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퇴와 눈치꾸러기들
로펌비서들은 휴가를 낼 때 몇 가지 단계를 거친다. 첫째로 연차 사용을 희망하는 일자에 팀 내 다른 비서, 그것도 같은 구역(a.k.a 섹터)에 앉은 비서가 휴가인지 아닌지 확인해야 한다. 근처에 앉아 있는 비서들은 휴가자를 대신해 그의 업무를 돌봐야 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담당 전문가들이 비서 휴가 사용에 동의하는지 여부를 확인해야 한다. 전문가들은 보통 자신 비서가 아니면 설명이 복잡한 지시를 내리기 꺼려하기 때문에 담당 비서는 만약 휴가를 계획하는 기간이 중요한 기일 등을 앞두고 있을 때 그전까지 준비해야 하는 서면이나, 자료 등의 양이 상당하다면 알아서 휴가를 보류하는 경향이 있다. 또한 대직하는 비서에게 복잡한 인수인계서를 전달하는 것은 팀 내 선후배들에게 민폐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로펌의 직원들은 다른 직장인들에 비해 휴가 사용이 자유롭고 사측도 부여된 연차를 모두 소진하길 권장하는 분위기라 요즘 친구(?)들은 휴가 일정을 전문가에게 결재요청 시에나 알리기도 한다고 한다. 그러나 회사에서 나름 옛날 사람이 되어가는 내 입장에서는 아직 전문가의 눈치를 보며 휴가에 대한 허락을 구하곤 한다.
결혼을 하고, 아이가 있는 내 담당 전문가들은 이제는 여행에도 전보다 더 큰 결심이 필요하다며, 나만 챙기면 되는 솔로일 때 좋은 경험을 많이 하라며 휴가 사용을 독려해주곤 한다. 그러나 모든 일이 그렇듯 휴가 사용에 눈치를 보지 않는 것은 다른 비서들에게도 적용되는 경우는 아니다. 전문가의 애매(혹은 싸늘)한 반응으로 예매했던 항공편을 취소해야 했던 선후배의 분노와 전문가 지시로 추석에까지 출근해 업무를 처리해야 했던 동기의 고충을 목격하는 것은 로펌의 비서들에게 예삿일이기 때문이다.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지금의 나는 좋은 사람들과 일하고 있다. 모든 면에서 만족한다면 과장이겠으나 비교적 삶과 일의 균형을 지켜줄 줄 아는, 더욱이 여유도 누릴 수 있게 해주는 사람들과 일하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동료들이 전문가의 휴가에 맞춰 휴가를 떠나는 것과 달리 나는 전문가들이 휴가를 가면 회사에서 밀린 업무나, 그간 하지 못했던 문서 등록을 하며 회사에서 휴식을 취하고, 그들이 복귀하면 내 휴가를 떠나는 형태로 두배의 자유를 느끼곤 한다. 휴가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하지만 당연한 권리를 누리는 것이 행복이 되는 삶이라니. 역시 모든 것이 만족스러운 직장은 신기루 같은 것일까.
나는 휴가에서 자유로운 대신 항상 칼퇴와의 싸움을 하고 있다. 아주 외롭고, 끝나지 않는 일방적인 싸움이다. 그리고 보통은 패배한다. 변호사들의 업무시간은 일률적이지도 직원들처럼 9 to 6이지도 않다. 점심이나 제때 챙겨 먹으면 다행일 그들의 일상 탓에 올빼미족 변호사도 유독 많은데, 동료 T는 한 몇 주는 담당 주니어의 얼굴을 보지도 목소리를 듣지도 못했다는 소리를 하기도 했다. 서로 낮과 밤에 해야 할 일, 처리한 일을 메일로 문자로 남겨 두는 것이 다였다는데, 뭐 그리 놀랄만한 일도 아니다. 오히려 T는 확인이 필요한 업무들은 시간이 더 소요되긴 하지만, 눈치 보지 않고 칼같이 퇴근할 수 있어 만족한다고 했다.
