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아를 보면서 씁쓸했던 30대 못난 언니

즐기는 삶이 멋진 인생인 줄 알았었다.

by 차차약사

주사위는 던져졌다. 결과에 상관없이 나는 나에게 주어진 시간에 최선을 다했다. 인생에서 언제 이런 경험을 해 본 적이 있었던가? 초,중,고 모두 성실하게 학교 생활은 했었다. 그런데 최선을 다해봤다? 쏟아지는 잠을 붙잡고 책상에 앉아 있었다? 잠을 쫓기 위해 갖은 방법을 다 썼다? 이런 느낌은 가져본 적이 없다. 늘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해왔었고 졸리면 잤고, 놀고 싶을 때는 놀았다. 학교에서 수업 듣고, 야간자율학습도 하고, 학원도 다녔지만 나를 이겨보자는 마음으로 공부해 본 적은 없다. 그래서 어쩌면 당돌하게 무조건 합격하겠다는 생각으로 PEET 시험에 도전할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공부가 딱히 힘들지 않았었으니까.


하지만 최선을 다해보지 않았던 공부습관이 PEET를 준비하면서는 완전히 바뀌었다. 나를 이기는 공부습관을 처음으로 가져봤다. 어떻게 이렇게 변할 수 있었을까?






첫째, 불합격하면 다른 방법이 없었다. 어릴 때는 해군사관학교에 가고 싶었다. 사관학교 입학에 필요한 점수가 있었지만 사관학교에 합격하지 못해도 다른 대안들이 얼마든지 있었다. 그리고 사관학교는 서울대만큼의 점수가 필요하지는 않았다. 가고 싶다는 열망이 크기 했지만 오히려 목표가 분명해서인지 해군사관학교 커트라인에 딱 필요한만큼만(?) 공부했던 것 같다. 내 목표가 딱 거기까지였으므로. 그래서 나는 딱 커트라인에 간당간당한 점수를 받았고 불합격하고 말았다. 필요한 만큼만 노력했던 것, 그리고 해군사관학교가 아니더라도 내 점수에 맞는 다른 대학들이 존재했기 때문에 위기의식을 적게 느꼈던 것도 실패요인이었다. 그런 공부습관이 결국은 PEET 초시 때도 이어졌다. 하지만 상황이 완전히 다름을, 초시를 보고나서야 제대로 깨닫고 PEET재시 때는 공부자세가 달라졌다. PEET는 합격 아니면 불합격이었다.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에 불합격하는 순간 내 노력과 시간은 모두 물거품이 되는 것이다.


둘째, 인생에서 한번도 최선을 다해보지 못한 내가 싫었다. 그때 즈음, 김연아가 세계 피겨스케이팅에서 연일 금메달을 따고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희망과 기쁨을 선물했었다. 김연아 선수가 너무 대단했지만, 내 마음 한 켠은 씁쓸했다. 김연아 선수의 재능보다 내 눈에 더 크게 보였던 것은 어릴 때부터 자기 분야에서 최선의 노력을 하여 결국 세계 최고 자리에 오른 모습이었다. 최선을 다한 모습으로 엄청난 성취를 하고 사람들에게 기쁨까지 주는 그녀를 보면서 나의 '끈기부족'이 유난히 뼈아프게 드러났다. 대학생 때부터 서른이 된 그때까지, 나는 인생은 즐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왔었다. 일만 열심히 하는 사람들은 인생을 즐길 줄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나는 즐길 줄 아는 사람이라는 우월의식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김연아를 보면서 깨달았다. 한 자리에서 묵묵히 최선을 다해 사는 모습이 그렇게 멋져보일 수 있다는 걸 말이다. 내 인생에서 한번도 최선을 다하지 않으며 살아온 내 인생에 너무 미안해졌다. 그때의 괴로움을 아무에게도 말하지는 못했다. 말하면 초라하니까. 내 인생에 대한 미안함... 그래서 이번에는 달라지고 싶었다.


