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관식 신드롬'이 일깨우는 한국 남성의 이상과 현실
넷플릭스 시리즈 '폭싹 속았수다'의 양관식 캐릭터가 큰 반향을 일으켰다. 남성 시청자들에게 깊은 공감을 불러 '나만의 관식(My Own Gwansik)' 밈까지 만들어내고 있다. 한 여자만을 바라보는 순애보와 가족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모습이 가족의 의미가 점점 흐려지는 현대 사회에서 왜 이토록 강력한 메시지로 다가오는 걸까.
한국의 전통 사회에서 남성에게 부여된 역할은 상당 부분 가족에 대한 책임과 자기희생으로 요약된다. 유교문화의 영향 아래 아버지는 가장의 무게를 짊어지고,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며, 때로는 자신의 꿈이나 여가를 포기해서라도 자식을 뒷바라지하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졌다.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 남자다움이 오랫동안 이상적인 아버지상으로 자리 잡았고, 자녀 교육과 성공을 위해 본인은 그늘에 서는 모습이 미화되곤 했다.
예컨대 1988년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도 아버지 성동일 캐릭터는 딸에게 "아빠 꿈은 보라, 덕선이, 노을이 너희 셋 안 아프고 건강한 것, 그거 하나다"라고 말한다. 이는 자신의 꿈을 오로지 자녀의 안녕으로 삼는 아버지의 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사로 많은 시청자들의 심금을 울렸다.
물론 전통적 아버지들은 권위적이고 감정 표현이 서툰 경우도 많았다. 가장으로서 엄격한 가장(家長)의 모습을 보이느라 자상함을 드러내지 못하거나, 가정 내 의사결정에서 일방적인 모습으로 비춰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들의 속마음엔 늘 가족 우선의 원칙이 있었고,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며 뒷바라지하는 부성애를 실천해왔다. 양관식 캐릭터는 바로 이러한 한국적 부성애의 이상향을 체현한다.
양관식은 말 그대로 "가족에 대한 일편단심"을 보여준다. 첫사랑 애순만을 바라보며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함께 가정을 꾸렸고, 이후 생활고에 시달리면서도 우직한 소처럼 묵묵히 가장의 책임을 다한다. 그는 평생 가족의 행복을 자신의 행복보다 우선시하며 살았고, 결혼 후에는 자신의 꿈 대신 자식들의 꿈을 위해 살아간 인물로 그려진다. 아내 애순이 시인이 되는 꿈을 응원하고, "대통령이 되겠다"는 그녀 곁에서 "내가 최초의 남자 영부인이 되면 되지"라고 농담할 만큼 깨어 있는 면모도 보였다. 그만큼 가정에 충실하고 아내를 존중하는 남편상이자 자녀에게 헌신적인 아버지상의 표본이라 할 수 있다.
양관식 부성애의 핵심은 책임감과 희생이다. 그는 가장으로서 집안을 책임지기 위해 힘든 일도 마다하지 않고, 돈이 생기면 자기 몫은 최소화한 채 아내와 아이들에게 쏟는다. 자녀들에게는 엄격함보다는 다정함으로 대하며, 누구보다 가족의 안녕과 미래를 걱정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런 헌신적 가장상은 한국 사회에서 전통적으로 미덕으로 여겨져 온 부성애와 정확히 겹친다. 어려웠던 시절 묵묵히 일하며 가족을 건사하던 우리 아버지, 할아버지들을 떠올리게 한다.
그렇다면 왜 현대 사회에서 이처럼 전통적인 '헌신형' 가장 이미지가 다시 주목받고 호응을 얻을까? 가장 큰 요인은 시대가 변했어도 가족을 위한 책임과 사랑이라는 가치가 여전히 중요하기 때문이다.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오히려 이러한 변치 않는 가치에 사람들이 감동을 받는 것이다. 특히, MZ세대 남성들은 자신의 아버지 세대와는 다른 환경에서 살고 있지만 막상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가지면 '좋은 아버지, 남편'이 되고 싶다는 보편적 소망을 품는다. 양관식은 그 롤모델이 되어준다. 가부장적 권위보다 가족에 대한 헌신과 사랑으로 존경받는 남성상을 제시함으로써, 현대 남성들이 추구하는 이상적인 아버지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회적으로도 아버지 역할에 대한 인식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과거에는 남성이 경제적 부양자에 머물렀다면, 이제는 정서적 지지자로까지 역할이 확장되고 있다. 실제 통계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는데, 남성의 육아휴직 사용자가 최근 10년 사이 5.6%에서 30% 이상으로 급증하였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양관식처럼 가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헌신적인 아버지 캐릭터는 시대에 뒤떨어진 전형이 아니라 오히려 앞서가는 이상형으로 재조명된다.
