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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플랜B 2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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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호동호 Sep 13. 2023

말벌 옆에 말벌

(키보드) 워리어 출동...

장수말벌을 잡아다 끈끈이 트랩에 붙여야 했다. 잠자리채로 한 마리 한 마리. 침착하고 싶지만 장수(말벌)는 너무 무섭게 생겼다. 잠자리채를 땅에 놓고 망 속에 집게를 넣어 말벌을 잡으려 했다. 장수는 끝 모를 함정 속에 한줄기 은빛 광채를 발견한 듯, 스테인리스 집게를 따라 세상으로 기어 나오려 했다. 집게를 따라가다 보면 자유가 있고, 속박의 원인이 있었다. 장수는 잠자리채를 헤집으며 기어 나왔다. 집게 끝엔 내가 있었다. 내 손으로 말벌과 나 사이에 다리를 놓아준 셈이었다. 위기에 빠진 건 말벌인데, 정신이 아득해지는 건 나였다.


참지 못하고 발로 밟아버렸다. 장수를 산채로 잡아 끈끈이에 붙이고 싶었다. 장수만의 습성을 이용한 끈끈이 트랩을 만들 셈이었다. 위협에 빠진 동료를 도우러 오는 장수말벌의 습성 말이다. 되도록 건강한 채로 잡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하지만 건강한 장수를 잡는다는 것은 내가 생쥐 가슴이라는 걸 계산에 넣지 않은 계획이었다. 고양이에게 방울달기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우발적 사고였지만, 밟고 나서 생각하니, 그냥 밟는 게 상황 정리가 더 빠르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스스로 오랫동안 장수와 마주친다면 꼭 트랩을 만들어야지라고 입력해 두었다. 실제로 장수말벌이 나타났고, 나는 위기대응 매뉴얼을 작동했다. 하지만 그건 한 마리일 경우였다. 지금은 열댓 마리가 벌통을 습격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한 마리씩 일일이 집어 끈끈이에 붙일 시간이 없었다. 여러 벌통 중 가장 하나의 벌통만 노리고 있었다. 꿀벌들은 수염처럼 밖으로 나와 있었다. 일제히 경보 날갯짓을 하고 있었다. 전쟁터 가장 바깥쪽 장수부터 잡아나갔다.


장수말벌은 신발을 신고 밟는데도 무서웠다. 독침 길이가 6밀리미터. 모나미 볼펜 심보다 길다. 날개를 펴면 최대 7센티미터. 작은 악마를 마주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발에 밟히고 나서도 살아있었다. 심지어 장수말벌은 이제 기분이 나빠진 것 같다. 원래도 찡그린 상인 얼굴에 더 깊게 빡친게 보였고, 여유 있던 여섯 개 발도 재빨라졌다. 두 번 세 번 더 체중을 실어 밟았다. 장수는 여전히 화가 나있었다. 장수는 급기야 복수의 턱을 씹었다. 무지막지하게 커서 너무나 잘 보이는 좌우 턱을 부딪쳤다. 그 소리가 똑똑히 들렸다. 


"딱딱"


장수를 전부 잡았다. 잡고 보니 열두 마리였다. 상황이 종료됐지만 '웅-웅-'거리는 꿀벌들의 흥분은 가라앉지 않았다. 날갯짓은 밤까지 이어졌다. 벌통 아래 쌓인 수백 마리 사체를 보니 짠한 마음도 들었지만, 밤늦게 이어진 승리와 용맹함을 알리는 소리일 수 있겠다. 벌통 밑에는 꿀벌들이 만두처럼 덩어리 져있다. 헤집어보니 장수말벌 한 마리가 파묻혀 죽어있다. 꿀벌들이 공처럼 뭉쳐 장수말벌을 쪄 죽인다는 전술이었을까. 꿀벌은 장수말벌에 대항하기 위해 수백 마리가 말벌에 달라붙어 가슴 근육을 떤다고 한다. 한 마리씩 덤벼서는 상대가 안되기 때문인데, 섭씨 50도가 넘으면 죽는 장수말벌에 상대하는 방법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 방법은 토종벌만이 갖춘 능력이라고 했다. 서양종 꿀벌인 우리 집 벌이 그럴 수 있었을까? 그냥 화가 난 꿀벌들이 장수말벌에 눈덩이처럼 달라붙어 있었던 것은 아닐까? 모르겠다.


벌통 아래에 꿀벌 백여 마리 사체가 쌓여있었다. 다행히 봉장에 너무 늦지 않게 도착한 것 같다. 장수말벌 측 피해도 컸다. 그럼에도 장수말벌이 대단하긴 했다. 턱을 휘두르기만 해도 사상자가 나왔다. 그날 이후 나는 날아오르는 나비에도 뒷걸음을 쳤다. 고지라 같은 장수말벌을 보니 등검은말벌이 귀여워 보이기까지 했다. 


벌통 위에 그물을 쳤다. 새끼손가락 정도가 들어가는 촘촘한 망. 꿀벌은 지나다닐 수 있지만, 장수말벌이 침입하는 것을 막는 망이다. 꿀벌에게도 집으로 들어가는 하나의 관문이 생겼다. 어린아이들이 창문으로 기어오르듯, 꿀벌들은 얼굴을 들이밀고, 뒷다리를 버둥거리며 몸을 밀어 넣고서 지나갔다. 


다음날 아침, 웬일로 일찍 일어난 나는 집 앞에 나와 체조를 했다. 장수말벌이 다시 오진 않았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백로를 향해 가는 가을 아침은 이슬이 앉아있었다. 떠오르는 해를 보며 기지개를 켰다. 그 순간. 동쪽 언덕 꼭대기 위에 있는 높은 나무. 익숙한 실루엣이 비췄다. 태양만 한 벌집이 나무에 달려있었다. 지난달, 핸드볼만 한 등검은말벌집을 없애고 좋아했더랬지. 저렇게 큰 벌집이 뒷산에 있었다니. 떠오르는 태양이 벌집과 마주치는 순간 개기일식이 일었다. 


딱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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