두 가지 이유 덕분에 나는 처음으로 쏟아지는 잠을 이기고 문제를 풀고 또 문제를 풀었다. 누가 보면 약대에 입학하기 위한 시험에 불과할 테지만, 나는 '그 동안의 내 인생에 대한 미안함을 씻겨내고 다르게 살아보는 기회'에 동일했다. 언제 또 다시 인생에서 이런 시험을 쳐볼 수 있을까? 아마 없을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스스로에게 당당할만큼 최선을 다해 볼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해 8월 PEET 본고사를 치르고 나는 결과에 상관없이 최선을 다한 내 모습에 만족했다. 인생은 그런 것 같다. 누가 뭐래도 내가 나 스스로에게 만족스럽지 못하면 만족하지 못하는 인생이고, 결과가 어떻더라도 내가 나 스스로에게 만족하면 만족스러운 인생이다.






PEET 본고사를 치르고 결과가 나오기까지는 한달이 걸린다. 그 동안에는 원서 접수에 필요한 준비를 했다. 다른 학생들은 이 때 보통 토익공부를 한다. 나는 예전에 취업용으로 토익점수를 만들어 놓았으므로 선수과목 이수를 준비했다. PEET는 약학대학입문자격시험으로서 약학대학에 필요한 지식을 가졌는지를 평가하는 시험이다. 시험점수 외에도 약학과에서 공부하기 위한 최소한의 과목을 이수했는지를 학교마다 요구한다. 주로 생물, 화학, 물리와 수학 과목을 요구한다. 관련 전공을 공부한 학생이라면 선수과목을 필수적으로 이수했지만 나는 도시공학과를 졸업했기 때문에 추가로 선수과목을 이수해야 했다. 그래서 점수가 나올 때까지 동국대학교 평생교육원에 가서 생물 수업을 들었다.


PEET 결과가 나오기까지 관련 커뮤니티에는 시험 후기들이 계속 올라왔다. 이번에 몇점을 예상하는데 이 점수로 합격이 가능할지 묻는 질문이 많았다. 하지만 결국은 결과가 공식적으로 나와야지만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드디어 결과가 나오기로 한 전날 저녁, 동국대학교에서 생물수업을 듣는 중에 커뮤니티에 ”PEET 점수가 나왔다!“는 소식이 올라왔다. 그때만 해도 스마트폰으로 점수 확인이 불가능했다. 쉬는 시간까지 떨리는 마음으로 기다렸다가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동국대학교 휴게실에 있는 PC에서 PEET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그리고 드디어 점수를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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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리까리한 성적이 나왔다. 일반화학과 생물은 점수가 좋았다. 물리는 여러 문제 찍고 나와서 마음고생했던 것에 비해 점수가 나쁘지 않았다. 유기화학이 문제였다. 무려 76.2%가 나온 것이다. 유기화학을 처음 공부하긴 했지만 강사님을 따라가면서 나름 열심히 했다고 생각했다. 본고사 때 당황할 정도로 어려웠지만 나만 어려운 것은 아닐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점수를 보는 순간 나의 생각과 기대가 완전히 틀렸다는 것을 알았다. 백분위는 상대적인 나의 위치를 보여주는 것이다. 76.2%라는 것은 유기화학 문제가 다른 학생들에게는 전혀 어렵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며, 내 공부방법이 완전히 잘못 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른 과목의 점수를 봤을 때는 내 공부량이 부족한 것 같지는 않다. 나는 유기화학의 공부방법 뼈대를 완전 잘못 짚고 있었던 것이다.






과목별 점수를 모두 더해보니 작년 합격 가능권 점수에는 들어갔다. 비록 유기화학 점수는 뼈아프고 되돌릴 수 없지만 합격권 점수에 들어가니 원서만 잘 쓰면 합격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은 들었다. 그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했다. 원서를 써보기는커녕 시험을 보자마자, 아니 시험지를 받자마자 좌절했던 초시 때와는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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