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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플랜B 0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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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호동호 Sep 12. 2022

캔맥주를 마시며 검을 쥐었다

무알콜입니다만

솔직히 말벌이 무섭다. 이것들은 생긴 것도 무섭고, ‘육식’이라는 사실이 공포심을 더 증폭시킨다(따지고 보면 고기를 먹는 건 인간도 마찬가지지만 어쩐지 더 무섭다). 경험상 말벌은 뱀보다도 실체가 있는 공포를 주었다. 뱀은 위험하지만 웬만하면 사람을 피했다. 그러다 보니 뱀은 보통 뒤통수(?)만 보이지만 말벌은 빠르게 날며 내 주변을 맴돌았다. 특히 엄지손가락 만한 크기의 장수말벌은 무시무시하다. 곤충 대부분이 사람을 피하지만, 장수말벌은 인간 따위 아무렇지 않다는 듯 피하지 않는다. ‘싸움을 걸어온다면, 뭐 어쩔 수 없지.'라고 말하며 바로 달려든다. 이름 그대로 장군감이다. 


말벌보다는 조금 작은 쌍살벌의 칼침은 가끔 맞았다. 물론 그들이 싸움을 즐긴다거나 고통으로 기쁨을 느끼는 족속은 아니다. 내가 그들에게 위협을 줬기 때문에 나를 공격했다. 눈앞이 번쩍하면서 전기에 감전된 기분을 느낀다. 내 입장에선 억울한 때가 많았다. 수풀 속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집을 지어놓고 가까이 오면 공격을 하기 때문이다. 늦여름 예초기를 돌리다가 풀을 베다가 당하곤 한다. 이럴 땐 예초기를 던져버리고 도망가는 게 최선. 줄행랑치느라 낫을 잃어버린 적도 있다. 여러 번 겪다 보니 괜찮다는 걸 알게 됐지만, 처음엔 과민성 쇼크가 온다는 말에 겁이 났다. 병원으로 가는 길에 눈앞이 안 보이면 어쩌지. 앞이 안 보이는데 운전대를 잡고 있으면 보행자도 위험할 텐데. 보행자는 무슨 죄로 봉변을 당해야 하지. 


등검은말벌은 최근 한국에 들불처럼 번지고 있는 말벌이다. 아열대종이기에 한반도에서 겨울을 나지 못했다. 흑등파의 최대 천적은 추위였다. 이제는 다르다. 기후변화로 따듯해진 남한 전역에서 겨울을 난다. 토착 말벌들이 이루고 있던 균형이 깨졌다. 골고루 사냥하는 보통 말벌과 다르게 등검은 말벌은 꿀벌만을 먹이로 삼는다. 흑등 깡패는 우리 텃밭정원에 빈번히 찾아왔다. 꿀벌을 채갈 때면 꿀벌 비명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말벌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높다란 나무에 거꾸로 매달려 꿀벌을 손질했다. 영화 속 납치 장면 그대로였다.


이 깡패 놈들 어디서 소문 듣고 이렇게 떼거지로 오는 거야. 땀을 뚝뚝 흘리며 검을 휘둘렀다. 하얀 이슬이 내린다는 백로가 지났지만 아직 한낮은 더웠다. 전세가 내쪽으로 기우는 듯했다. 하지만 더 이상은 쓰러질 것 같았다. 집으로 돌아와 무알콜 맥주를 한 캔 땄다. 크으- 이 맛에 맥주를 마시는구나. 정신이 들자 벌통이 오기 전부터 눈여겨보아 왔던 말벌집이 생각났다. 벌 없이 살 땐 말벌과 공존(이라기보다는 외면)이 가능했다. 이제 꿀벌 식구들이 있으니 공존(외면)은 불가능했다. 반쯤 남은 무알콜 맥주를 들고 스멀스멀 말벌집으로 갔다. 가을볕으로 인한 탈수와 무리한 검객 활동은 무알콜에도 취기를 부여했다. 


취기는 말벌이 조금 조그맣게 보이는 효과를 주었다. 엄지손가락 만해 보이던 녀석들이 이제 보니 새끼손가락 만했다. 이만하면 해볼 만하다. 이 녀석들은 지난겨울 베어낸 나무를 쌓아둔 무더기 아래 집을 지었다. 말벌이나 쌍살벌이 주변에 자리를 잡으면 텃밭의 해충들, 애벌레 등을 잡아먹는다 하여 내버려 두었다. 나와 동선만 겹치지 않으면 괜찮았다. 하지만 이제 우리 텃밭 모든 곳이 꿀벌의 비행로였다.


말벌들은 뭐가 그리 신났는지 쉴 새 없이 집을 드나들었다. 검(배드민턴 채) 손잡이를 꼬나잡았다. 성큼성큼 그 앞으로 향했다. 나와라 인마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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