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에서 돌아온 것은 2012년 10월이었다. 그달에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외할머니는 몇 년 전 쓰러지신 후로 우리 집에서 함께 지내다가 몇 달 전부터는 요양원에 계셨다. 아프리카 다녀온 동료들과 활동정리를 위해 합숙워크숍에 가 있던 중, 엄마로부터 연락이 왔다. 할머니를 병원으로 모셔야 하는데 아빠는 해외에 계셨고 엄마는 운전을 할 줄 몰랐다. 경기도 이천에서 파주까지 돈을 빌려서 택시비 7만원을 주고 새벽에 엄마에게 갔다. 그리고 그 다음 날 할머니를 병원에 모셨다. 다행히 며칠간 호전되는 모습을 보여주시다가 할머니는 별안간 병원에서 허망하게 눈을 감으셨다.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며칠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래도 다행이라고... 할머니의 마지막을 지켜볼 수 있고 함께 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부모님은 식을 치르느라 바쁘셨고 나는 장례식과 관련된 병원, 상조회와의 계약과 금액을 치르는 것들을 처리했다. 그때 내겐 2004년부터 만나온 남자친구가 있었다. 2010년 아프리카에 가면서도 어떤 기다림을 약속하지는 않았었다. 그런데 2년간 혼자서 외국에 살아보면서 언제나 내 편인 사람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그리고 돕기 위해 떠난 아프리카를 다녀오고 나서야 깨달았던 것이 있다. 누군가를 돕는다는 것은 내가 먼저 바로 서야 가능한 일이고, 내 가족을 먼저 사랑할 줄 알아야 가능한 것이라는 걸 말이다. 질병과 배고픔, 미래를 계획하는 게 사치일 정도로 불안정한 상황 속에서도 행복할 줄 아는 방법을 알려준 사람들을 보고 와서야 난 깨달았던 것이다.
이제는 나도 정착을 하자고 마음먹었다. 25살에 회사를 관둔 이후 5년 동안 내가 원하는 곳들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여행하고 배웠다. 세상 바깥의 일들이 너무나 궁금해서 도저히 책상 앞에 앉아있기 힘들다고 생각해서 많이 돌아다녔다. 이제는 배움들이 내 스스로도 많이 채워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이제는 정착을 하고 싶어졌다. 나의 자리를 만들고 내가 배웠던 것들을 나누고 싶은 마음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프리카 짐바브웨에서 느꼈던 내 가족을 먼저 사랑해야 하는 마음. 그래서 이제는 사랑하는 사람들 곁에 있고 싶었다.
아프리카에서 돌아온 날, 공항에는 부모님과 친구들과 남자친구가 있었다. 한국에서 회사를 다니고 있던 남자친구는 2년 동안 살이 많이 빠진 채로 꽃다발을 들고 있었다. 아프리카에서 고생하고 있어야 할 나는 15kg정도가 쪘었고, 한국에 돌아오기 전에 5kg 정도를 감량했었다. 대비되는 모습으로 공항에서 만난 남자친구와 나... 엄마는 그 때 모습이 아직도 생생한지 놀려대시고는 한다.
무엇을 위해 이렇게 돌아다닌단 말인가. 이제는 나를 오래 기다려 준 남편과 결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프리카에 떠나면서도 결혼이라는 단어를 떠올려본 적 없던 나인데. 남자친구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가 아니라 결혼이라는 단어는 내 인생에서 아직 떠오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직은 내 인생과 내 경험이 그 무엇보다 중요했던 때이니까.
아프리카 짐바브웨에서 2년 동안 활동한 경력을 토대로 당연히 국제개발협력 분야에서 일을 시작하기로 했다. 18명의 활동가가 아프리카 6개국에 파견되었었다. 그 중에서 절반 정도는 아프리카에서 활동을 계속 이어갔고 절반 정도는 한국에 돌아왔다. 아직 학생인 사람들은 학교로 돌아갔고, 나처럼 취업을 준비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당연히 금방 뭐가 될 줄 알았다. 현장에서 나는 행복했던 활동가였고 나의 2년은 그 누구보다 진실되었다고 생각했으니까... 이때만 해도 나는 아직 철이 들지 않았던 것이다. 글쎄... 일할 때 행복하고 진실된 것을 기준으로 채용하는 인사팀이 얼마나 될까. 아니 있기나 할까. 당연히 회사로서는 성과를 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인지가 우선인데 나는 나이 서른이 되어서도 감정에 호소할 줄 밖에 모르는 그런 미숙한 사람에 불과했을까.
3군데의 면접 과정이 기억난다. 한 곳은 NGO의 공정무역팀이었다. 국제개발협력과 관련된 분야였기 때문에 영어로 최종 면접이 진행되었었다. 나를 포함한 3명이 함께 면접을 치뤘다. 최종 합격한 1명은 공정무역과 관련된 주제로 논문을 쓴 사람이었다. 공정무역에 관해서는 셋 중에서 가장 전문가였다.
다른 한 곳은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브릿지 팀이었다. 바로 내가 2년간 했던 아프리카 활동을 주관한 한국 사무국이었다. 거기서도 최종 3명에 속해 함께 면접을 치렀다. 그래도 내가 활동했던 곳인데 어드밴티지가 있지 않을까 기대를 했었다. 그리고 당연히 이 활동에 대한 이해도가 다른 지원자에 비해 높을 것이므로 그로 인한 어드밴티지도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종 합격은 다른 준비된 지원자에게 돌아갔다.
또 다른 한 곳은 기업연구소같은 곳이었다. 연구소 교수님의 프로젝트를 함께 진행하는 직원을 채용하는 곳이었다. 그 교수님과 영어로 면접을 치뤘는데, 나의 영어는 짐바브웨에서 사용하던 일상 영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전문적인 연구를 진행해야 하는 곳인데 내가 그 업무를 함께 할 능력은 현장의 경험 플러스 일정 수준의 영어인데 나는 그것도 충족시키질 못했다.
이쯤 되니 나는 자괴감이 들었다. 현장의 경험에 자신이 있어서 자기소개서는 그럴듯하게 적어냈지만 결국 내가 말한 것들을 뒷받침할 만한 전문적 지식의 체계와 영어는 그에 한참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연속된 취업 낙방을 겪으며 깨달은 것이다. 내가 그렇게 강조했던 진.실.됐.던. 경험은 딱 서류를 통과하고 면접자리 정도까지 갈 수 있는 수준에 불과했던 것이다.
나이 서른이 되고도 현실은 물가에 내어놓은 어린아이마냥 나같은 사람을 누가 데려가서 키워주고 길러주길 바랬던 것이다. 이제는 그런 나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잘 조직화된 경험과 지식을 기반으로 프로젝트를 이끌어도 될 나이임에도 앳된 신입사원의 자세 그것과 다름없었다. 아니, 요새는 취업난이라고 해서 내가 일하고 싶은 분야를 공부하고 영어까지 대비해놓는데 나는 신입사원의 자세도 아니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합격할 때까지 준비하는 수 밖에. 그때서야 정신을 차리고 스터디 모임에도 들어가고 계획성있는 준비를 해보고자 했다. 당연히 영어도 준비해야 했고 관심기업의 채용일정을 챙기며 그에 맞는 직무능력을 준비해야 했다. 처음 다녔던 회사는 대학원을 다닐 때 오셨던 강사님이 계셨던 팀으로 가는 거라서 형식적인 면접만 치르고 바로 다녔었다. 서른이 되고 나서야 나는 인생에서 처음으로 취업준비라는 것을 시작해 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