또한 양관식의 이야기가 특별한 복수나 영웅담이 아닌 평범한 삶의 서사라는 점도 크다. 화려하지 않기에 오히려 더 보편적으로 다가와 "저건 남 얘기가 아니다"라는 정서를 불러일으킨다. 요즘 중년 남성들이 술자리에서 "나도 양관식처럼 살았다"라고 말하는 걸 종종 볼 수 있다. 시청자들 중에는 양관식과 비슷하게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해온 우리 시대의 보통 아빠들도 많을 것이다. 그들은 이 캐릭터를 보며 자신의 노력과 헌신이 가치있게 여겨지는 경험을 하는 것이다.
한국 드라마와 영화에서 아버지 캐릭터는 시대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해왔다. '응답하라' 시리즈의 아버지들은 양관식과 유사한 점이 많다. 성동일, 김성균, 최무성, 류재명이 연기한 각양각색 아버지 캐릭터들은 모두 자식의 안녕을 유일한 꿈으로 품고 사는 평범한 아버지들이다.
앞서 언급한 배우 성동일이 연기한 동일은 현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부장적인 아버지였다. 툭하면 머리채 잡고 싸우는 딸들과 빚보증으로 재산을 날렸다고 자신을 구박하는 손 큰 아내에게 고함과 욕지거리부터 퍼붓지만, 영특한 큰딸과 예쁜 작은딸, 유일한 아들에 대해 각별한 마음을 품고 사는 아버지였다.
과거 한국 영화에서도 부성애는 중요한 주제였다. 2013년에는 <7번방의 선물>을 시작으로 <전설의 주먹>, <런닝맨> 등이 모두 사회적으로는 성공 못했지만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만큼은 남다른 '아빠'들을 주인공으로 했다. 지적장애가 있지만 딸을 위해 사형까지 감수하는 아빠, 권투선수로는 실패했지만 왕따 당하는 딸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싸움짱 대회에 나서는 아빠, 아들에게 떳떳한 아빠가 되기 위해 살인사건 누명을 벗으려 고군분투하는 아빠까지 다양한 모습이 그려졌다.
겉으로는 극명하게 대비되는 '폭싹 속았수다'의 두 남성 캐릭터 양관식과 부상길은 표현 방식만 다를 뿐, 결국 자식을 향한 마음은 같다. 괴팍하고 가부장적인 성격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등을 돌리게 만드는 부상길이지만, 그의 행동 이면에는 양관식 못지않은 따뜻한 부성애가 숨어있다. 은명이가 원양어선을 타려 할 때 부상길은 "나 도동리 부상길인데, 따블!"을 외치고 배를 돌리게 하며, 양관식과 금명이가 둘이서 일출을 보러 배 타고 들어오는 모습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자신도 해보고 싶어 하는 마음을 드러낸다. 또 은명이가 사기를 당했을 때는 경찰에게 부탁해 사기범을 잡으려 애쓰는 등 그의 괴팍함은 결국 외로움의 표현이었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주변을 챙기는 사랑법이었다. 양관식이 따뜻한 표현과 헌신으로 가족을 보듬는다면, 부상길은 거칠고 투박한 방식으로 자신의 마음을 전하지만 두 사람 모두 자식을 향한 사랑과 책임감으로 최선을 다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준다.
'폭싹 속았수다'의 양관식은 단순한 과거형 인물이 아니다. 그의 순수하고도 헌신적인 모습은 우리가 어떤 삶을 지향해야 하는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만든다. 이는 현대 사회에서 잃어버린 관계와 책임감을 되찾으려는 움직임이다. 그는 지금도 누군가의 아버지일 수 있고, 누군가의 남편일 수 있다. 그러니 양관식과 부상길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그래서 남성들은 그에게서 과거의 아버지를 떠올리고, 미래의 나를 그려본다. 오늘도 땅 위의 무수한 무쇠들이 저마다의 하루를 온몸으로 녹여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