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ET 학원에 처음 왔을 때는 200명 넘게 수용 가능한 큰 강의장에 학생들이 꽉 차 있었다.
"이 중에 합격하는 사람은 10%도 안 돼요."
2월에 처음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을 때 이렇게 많은 학생들이 하루 종일 열심히 공부한다는 것에 놀랐었다. 그런데 이 중에서 겨우 10%도 안 되는 학생만 합격한다는 얘기에 더 놀라고 말았다. 학생들의 공부 태도를 보고 하는 말이 아니라 몇 년간의 통계였다. PEET 시험을 준비하는 학생은 점점 많아지는데 합격자 수는 약학과 정원 딱 그만큼이다. 내가 열심히 공부했다 하더라도 합격하는 학생은 그 비율만큼인 것이다. 하루 종일 공부한다고 합격이 보장되는 게 아니었다. 남보다 더 많이, 더 열심히 집중해서 공부해야 한다는 위기의식을 느꼈다.
그렇게 2월부터 8월까지... 쉼 없이 달렸다. 시험에 가까워질수록 학생들의 이탈이 많아졌다. 강의에 만족하지 못해서 다른 유명한 강사의 인강을 따로 듣거나 자습하면서 공부하는 학생들의 수가 점점 많아졌다. 그런 학생들을 보고 있자니 나는 잘하고 있는 것인지 불안해졌다.
유명한 강사님들의 수업을 들으면 실력이 더 잘 오를까?
내가 지금 듣고 있는 강사님의 실력이 별로라면 내 성적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
불안했지만 별다른 방법도 몰랐고, 그런 고민을 할 시간에 틀린 문제 한 번이라도 더 보자는 심정으로 정해진 시간표대로 수험기간을 살아갔다. 점점 텅 비어 가는 강의실에서 강사님의 수업을 들으며 문제를 풀고 해석을 들으면서 강사님의 질문에 혼자 답하고 끄덕이며 수업을 들었다. 고등학생 때도 암기할 것이 많은 생물을 제일 싫어하고 못했다. 그런데 PEET를 준비하면서는 수업시간에 대답할 수 있을 만큼 실력이 쌓여가는 스스로가 뿌듯했고 생물 공부가 점점 재밌어지고 있던 참이었다. 문제를 풀다가 모르는 것이 있으면 강사님에게 적극적으로 질문하기도 했다.
PEET학원은 어릴 때 다녔던 소규모 학원과 차원이 다르다. 강사님과 긴밀한 교류를 하며 수업을 듣기에는 강사님들도 바쁘고 학생수가 너무 많다. 질문받는 시간도 정해져 있어서 줄을 섰다가 내 순서가 되어야 질문할 수 있고 다음 학생을 생각해서 질문도 너무 길게 할 수는 없다. 그래서 그런 상황이 불편해서 질문을 하지 않고 그냥 지나가는 경우도 많다. 나는 어릴 때부터 잘하는 것이 ‘질문하기’였다. PEET 학원에서는 비록 나이도 가장 많고 나이가 많으니 어린 친구들 틈 사이에서 조용히 묻어가는 것이 미덕이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지만, 이제 나에게는 오로지 합격이 중요했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 신경 쓰지 않고 필요한 것은 적극적으로 질문하고 답을 구하려고 했다.
시험이 다가오던 어느 날, 생물 강사님이 하루는 내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이번 시험에 95프로 넘을 거예요.”
“네? “
PEET 시험은 원점수와 별개로 상대적 성적분포를 고려한 백분율을 받게 된다. 전 과목이 90%가 넘어야 합격권을 바라볼 수 있다고 얘기한다. 그런데 강사님이 갑자기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어안이 벙벙했다.
시험을 본 것도 아닌데 어떻게 저런 확신에 찬 말씀을 하실 수가 있는 거지?
내 실력을 어떻게 아시고 저런 말씀을 하시는 걸까?
내가 다녔던 학원은 담임제도가 있던 것도 아니고 PEET 시험 특성상 실력을 평가할 수 있는 모의고사가 많은 것도 아니다. 그런데 어떻게 내 실력을 판단하실 수 있는 걸까?
