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를 단순하게 보내며 공부만 했던 PEET 재수생의 고백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다. PEET 시험은 매년 8월 말에 치러졌고, 이를 위해 늦어도 1월부터는 공부를 시작한다. 요새는 공부 시기가 점점 빨라져서 10월부터 준비하기도 하고 아예 재수 이상을 염두에 두고 공부를 시작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아는 게 없어서 재수 때도 용감했다. 다른 사람들보다 늦은 2월 중순부터 시작했지만 학원의 힘을 빌린다면 승산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초시 때도 같은 마음이긴 했었다. 당연히 합격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 그러고 보면 나는 고3 때도 이런 생각을 자주 했었다. '수능 만점 받으면 인터뷰를 뭐라고 할까?' 풋~ 하여튼 긍정적인 생각 하나는 짱이다.
다만 PEET 시험 초시 때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 시험이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으므로 정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마음가짐을 갖게 된 것이다. 초시 때는 설렁설렁했지만 이번에 결과를 다르게 만들기 위해서는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정말 최선을 다해 보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의 하루는 매우 단순해졌다. 6시에 일어나서 15분 만에 준비를 마치고 6시 30분에 지하철을 탄다. 그리고 지하철에서 전날 배운 내용들을 복습한다. 내가 탔던 지하철은 지하철 직원들이 문 닫는 걸 봐줘야 할 정도로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다. 그런 상황에서도 나는 손에 책을 들고 아무리 좁은 틈 사이에서도 공부하려 노력했다.
8시에 신촌역에 도착해서 신촌역에 있는 마노핀에서 카페라테 한잔을 샀다. 그리고 학원에서 바로 자습을 시작했다. 카페라테는 아침 대용이었다. 나이 들어서 공부한다는 것은 내 밥도 스스로 챙겨서 먹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식사 준비에 시간을 투자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밥을 먹는 것보다 커피 한 잔이 오전의 내 뱃속을 편안하게 해 줬다. PEET 시험공부하면서 저절로 다이어트가 됐다. 밥을 많이 먹으면 뱃속이 불편하기 때문에 식사량을 조절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커피 한 잔이 주는 행복감이 컸다. 커피 한 잔 값은 3000원 정도 했던 것 같다. 매일 사 먹으려면 학생 입장에서는 부담되는 금액일 수 있는데 매일 사 마실 수 있다는 것이 나의 수험생활에서 큰 기쁨 중의 하나였다.
오전에는 학원에서 강의를 들었다. 내가 다녔던 학원은 200명 수용이 가능할 정도의 넓은 강의실에서 강의를 했다. 나는 인강 세대가 아니라 철저히 현강 세대였고 대학생 때부터 강의 자리는 맨 앞자리를 고수했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맨 앞자리를 사수하려고 했다. 이미 1월부터 강의가 시작되었으니 아마 학생들 사이에는 암묵적으로 정해진 고정 자리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중간에 들어갔으니 그런 건 모르고, 무조건 맨 앞자리에 앉으려고 했다. 며칠간 자리 쟁탈전이 어린 애랑 나 사이에 벌어졌다. 누가 학원에 먼저 오는지로 정해지는 맨 앞자리 사수전... 학생들 사이의 재밌는 구경거리거나 아마 늙은 언니의 볼썽사나운 행동으로 비쳤을 수도 있다. 결국 맨 앞자리 사수전에서 내가 지고 말았다. 그렇지만 두 번째 줄도 괜찮았다. 그렇게 8월 시험 때까지 학원의 두 번째 줄에서 수험생활을 보냈다.
점심시간엔 혼자서 밥을 먹었다. 1월부터 공부를 시작한 학생들 사이에서는 밥 친구나 공부 친구가 있었을 것이다. 중간에 들어간 내가 일부러 말을 걸지 않으면 아무도 나에게 말을 걸어주는 사람은 없다. 나는 그 고독을 완전히 즐겼다. 점심시간에는 신촌역에 있는 밥집에 문제집을 들고 가서 공부하면서 밥을 먹었다. 점심시간의 식당은 혼밥하는 것이 부담스러워서 주로 현대백화점 지하에 있는 푸드코트를 자주 갔다. 혼자 먹어도 부담스럽지 않고 아무도 나에게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 푸드코트에서 밥 먹으면서 공부도 하고 부모님에게 전화도 드리고 남편이랑 통화도 하면서 오전 내내 꽉 닫혀있던 입을 풀어주기도 했다.
