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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비기 Dec 22. 2021

디자이너, 세상에 널렸다구요?

그래도 저 같은 디자이너는 (아마) 없을걸요?

01_하고 싶은_말


전 인간 그 자체의 탐구를 즐기면서 논리와 이성적 판단을 추구하거든요. (그래서요?)

제 업은 입찰경쟁 시장에서 수주를 위해 필요한 모든 시각적 도구들을 만들어내는 일이에요. 그중 가장 주된 업무는 ‘입찰경쟁의 꽃’인 제안 프레젠테이션 디자인이구요.


디자이너라기보다 (전문적인 업무를 가진) 직장인에 가까운 성향이었던 저는 이 일이 제격이었어요. 무려 10년을 군소리 없이 일해왔죠. 덕분에 오랫동안 한 가지 일을 파고들었고, 이제는 고이다 못해 깊은 웅덩이가 생겼어요. 그 웅덩이는 저 혼자 파낼 수 있는 수준의 것은 절대 아니에요. 기획을 업의 일부로 삼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함께 했기에 가능했죠. 그들과 함께 웅덩이를 파내던 그 시절.. 참으로 눈부시고 값진 시간들이었답니다.

모두 함께 삽질 해오ㄴ 아니, 일구어 온 그 경험에 대해 지금부터 하나씩 풀어 보려고 해요.


이야기는 가끔 산으로, 강으로 흘러갈 수도 있지만 그래도 제가 전하고 싶은 단 하나는 확실해요. 제 일의 프로세스와 사고의 가치를 정립하는 것. 이 작업이 파워포인트의 노예로 살아가며 신분 상승을 노리는 업계의 관계자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에요.


02_사실은 이게 진짜 _하고 싶은 _말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기 앞서, 제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정의를 명확히 해보려 해요. 바로 제안 디자인과 디자이너에 대해서요. 얼마일지 모르지만 힘닿는 데까지는 써 내려갈 제 글의 주키워드가 될 테니까요.

제안 디자인이란?
우리가 가진 서비스나 상품, 아이디어 등을 특정 대상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디자인으로, 이를 통해 수주, 투자유치, 설득 등의 원하는 바를 성취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는 단순히 예쁘거나 화려한 디자인이 아닌, 의도한 메시지를 확실하게 각인시키기 위한 전략적 접근 방법으로써 데이터를 구조화하고 시각화하는 전 과정을 의미합니다.


제안 디자이너란?
제안 디자인을 위한 디자인 요소 설정과 제안 내용의 시인성이 확보되는 디자인 구성을 담당하며, 대상과 목적에 따른 디자인 전략을 수립하는 능력을 요한다.

디자인 요소 설정이란 템플릿과 같아요. 표지-목차-간지-내지장표의 디자인부터 기본 색상, 폰트, 사이즈, 전체적인 톤&매너 등 해당 프로젝트에 적합한 디자인 요소를 개발하는 것으로, 제안 디자인의 첫 단계라고 할 수 있어요. 디자인 요소가 확정되면 이를 기반으로 기획자 혹은 전략가들이 1차 제안서를 작성하게 됩니다.


제게 템플릿 디자인은 가장 기본적이고 루틴한 업무 중 하나였어요. 모든 경쟁입찰의 시작이니까요. 제가 일하는 업계의 연간 입찰건수를 모두 헤아릴 수는 없지만, 평균적으로 연 250여 건의 템플릿을 제작해 왔으니 실제 건수는 이보다 훨씬 많을 거예요.

아이고 대단하네

극성수기에는 템플릿을 거의 찍어내는 수준의 공장모드를 가동하죠. 그 모든 요청을 쳐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거든요. 잘 만들어둔 기본 템플릿은 여기저기 돌려가며 쓰기 좋아서 업무의 효율성을 높이는 저만의 비결이랍니다. 데헷. (공장장의 변)


03_제안서를 작성하는_일 = 어마무시한_일


기획단에서 제안서 초안을 작성하면 이제부터 본격적인 제안 디자인이 시작됩니다. 이때는 기획자의 성향과 능력에 따라, 리더에 따라, 팀의 구성에 따라 다양한 스타일의 협업이 이루어지는데요.(^^할많하않^^) 제가 가장 선호하는 초안은 뭘 해야 할지 아는 기획자가 좋은 메시지(아이디어)를 기반으로 표현방법에 대해 충분히 고민한 자료예요. 이도 저도 없이 그냥 화려하게, 의미 없는 시각적 표현을 요구하는 자료는 제일 피하고 싶은 작업이에요.