전문가의 부재는 행복한 일이다. 딱히 어떤 사유로 부재중인지 외부에 알리지 말라고 할 때는 더더욱 그렇다. 당장 처리가 급한 일들도, 그런 때에는 한없이 모르쇠로 일관하며 미룰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어쩐지 인성과 능력과 성실함까지 빼어난 사람들과 일하고 있다. 그들은 밤새 작업을 하고 결국 오전 6시에 서면 수정안을 의뢰인에게 보낸 후, 잠시 씻고 출근하겠다는 메일을 남겨두고 보통의 변호사들이 출근하는 10시를 넘기지 않고 다시 회사로 돌아와 업무를 보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정시퇴근인데요'라고 건조하게 받아 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일이 넘치고, 회사의 지박령이 되어버린 담당 변호사들이 안타깝긴 하지만, 종종 정시퇴근을 하다 마주치는 그들이 '일찍'들어간다는 말을 할 때마다, 그들의 의도가 그런 것이 아닌지 알지만 명치 언저리에 돌덩이를 하나씩 턱턱 얹어 놓는 기분이다. 그들의 넘치는 업무량 덕분에, 당연히 그들을 돕는 것이 일인 나에게도 정시퇴근은 남일이 돼버린 지 오래다. 대체 누가 로펌비서는 칼퇴가 장점인 직업이라고 했나. 사실 로펌비서에게 칼퇴란 모든 경우의 수가 맞아떨어져야만 가능한 일이다.
야간접수도 있건만, 많은 의뢰인들은 오후 여섯 시 직전에 서면을 제출해달라는 요청을 빈번하게 한다. 물론 이것은 상대방 측에도 적용되는 일로, 가령 상대방 대리인이 퇴근 전 서면을 제출하면, 송무팀은 빨라봤자 퇴근 시간 직전 입수 문서를 회람할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해 변호사는 매우 애타 하고 있을 의뢰인에게 바로 서면을 발송하길 원한다. 설사 너무 바쁜 와중에 내 담당 전문가가 입수 문건에 대한 메일을 확인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오늘 입수한 문건을 내일 의뢰인에게 발송했다가 의뢰인으로부터 왜 늦게 보냈냐는 컴플레인을 받고 싶지 않은 비서는 애꿎은 상대방 대리인을 원망하며 안내 메일을 작성한다. 신속한 메일 발송 후 아직도 정시 퇴근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못한 비서는 마지막으로 누락된 업무는 없었는지 빠르게 확인 후 슬슬 핸드폰과 가방을 챙기려 하지만, 때마침 집무실에서 하루 종일 서면을 고치던 변호사가 튀어나온다. 그리고 보통 그들은 겸연쩍게 혹은 배시시 웃으며 '지금 부탁드려도 되는지'라는 말과 함께 지시사항을 쏟아낸다.
때문에 다수의 비서들은 애초에 18:00이 아닌 시간 외 근무의 시작시간인 18:30 전까지의 퇴근을 목표로 처연하게 책상 앞을 지키고 있다. 그리고 그마저도 퇴근시간이 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아무리 허상과도 같은, 규정에만 존재하는 정시퇴근에 익숙해졌다 할지라도, 퇴근 2분 전, 3분 전 문 밖으로 나와 할 일을 쏟아내는 그들이 가끔 원망스럽긴 하다. 그리고 그 지시사항이 아주 간단한 몇 개의 판결문 찾기라던가 간단한 데이터 정리라면 금방 처리할 수 있지만, 너무 바쁜 나머지 그들이 밤사이 검토할 날것의 자료를 당장 필요한 형태로 가공해달라고 한다거나 할 경우, 나는 예약해둔 병원 진료며, 학원이며, PT를 취소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로펌비서는 철저하게 내근직이다. 회의 전용 공간이 마련되어 있어 내방객을 만나는 일조차 극히 드물다. 3~4인을 기본적으로 담당하는 비서들은 자신의 부재 시 전문가의 불편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에, 업무 시간 내에 병원을 간다거나, 은행에 간다거나 하는 일이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설사 양해가 가능한 일이라도, 옆 자리의 동료들에게 걸려오는 의뢰인 전화에 대한 응대, 전문가들의 급작스러운 업무 요청을 맡기고 자리를 비우기도 매우 눈치가 보이는 일이다. 동료들의 업무량도 대개는 나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비서들이 점심시간에 은행에 가거나, 퇴근 직후의 시간에 평일에만 할 수 있는 미룰 수 없는 개인적인 일들을 처리하곤 하는데, 이마저도 갑작스러운 전문가의 사정으로 취소되는 경우가 매우 잦다. 또 안 하던 연애라도, 그리고 취미생활이라도 한번 해보려는 차에 이와 같은 상황이 일어난다면 모니터 앞에 앉은 나는 넋이라도 있고 없고의 얼굴로 업무를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하루 종일 사무실에 박혀 출근과 식사 그리고 화장실과 생수를 이유로 방 밖으로 몇 번 나오는 것이 다인 그와 그녀는 지척에 앉은 내게도 지시를 메일로 할 정도로 집중하고 있고, 나는 그들을 충분히 이해하며 또 방해하지 않기 위해 한번 마주칠 때마다 한꺼번에 확인을 받아야 할 상황에 대한 질문을 쏟아내야 하는 고충이 있을 정도이며, 같은 맥락으로 그 집중을 깨뜨리지 않기 위해, 그들이 오롯이 사건에 집중할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기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일상적인 비서들의 모습과 같다. 하지만, 우리의 그 집중과 주의와 노력은 되도록 업무시간에만 사용해줄 수 없을까.