오전엔 카페라테 한잔, 그리고 점심시간엔 백화점 푸드코트... 초시 때의 나라면 상상할 수 없는 소비형태이다. 무조건 돈을 아끼면서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무료 강의 찾아보고, 책은 중고나라에서 알아보고 밥은 도시락을 싸 갖고 다녔는데 이번 재시 때는 완전히 달라졌다. 학원을 등록했고 커피나 밥도 가장 편한 곳에서 사 먹었다. 오로지 공부를 위한 여건 만들기에 집중했던 것 같다. 돈을 일부러 더 써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지만 돈에 대해 고민할 시간에 공부 한 자를 더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몸으로 느꼈던 것 같다. 그리고 합격하는 길이 결국 돈 아끼는 거라는 것도 말이다. 결혼해서도 공부한다고 돈 안 벌고 오히려 쓰기 바쁜 딸내미가 시댁과 사위에게 죄송하셨던지 부모님도 학원비를 보태주셨고, 우리 남편은 내가 공부한다고 돈 쓰는데 전혀 눈치를 주지 않아서 감사할 따름이었다.
점심을 먹고 나서는 가볍게 산책을 하고 학원에 다시 들어와서 이빨 닦고 오후 시간을 제대로 보내기 위한 정신무장을 했다. 주로 학원 벽에 붙은 합격수기를 자주 읽었다. 많은 합격 수기 중에서 내 마음에 쏙 드는 것이 있어서 그걸 매일 반복해서 봤다. 슬럼프를 이기는 법에 대한 내용이었다. 슬럼프란 공부를 덜 해서 오는 것이므로 공부를 더 하는 것으로 극복했다는 내용이었다. 정말 뼈 때리는 얘기였다. 나는 초시 때 마음이 조금만 흔들려도 같이 스터디했던 사람들이랑 떡볶이 먹고 저녁에 공부 마치고 맥주 마시고는 했었다. 그게 나의 마음을 다잡을 수 있는 길인 줄 알았다. 즐거운 시간을 보내야 다시 즐거운 마음으로 공부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면 결국 공부시간이 줄어서 불합격하게 된다는 것을 알았다.
슬럼프는 공부하는 것으로 극복해야 한다. 아니, 하루하루 나의 공부에 충실하다 보면 성적도 오르고 슬럼프가 올 틈이 없는 것 같다. 내 하루를 온전히 공부를 위해서만 쏟고 축적된 공부시간으로 성적을 올리면서 다시 공부 재미를 느끼고 공부에 집중하는 그런 선순환을 나는 PEET 재시를 준비하면서 처음으로 깨달았다. 고3 때도 느껴보지 못한 재미였다. 고3 때 내 앞에는 언제나 유리벽 같은 천장이 있었다. 뛰어넘을 수 없는 그런 천장 말이다. 내 성적은 어느 이상으로는 오르지 않았는데 누군가는 뒤에서 나를 쫓아오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멀리 달아나기도 했다. 누구나 주어진 시간은 동일하고 나도 하루를 성실하게 보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차이를 눈앞에서 확인할 때면 '그 친구는 머리가 좋구나'로 마무리짓고는 했었다.
하지만 PEET 시험을 준비하면서 알게 되었다. 이게 바로 합격자들이 이야기하는 ‘엉덩이 힘’이로구나. 나는 엉덩이 힘으로 공부하는 사람들은 미련한 사람들인 줄 알았다. 공부는 집중력이지 미련하게 시간만 오래 채우는 것은 공부 못하는 사람들의 방법이라고 치부했었다. 하지만 내가 수능 때도 일정 점수를 넘지 못했던 이유는 엉덩이 힘에 대한 과소평가였고 내 공부 방법에 대한 자만이었다는 것을 PEET 시험을 치르면서 깨달았다.
합격수기를 읽으며 마인드를 새롭게 정비하고 오후 시간을 보냈다. 이때는 강의가 있으면 강의를 듣거나 자습을 했다. 매일매일 새롭게 배우는 공부량이 많아서 그걸 복습하려면 자습시간이 빠듯했다. 그렇게 오후를 보내고 저녁시간이 되면 혼자서 또다시 푸드코트에서 밥을 먹거나 김밥 한 줄을 사와 밥을 먹는다. 그리고 저녁 공부가 시작된다.
밤 9시나 10시쯤 학원을 나서서 집으로 갔다. 집에 가면 남편은 나를 기다리다가 불도 끄지 못하고 안경까지 낀 채로 잠들어있는 경우가 많았다. 신혼인데도 남편과 시간을 갖지 못하고 매일 아침에 나가서 밤늦게 들어오는 생활을 하게 되니 남편에게도 미안하고 그런 상황에 대해서 불만을 얘기하지 않는 남편에게 고마웠다. 그런 상황들 덕분에 더 공부에 집중할 수 있었다. 미안하고 고마워서... 다시는 초시 때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내 하루는 이렇게나 단순했다. 대부분 합격자들의 하루는 이럴 것이다. 핸드폰을 볼 시간도 없다. 핸드폰은 사물함에 넣어두고 오로지 공부만 하는 것이다. 내 인생에서 이렇게 한 가지 목표를 향해 반년이 넘는 기간을 하루 종일 공부만 하면서 보낸 경험이 다시 올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