굳이 표현하자면 짠한 '멍부' ㅜㅜ


나의 서비스, 상품, 아이디어 등이 무엇인지 정확히 꿰뚫고, 그것을 어떻게 전달할지 계산이 되는 기획자의 제안서는 고민을 할 필요가 없어요. 있는 그대로를 디자인하면 그 자체가 결과물이 되거든요. 반면에 제안에 대한 인사이트가 없는 기획자는 초안을 아무리 열심히, 현란하게(그림10개, 도형10개, 글빼곡 등) 작성한다 한들 무엇을 의도하는 것인지 파악이 어려운, 효용 가치 없는 페이지로 전락하고 말죠.


안타깝지만 그게 실무의 현실이에요. 일을 할 줄 아는 사람은 다르죠. 더도 말고 둘도 말고 딱 한 번만 같이 일 해보면 바로 사이즈가 나와요. 제안서를 작성한다는 것이 그런 일이에요. 정말 어마 무시하죠. 내용을 정리하고, 전략을 세우고, 이를 구성하고, 전달하기까지. 10년을 곁에서 지켜봤지만 매번 새롭고, 결코 쉽지 않았어요. 디자이너의 관점에서 ‘그 쉽지 않은 일’을 어떻게 접근하고 시도해야 하는지 (드디어) 살펴보려고 해요.


하나의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우리는 수많은 데이터를 수집합니다. 대상(고객사+고객)은 누구인지, 외부 상황은 어떤지, 내부 상황은 어떤지, 잘 굴러가고 있는지, 엉망인지, 키맨은 누군지, 어디에 꽂혀있는지, 어떤 트렌드를 따라가는지, 딱딱한지 유연한지, 전문적인지 참신한지, 싫은 것, 좋은 것, 원하는 것, 필요한 것 등. 이렇게까지? 싶을 정도로 많은 데이터를 수집하는 것이 중요해요. 그래야 그 엉망진창인 데이터 소굴에서도 규칙을 찾고 인사이트를 뽑아낼 수 있기 때문이죠.


우리가 가진 데이터중에는 하등 쓸모없는 것, 중요하지는 않아도 알고는 가야 할 것, 반드시 고객에게 각인시켜야 될 키포인트가 있어요. 우리는 이 수많은 데이터 속에서 청중에게 전달해야 할 키포인트를 걸러내고, 이것들을 모아 설계하고 가공해야 하죠. 이처럼 날 것의 수많은 데이터를 가공시켜 의미 있는 정보로 만들어 내는 것을 제안 데이터의 정보화 과정이라 칭해요.

즉, 우리의 제안을 전체적으로 & 폭넓은 시야에서 바라보는 거예요. 전달할 내용의 서론-본론-결론은 무엇인지, 각각의 세부 내용과 준비해야 하는 사항들은 무엇이 있는지 등 튼튼한 뼈대를 머릿속에 세우는 거죠.


괜히 어렵게 느껴지시나요? 쉬운 예를 한 가지 들어볼게요.

<내가 퇴사를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상대방을 설득하는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한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대상에 대한 철저한 수집과 분석이에요. 이를 통해 언제, 어떤 식으로 대상을 공략할 것인지 전략을 세우는 거죠. 분석이 끝나면 전달하려는 메시지의 가닥을 잡습니다. 전자가 대상에 대한 탐색, 자료 검색 등의 1차원적인 과정이라면 후자는 프레젠테이션의 목적 달성을 위해 제안 아이디어가 요구되는 심화과정으로 볼 수 있어요.


대상

남편
극안정주의자, 딸린 자녀1, 조직 내 화려한 퍼포먼스와 인정보다 내 삶의 행복을 추구,
감성파, 소주 한잔 마시면 성인군자

목표

와이프의 퇴사 승인과 향후 계획에 대한 지지 이끌어 내기

키포인트

1. 나 퇴사하고 싶어
2. 이유는 엄청 많아. 100개도 넘게 말할 수 있어
3. 옆집순이랑 사촌영희도 결국 때려치웠다잖아
4. 퇴사 후엔 이런 거 할 거야. 나와 내 능력을 믿어줘

대상을 분석하고 적절한 키포인트를 도출했다면, 이제는 대략적인 프레젠테이션 구조를 머릿속에 그려봐야 합니다. 프레젠테이션의 전체적인 흐름을 그리고 그 안에서 전달해야 할 메시지를 구체화하는 작업이죠.