”그걸 어떻게 아세요? “
”수업시간에 대답하는 거 보면 알아요. “
아... 그렇구나. 강사님이 질문하신 것에 혼자 대답하면서 끄덕이던 모습을 보고 말씀하신 거였다. 이 학생이 어느 정도의 지식을 갖췄다는 것이 판단하셨고 그래서 시험 점수까지 예상하신 거였다. 강사님의 판단이 틀렸을 수도 있고 너무 낙관적으로 전망하신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동안의 내 공부방법이 틀리지 않았고 열심히 한 성과가 나타난 것 같아 기뻤다. 그리고 나에게 더욱 확신이 생겼고 희망을 갖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생물 과목에서 97%라는 가장 높은 백분율을 받았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고등학생 때 생물을 가장 싫어하고 어려워했다. 그래서 PEET 시험을 준비하면서 가장 신경 쓴 과목이다. 한 과목이라도 미끄러지면 합격할 수 없는 시험이기에 고등학생 때처럼 대충 공부할 수가 없었다. 이걸 반드시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절박함이 있었다.
집에서 학원까지 지하철로 1시간 30분 거리... 2번을 갈아타고 인천에서 신촌으로 매일 다녔다. 지하철에서 가장 오래 붙들고 있던 책이 생물 교재였다. 초시 때도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했는데 재시도 2월 중순이 되어서야 시작해서 DNA, RNA 개념조차 확실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른 학생들은 이미 기본개념부터 차근차근 배우며 실력을 쌓아가고 있을 텐데 나는 이전 수업들을 듣지 못하고 따라가고 있는 상황이라서 이것을 어떻게든 메꿔야 했다. 그래서 매일 1시간 30분 편도를 다니면서 생물 교재를 보고 또 보고, 읽고 또 읽었다.
신기하게도 이전에는 문제의 숨은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정답을 맞히기에 급급했는데 이제는 문제 의도가 보이기 시작했다. 같은 문제를 풀었는데도 처음에는 알지 못했던 내용을 나중에는 알고 있는 내가 보였다. 실력이 쌓이는 것을 느끼다 보니 공부가 점점 재밌어졌다.
고등학생 때는 좋아하는 과목만 열심히 하고 싫어하는 과목은 대충 했었다. 저 과목은 나랑 맞지 않는 과목이라서 어쩔 수 없다고 치부하고 더 알려고 노력하기를 게을리했었다. 하지만 수능과 달리 한 과목도 삐끗하면 안 되는 PEET 시험을 준비하면서 나랑 맞지 않는 과목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단지 내 실력이 부족했을 뿐이었다. 8월 시험이 내 인생을 결정할 수도 있다는 절박함 속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시작했던 공부였는데... 하루하루가 쌓여 실력이 되었고 어느새 즐기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원래 좋아하고 잘한다고 생각했던 물리 과목은 상대적으로 내가 잘 안다고 생각해서 공부 비중이 가장 낮았다. 다른 과목에 비해 절박함도 달랐다. 결과적으로 물리 과목은 오히려 내가 못한다고 느꼈던 다른 과목에 비해 낮은 점수를 받았다.
고3 때도 느껴보지 못했던 공부의 재미를 PEET 공부를 하면서 많이 느꼈다. 이걸 내 것으로 만들고 말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절대적인 시간 투자를 하면 결국 내 것이 되는구나. 실력이 쌓이면 재미없다고 느꼈던 것에도 재미를 느끼게 되는구나. 내 실력이 문제였던 거구나...
나는 항상 재미를 찾아 20대를 살았다. 한 번 사는 인생인데 회사 책상에서 평생을 보내고 싶지도 않았고 재미없는 일을 하느라 아까운 내 청춘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26살에 퇴사하고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찾아 돌아다녔고 그렇게 서른이 넘어버렸다. 내가 원하는 것들을 용기 있게 해 본 성취감은 있었으나... 서른이 넘고 보니 나는 그 어느 것에도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이거 찔끔, 저거 찔끔하면서 서툰 경험만 만들었을 뿐이었다. 내가 가고 싶다 생각했던 길에서 이렇다 할 나의 성과를 내지 못한 나를 어느 날 발견했을 때 내 인생의 초라함에 치를 떨었다.
그래서 내 마음속에 오기가 생겼던 것 같다. 이제는 스스로가 초라해지는 그런 인생을 살지 않으리라. 그렇게 PEET 재시를 준비했다. 잠을 쫓아가며 내가 절박하게 매달리는 것에 끈기 있게 밀어붙이며 성과를 낸 내 모습에 그동안 자책했던 마음이 조금은 씻겨내리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