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출을 다녀오니 벌통 앞에 꿀벌 사체가 쌓여있다. 수백 마리가 쌓여있고, 몸을 가누지 못하는 꿀벌이 다리를 허공에 젖고 있었다. 그만큼의 꿀벌이 땅에 흩어져 죽어있었다. 장수말벌이다. 겨우 하루 자리를 비운 사이 당했다. 고통과 분노가 관자놀이로 올라왔다. 전부 죽은 걸까? 벌통 입구에 불을 비춰보았다. 몇몇 꿀벌들이 바깥을 살펴보고 있다. 밖으론 나오지 못하고 속에 숨어서 쳐다보고 있는 것 같다. 벌들은 경보를 울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다행이다. 얼마가 남았는지 모르겠지만, 아주 끝나지는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가 된다.
장수말벌은 지난번 소탕 이후 한 동안 오지 않았다. 한 달 조금 안 됐을까. 이렇게 몰려온 것을 보니, 새로운 사냥꾼 중대가 태어난 것 같다. 다음날 아침 일찍 눈을 떠 벌통으로 갔다. 장수말벌이 역시 와있다. 다시 올 거라 예상했다. 사실 오길 바랐다. 감정 없이 먹고 먹히는 생태계지만, 복수가 하고 싶었다.
벌통에 그물이 덮여있다. 장수말벌이 자리를 잡지 못하도록 방지하는 그물이다. 그런데 장수말벌이 그물 속에 들어와 있었다.
장수말벌은 벌통 입구에 앉아 꿀벌들에게 싸움을 걸며 침략을 시작한다. 입구를 지키는 꿀벌은 적이 침입하면 경보를 울린다. 경보를 들은 서양벌은 벌통 바깥으로 나와 적과 싸운다. 작은 턱으로 적의 다리를 물고 침으로 찌르려 한다. 소용이 없다. 장수말벌의 갑옷은 정말 단단하다. 사람이 밟아도 웬만하면 끄떡없을 정도다. 싸움터가 꿀벌들의 홈그라운드이고, 아무리 머릿수가 많아도 꿀벌은 열 배나 체격 차이가 나는 장수말벌의 상대가 될 수 없다. 오래전부터 장수말벌과 지내온 토종벌은 장수말벌을 상대할 대응책을 익혔다. 토종벌 문지기들은 말벌이 오면 바깥으로 나가지 않고 말벌이 좁은 입구로 들어오길 기다린다. 넓은 장소가 아닌, 좁은 공간에서 상대한다. 들어오면 말벌을 덮쳐 공을 만든다.
말벌 방지용 그물은 꿀벌들 출입도 귀찮게 하지만 제 역할을 했다. 등검은말벌은 그물 속에 들어올 수는 있었지만, 사냥 속도를 늦추는 효과가 있었다. 그물 속에서 사냥에 성공해도 나갈 땐 사냥감을 놓고 나가야 했다. 병 속에서 주먹을 쥐면 손을 못 빼는 상황처럼. 결정적으로 장수말벌이 벌통 입구에 자리잡지 못하게 했다. 덩치가 큰 장수말벌은 그물에 어정쩡하게 걸터 앉아 한 마리 밖에 죽이지 못했다. 지난번 침략 때도 장수말벌 십수마리가 왔음에도 피해가 거의 없었던 것은 이런 덕분이다.
그물이 있었는데 어제는 어떻게 그 많은 꿀벌이 당했을까. 의문은 아침에 풀렸다. 보통보다 조그만 체구의 장수말벌이 그물을 비집고 들어가 벌통 앞에 앉아 있었다. 장수말벌 답지 못한 크기였다. 두 마리가 짝을 이루어 어제 끝내지 못한 오늘의 작업을 준비하고 있다. 말벌은 애벌레 시절 영양상태에 따라 크기가 달라진다고 했다. 작게 태어난 장수말벌이 방어막을 뚫는 역할을 했다니 짚신도 짝이 있고, 작게 태어나도 제 역할이 있었다.
나는 당장 형을 집행했다. 발로 밟아버렸다. 기특한 건 기특한 거고 죗값은 죗값이다. 하지만 껍질 단단한 장수말벌은 바로 죽지 않았다. 잠시 고민해 보았다. 산채로 끈끈이 트랩을 만들어, 동료들을 꾈까? 하지만 그걸로는 분이 풀리지 않을 것 같다. 휴일인 오늘, 벌통을 지키고 앉아 장수말벌을 잡기로 했다. 잡아서 닭장에 던져 꿀벌이 느꼈을 공포를 똑같이 느끼게 해 주어야겠다. 그럼 그렇지. 하루 내내 벌통으로 장수말벌이 계속 날아왔다. 벌통에 사냥터 표식이 되어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