기생충이 개봉하는 날은, 내게 아주 기다려지던 날이었다. 당시 인간관계로 스트레스에 절여진 상태였던 나는 '혼자서도 잘살기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기생충 개봉일에 맞춰 부티크형 극장의 좌석을 하나 예매해두었는데, 회사에서 여섯 시 정각에 출발해야 늦지 않게 상영시간을 맞출 수 있는 일정이었다. 무리한 것 아닌가 싶었지만, 그날은 전후로 중요한 기일도, 실사도, 회의도 없었었기 때문에 나름 칼퇴가 가능할 것이라 예상을 하고 사만 원이나 하는 좌석을 흔쾌히 예약했던 나였다. 하지만 나는 출발시간 2분 전 또 방문을 열고 나온 담당 변호사의 미안한 듯한 얼굴을 보며, 말없이 표를 취소하고야 말았다.
미안함을 충분히 느낄만한 담당 전문가의 태도로, 또 경제활동을 하는 사회인으로서의 책임감으로 나는 취소한 영화표가 아쉽기는 했어도 그럭저럭 괜찮았다. 금요일 저녁에 오히려 예매에 성공해 더 좋은 좌석에서 영화를 보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정작 화가 났던 것은 야근 다음 날의 회사의 '주의' 때문이었다. 나는 사전보고를 하지 않고 야근을 했다는 이유로 윗선의 주의를 받았다. 회사의 규정을 준수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회사의 규정을 준수하지 못한 나는 그 시간을 회사를 위해 일하고 있었다. 하물며, 급한 얼굴의 전문가로 인해, 청구하지도 못하는, 식사시간으로 간주되는 약 30분가량을 더 일했다. 과연 어떤 비서가 예측 가능한 일만 할 수 있겠는가, 야근 전 사전 보고라는 말 자체가 불필요한 절차라고 생각했던 내게 그날의 일은 무척이나 불합리하게 느껴졌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나는 로펌이 보통 '직원'의 야근을 곱게 보지 않는다는 인상을 받곤 한다. 52시간 근무제 시행 탓에 근로시간 감독을 위한 일이라고 해도, 야근에 대해 사전보고를 꼭 해야 한다는 압박이 있고, 그 사전보고에는 어떤 업무를 해야 하는지 그 목적과 사건, 그리고 소요 시간에 대하여 기재하도록 되어 있다. 회사 일의 연장이라고는 하지만, 모든 구성원이 다 하고 있지는 않은, 회사에서 업무시간으로 인정하지 않는 시간까지 투입하여 일 처리를 하고 있는 직원들에게 너무 엄격한 것 같다는 생각이다.
어떤 직원들은 경황이 없어 사전보고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예 야근수당을 청구하지 않고 더럽지만 그냥 일하고 간다 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 더러운 느낌은 회사의 근퇴 관리에도 같이 적용된다. 직원들이 업무시간보다 일찍 출근해 그날 업무를 준비하고, 퇴근시간 이후 그날 업무를 마무리하는 것에 대해서는 회사는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출근시간을 1분, 혹은 2분 넘은 사람들은 가차 없이 지각으로 처리하여 누적되는 수에 따라 연차를 차감하고, 또 그 수치로 '근퇴가 불성실한 직원'이라는 평가를 받게 하기도 하니까 말이다. 뭐, 어딘들 내가 원하는 대로 모든 게 갖추어져 있을까 싶지만, 살면서 가장 오랜 시간을 몸 담은 조직이 이렇게나 구성원들에게 야박하다는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일을 정해진 만큼만 하고 싶은 사람도, 일을 더 한 사람도 눈치꾸러기가 돼야 하는 슬픈 현실에, 내일은 또 늦잠 자서 지각을 늘리지 말아야지를 되뇌며 한 주의 첫 번째 밤을 흘려보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