(아니 그러니까, 그래서?)

그걸 어떻게 하냐구요?


그냥 쭉 보는 거예요.

추려낸 포인트를 나열하고 전체적으로

그냥 쭉~ 이요.

가만있어보자 어디보자 여기보자 저기보자

너무 아무 생각 없이는 말구요. 뭐 없을까~? 하는 그런 생각과 동시에 게슴츠레한 눈빛을 쏘세요.

그러다 갑자기!

뙇! 스파크가 일어날 거예요.


...


음. 네, 사실 이건 어떻게 말로 설명드리기 몹시 어려운 과정이에요. 기획이나 전략에 대한 구체적인 아이디어를 찾고, 나의 데이터에 적용하는 건데요. 보통은 펜을 들고 끄적이거나 다 같이 모여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면서 아이디어를 캐치하죠. 사람에 따라 샤워를 하다가, 큰일을 보다가, 포기하고 자려고 누웠다가, 만취해서 헛소리를 하다가 등 천차만별의 다양한 방법들이 존재합니다. 아무튼 이렇게 각자만의 방식으로 전략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그에 맞게 데이터를 그룹핑하여 내용을 구조화하는 거예요. 내용의 경중에 따라, 데이터의 성질에 따라 다양하게 묶어 볼 수 있어요.


만약 회사를 다니기 싫은 이유가 10가지다. 그럼 이걸 단순 나열을 할게 아니라, 한 가지를 버리더라도 3가지씩 그룹핑할만한 기준(전략)은 무엇이 있을지 고민하고 찾아내는 것이죠.


1. 여보 놀라지 마, 나 퇴사하고 싶어

2. 들어봐, 고민point. 3

   2-1. 엄마로서의 고민 – 여성으로서 커리어를 펼칠 마지막 시기이자 기회

   2-2. 일에 대한 고민 – 일을 어떻게, 얼마나 할지에 대한 고민. 지금 그 답을 찾고 싶음

   2-3. (공개할 수 없는 고민) – 이러이러함

3. 얘네 봐, 혹할 만한 사례

   3-1. 남편이 아는 성공한 지인

   3-2. 동종업계의 성공한 롤모델

   3-3. 도전하고 싶은 업계의 성공한 롤모델

4. 알아 나도, 불안요소와 해결방안

   4-1. 재정 – 이러이러한 방법으로 해결

   4-2. 육아 – 이러이러한 방법으로 해결

   4-3. 최후의 보루 – ㅁㅁ에 도전하여 안정 찾기

5. 자신 있어, 향후 계획

   5-1. 퇴사  - 사전 준비 리스트 & 간접경험

   5-2. 퇴사 후 – 2가지 큰 맥락으로 진행 예정

6. 나와 내 능력을 믿어줘, 별첨

   - 능력 어필용 <포트폴리오.pdf>

   - 지인 추천사

7. 상상해 봐! 우리의 장밋빛 미래, 클로징


이것이 바로 자료를 정리하고 전략에 따라 구조화하는 ‘데이터의 정보화 과정’입니다.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쉽게 시도할 수 있어요. 고급 기술이 필요하지도 않죠. 제안서를 귀신같이 후루룩후루룩 써 내려가고 싶다면 전달하려는 말을 구조화하는 연습을 꾸준히 해보세요. 내가 잘 아는 사람을 타깃으로 가상 프레젠테이션을 기획해 보는 거죠. 가벼운 주제들로요!


04_사실은_아직도_서론

제가 이렇게 이야기의 뼈대를 만드는 과정을 상세 설명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앞서 데이터들을 가지고 전달해야 할 메시지, 즉 정보를 구조화했다면 그 후에 거쳐야 할 단계가 있기 때문인데요. 구조화한 정보들을 단순히 파워포인트 슬라이드 위에 주저리주저리 얹기만 할 것이 아니라, 더 효과적인 전달을 위해 정보를 시각화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합니다. 정보를 시각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기발한 아이디어나 디자인적인 센스, 스킬. 요런 것들이 요구되는 부분이죠. 다음 글에서는 이 부분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이야기할 거예요. (제발 좀)


사실.

브런치 작가를 신청할 때만 해도 제가 이렇게 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어요.

이렇게 글밥이 폭발할 줄은요. ^^


다음 글에선 축약된, 한층 간결해진 모습으로 찾아뵐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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