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브런치북 플랜B 05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호호동호 Sep 20. 2022

말벌 집 앞에서 눈을 뜨다. 다행히.

양봉일기_말벌 잡다 벌통 깨 먹은 이야기

말벌집 앞에 선 나는 내 얼굴이 벌게진 것을 느꼈다. 그것은 분명 고통받는 꿀벌들로 인한 분노. 혹은 무알콜 맥주임에도 제조 공정상 불가피하게 함유되는 0.03% 알코올 탓이다. 하지만 말벌 침이 아프다는 걸 잊지는 않았다. 정말 아프다. 산간마을에서는 멧돼지 피해를 막기 위해 밭에 전기 울타리를 둘러친다. 수만 볼트 전기 울타리는 멧돼지마저 돌아서게 만든다. 의도적이든 비의도적이든 재수가 없는 사람도 걸려드는데 그 경험을 말벌에 비유했다. 머리가 띵했지만 나는 말벌집으로부터 안전거리를 유지했다. 솔직히 무서워서 말벌집 입구를 쳐다보지도 못하겠다.


말벌들이 쉬지 않고 날아다녔다. 말벌의 날갯짓 소리는 웅장했다. ‘부앙-’ 멀리서부터 뒤통수를 향해 크레셴도(점점 강하게) 벌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는 나를 향해 커졌다. 들켰구나. ’기습이다.' 몸을 웅크렸다. 애초 나와 상관없던 말벌은 아랑곳하지 않고 지나갔다. 역시 무섭다.
 

‘슈퍼 호넷(말벌)’은 영화 <탑건, 매버릭>에서 톰 크루즈가 타던 전투기 F-18의 이름이다. 인간 기술의 집대성인 비행기 이름이 곤충으로 이름 지었다니. 말벌이 그 정도 위상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전투기 슈퍼 호넷의 힘은 짧은 이륙거리에서 나온다. 항공모함의 역사도 전투기 호넷이 개발된 후로 새로 쓰였다. 사람들은 항공모함을 ‘벌집’이라 부른다. 


가까이서 본 말벌은 실로 호넷honet다웠다. 조금의 도움닫기 없이 집을 나서자마자 수직 이륙을 했다. 이때를 기다려 공격하려던 내가 어떤 판단을 하기도 전에 멀리 날아가버렸다. 돌아오는 호넷을 격추하는 것은 더더욱 어려웠다. 하필 말벌 중에서도 가장 흉폭하고 공격적인 장수말벌이었다. 주황색 머리에 매서운 눈. 강한 날개와 단단한 다리. 이렇게 대놓고 집을 짓는 기백은 장수말벌이다.
 

짧은 꿈이었다. 정신 차리고 보니, 한 손엔 캔 맥주를, 다른 손엔 배드민턴 라켓을 들고 있는 취객이 땡볕 아래 서있었다. 라켓은 그마저도 줄이 많이 끊어져 빈 공간이 많았다. 그렇다. 여기선 내가 분리하다.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운 좋게 한 마리를 잡는다 쳐도 떼거지로 쫓아올 후발대에 대한 대책이 없었다.


쓴 침을 삼키며, 다시 꿀벌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부앙-.' 멀리서도 들리는 이소리. 블랙 호넷(흑등 말벌) 한 마리가 벌통을 배회하고 있었다. 호시탐탐 꿀벌을 채갈 기회를 엿보기 시작했다. 벌통 뒤로 옆으로 왔다 갔다 하며 적당한 시기를 노리는 게 보였다. 천진난만한 꿀벌들은 그것도 모르고 꽃가루를 옮기고 있었다. 새로 태어난 애벌레 동생들을 먹이기 위해 모아 온 꽃가루가 뒷발 양쪽에 가득했다. 블랙 호넷이 목표를 정한 것 같았다. 나도 달렸.. 아니, 날았다. 무알코올이라고 쓰여있지만 내 전두엽을 마비시킨 무알코올과 항공모함 앞에서 돌아서야 했던 무력함을 담아 배드민턴 채를 휘둘렀다. 퍽! 


라켓이 벌통에 명중했다. 벌통 귀탱이가 날아갔다.

이전 04화 캔맥주를 마시며 검을 쥐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