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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주 Dec 17. 2024

삶과 죽음의 경계, 안나푸르나

"트래킹을 하면 이곳에서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낭떠러지 같은 곳을 걷기도 한다."




우리가 아마 마지막 높은 곳, 무려 5416m가 되는 Thorong la를 앞두고 있을 즈음이다. 그 전전날, 우리는 굉장히 늦게 숙소를 찾기 시작했고, 많은 숙소를 거닐다 끝끝내 찾은 곳은 외국인들이 주로 머무는 방이 아니라며, 그래도 도미토리 룸을 찾을 수 있었다. 따뜻한 물이 있어도 야외 샤워실이었던지라 몸에서는 김이 난다. 겨우 밥을 먹으러 난로 주위에 앉았다. 나는 아름답고 해맑게 미소를 짓는 프랑스에서 왔다는 여성을 만났다.


그녀의 눈은 마치 꿈을 꾸고 있는 듯, 반짝이고 있어 마치 순수한 어린아이의 것과도 닮았다. 그런 그녀가 왜 이곳에 왔는지, 너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트래킹을 하면서 서로 자주 하는 질문들을 던지며 그녀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렇게도 힘들게 올라가는 산속에서 만나는 사람들 하나하나가 나는 보통 인연이 아니라 생각한다. 트래킹을 하는 과정 속에서 수없이 지나쳐가도 결국에는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적은 숙소의 선택지 속에서 언제 가는 다시 마주칠 것이 뻔하다. 비슷한 속도로 가니까 우리는 이미 만난 것이다. 그래서 다시 만날 사람은 또 만난다. 그 인연은 소중하기도 하면서, 거짓 없이 진실된다. 산 위에서 만났기 때문에 자연 아래 우리는 속일 수 없다. 속마음을 아쉬움 없이 말하는 분위기가 우리 몸속에 자연스레 형성된다.



그녀는 캄보디아에서 NGO로 일을 하며 몇 년을 살았다 한다. 이후 그는 한 캄보디아 남성과 사랑에 빠졌고, 아이를 낳았다 한다. 영화처럼 말이다. 마음 가는 대로 사랑을 누렸다. 그 아이는 지금 프랑스에 있고 그녀의 딸 이름 rose 문양이 보이면 그녀를 그리워한다 했다. 그녀의 남자친구와 잠시 떨어져 있고, 그녀는 꿈에서 계속 보던 산의 모습에 이끌려 이곳 안나푸르나에 왔다 한다.

당연히 그 남자친구는 캄보디아 사람이라 당연 짐작했다. 하지만 그의 연인은 1년 전, 피치 못한 병으로 인해 죽음을 맞이했다. 나와 비슷한 연령대로 자신의 연인을 최근에 잃은 사람을 처음 만났다. 젊고, 자유로운 영혼의 아름다운 사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 고통을 이겨내고 행복하다 했다. 그런데 내 마음속에 불편한 생각들이 들었다. 그녀의 이야기는 놀랍고 눈부셨지만, 어떤 부분에서 불편했다.

왜 사람들은 자신의 이야기만 하는가, 나는 진정 이 이야기를 들을 정도로 마음이 넓고 깊은가. 불평하는 나 스스로에게 놀랐다. 아니면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나눌 수. 있는 나만의 이야기가 없어, 괴로웠던 것이 아닌가.


나의 불편함을 장에게 이야기하는데,  그는 나에게 말했다.


“그녀의 손목을 못 봤어? 끔찍한 순간들이었을 거야.”


자살기도로 짐작할 수 있는 상처들을 말이다. 나도 모르게 그녀의 행복함을 평가했다. 선입견과 편견으로 한 번 바라보면, 상대방의 눈을 뚫어져라 보기 힘들다. 대가는 죄책감이란 말이다.



다음날, 토롱라를 앞두고 나는 잠시 떨어져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푸닛보다 조금 더 올라간 후 그곳에서 잠을 자기로, 지친 그는 아래쪽 숙소에서 지내기로 했다. 둘 다 원하는 대로 선택한 순간이었다. 다음날 올라가서 만날 것으로 기약했다. 이것이 그와의 마지막 트래킹이 될 줄은 전혀 몰랐다.


