 지나
"203, 204.. 어 여기네."
빨간 캐리어는 빠르게 방의 번호를 훑으며
203호를 찾아냈다
창백한 여자가 문을 닫고 들어서려는 찰나
빨간 캐리어가 말했다
"어? 반가워요 옆방이에요 우리."
발랄한 인사가 무채색 고시원 복도를
어색하게 채웠다
암묵적인 룰 같은 것을 모르는 사람인가
재이는 창백한 여자의 눈치를 살폈다
처음 고시원에 들어설 때
어느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암묵적인 룰 같은 것이 있었다
서로 스치지 않은 듯 스칠 것.
그래 말 그대로 암묵적인 거니까.
모를 수 있다
눈치가 빨라 늘 힘들었던 재이는
빨간 캐리어 같은 캐릭터를 만나면
놀라우면서 일면 부러웠다
재이는
창백한 여자와 빨강 캐리어 사이에 서서
밀대를 밀기 시작했다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건넨
창백한 여자도 본인의 자리로 돌아가려고 했다
"잘됐다 안 그래도 이거 많아서 어쩌나 했는데
같이 먹을래요"
빨간 캐리어는 쇼핑백을 흔들며 물었다
이 여자 지금 그럴 상황 아니에요 ,
재이는 창백한 여자의 흐느낌을 떠올렸다
빨간 캐리어에게 눈치를 주고 싶었다
그때 창백한 여자가 말했다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