다른 하숙집 친구, 이반이 메시지를 보냈다. '우리 이웃의 눈물을 본다'는 맥락이었는데, 그의 영어는 정말 유창한 것이 아닌지라, 그의 문장을 우리(이웃이었기 때문에)가 다시 만나게 되면 눈물을 흘린다로 이해했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과도 같았다. 이전 ABC트래킹을 했을 적에는, 가방 끈에 눈을 다쳐 나는 정상까지 거의 한 눈만에 의지한 채 올랐다. 장의 눈이 공기 부족인지 보였다가 안보였다가 했다. 거의 5분을 간격으로 왔다 갔다 했고, 가는 길 내내 나는 그의 손을 부여잡고 마음을 다잡았다. 다행히 그의 시력은 내려가는 순간부터 좋아지기 시작했고, 여전히 미스터리인 채로 우리는 토롱라를 넘어왔다. 겨우내 점심 즈음, 와이파이가 잡혀 메시지를 푸닛에게 보냈다. 가는 길 동안 우리는 그의 행방이 궁금했지만 원래 우리보다 빠른 그의 발걸음이라 내려가면 보겠지 싶었다. 그는 집에 큰일이 생겨 인도로 돌아갔다고 한다. 이반이 본 것은 푸닛의 눈물이었고, 이반이 올라오는 동안 푸닛은 급하게 지프차를 타고 돌아갈 수 있는 곳으로 내려갔던 중 만난 것이다.


포카라에 오고 나서도 우리는 그와 연락을 하자, 서로 잡은 시간이 어긋났고 영상통화를 하기란 꽤나 시간이 걸렸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그의 아버지가 사고가 생겼다는 이야기였다. 겨우 서로가 알맞은 시간에 통화를 할 수 있었다.


그가 산 위에서 연락을 받았을 당시, 이미 그의 아버지는 감전사로 돌아가셨다. 왜 하필 그는 이 소식을 그가 산 중턱에 있을 때 받았을까. 그는 여행자의 삶을 살고 있었지만, 다시 가족으로 돌아갔다. 안나푸르나에서 1년 전 사랑하는 연인을 잃은 프랑스 여인, 그리고 푸닛은 아버지를 잃었다.


힌두교에서 나오는 가르침처럼 그는 우리에게 말했다. 죽음이 끝이 아님을, 죽음은 공포가 아님을. 하지만 그는 힘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삶을 다시 이어가려 한다. 당분간 여행 계획은 접어두고, 가족과 함께 보낼 때임을 그는 삶의 순간으로 받아들였다 한다.


왜 하필 그와 잠시 떨어져 있던 그날 일어난 건가. 우리의 삶이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 푸닛과는 인도에서 다시 만날 예정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 삶과 죽음을 배운다.



트래킹을 하면 이곳에서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낭떠러지 같은 곳을 걷기도 한다. 틸리 초를 가는 길이었다. 연세가 80이 넘으신 독일 할머니, 할아버지를 뵈었다. 그분들 자체가 아름다운 예술의 경지였다. 내가 한국에서 왔다 하니, 북한과 남한이 독일이 그랬던 것처럼 통일이 되었으면 좋겠다 하셨다. 산 역사를 고증하시는 분의 말 한마디는 무게가 있다. 그분들이 나에게 간곡히 전달하신 것은 평화의 메시지였다. 우리는 어찌도 무엇을 그렇게 잃을까 두려워 입을 닫고 있는가. 그분들 지나가시고나서 어떤 여행자가 말했다.


틸리초, Tilicho Lake, 4919m

죽어도 행복한 곳이 이곳이 아닐까.


우리는 그저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으면서 마치 이것이 평생 있을 것이라는 환상 속에 살며, 죽음을 공포로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이다.



사진 출처 Jean Batany

(인스타그램 @jeanbatany)

장의 사랑의 시선이 담긴 사진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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