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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서 C Sep 21. 2019

루틴한 일을 하면서 실수가 말이 돼?

공개처형의 추억



나는 지금  기차역 근처 카페에 앉아있다. 가족 모임에 가기 위하여 휴가까지 사용했다. 그러나 어제저녁부터 들떠 있던 마음은 KTX 출발시간이 5분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아직도 역까지의 도착 예정시간이 15분은 남아있던 도로 위에서 어떤 심연보다 깊이 착 가라앉아버렸다. 그렇지만 뭐랄까, 내겐 종종 있는 일이다.  주말을 앞둔 탓일까, 특실에 단 한자리만 남아있는 다음 차편은 내 통장을 또 가루로 만들었지만, 그보다 더 신경 쓰이는 것은 아주 공교롭게도 내가 지금 앉아 있는 이 카페가 생애 통틀어 내게 가장 더럽고 치사하게 굴었던 어떤 남자의 집 앞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남자는 내 자격지심의 과반을 생성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는 광화문의 한 외국계 은행에 재직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평범한 일상은 벌이가 시원찮은 내게 일면 과시적 소비로 보였을 정도로 그는 높은 보수를 받는 사람이었다. 해마다 소득증빙을 눈앞에서 팔랑이며 연봉 인상률을 자랑하던 그는 그 서류에 찍힌 금액만큼이나 아마 업무능력도 좋았을 것이다. 그 분야의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그는 입만 열면 회사의 이익을 창출하는 프론트(본인)와 결국은 회사의 비용에 해당하는 백오피스의 사람들을 구분 지으며 우월감을 숨기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물론 그때는 그 거만함도 좋아했지만, 법조계의 백오피스인 나는 그의 무신경한 말에 가끔은 화를 내기도 했다. 그렇지만 싸움에 싸움을 거듭하며 어느새 그의 못된 부분은 모른 척 포기하고 말았다. 한 5년은 나를 온탕과 냉탕을 넘나들게 하며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태웠던 그 사람은 결국 아무것도 아닌 사이가 되기까지 참 한결같이 내 직업을 못마땅해했다. 나 역시 인의예지가 부족했던 그에게 ‘넌 그냥 연봉 높은 환치기’라며 복수의 총알을 날리기도 했지만, 홍콩과 한국을 쉴 새 없이 오가며 대상포진까지 앓던 그의 스트레스를 목격할 때면 어쩐지 회사 전문가들의 짜증스러운 얼굴이 떠오르곤 했다.




그렇게 루틴 한 일을 하면서 실수가 말이 돼?


하루는 그가 뭉친 어깨를 주무르며 말했다. 그는 그의 업무를 보조하는 직원이 실시간으로 보고하는 수치를 잘못 기재한 것을 무척 어이없어하며 매번 하는 일이 그런 것인데, 실수를 하는 것이 말이나 되냐며 연신 실소를 해댔다. 실수를 한 것은 잘못한 일이고, 더군다나 돈을 다루는 회사에서 그녀의 실수는 큰 손실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상황이 맞긴 하지만, 그보다 앞서 내 뇌리를 스친 생각은 ‘돼. 나도 가끔 해.’였다.


세상 야무지고 똑똑한 척 손가락을 놀리고 있는 지금이지만, 사실 나는 기차를 놓쳐 도착을 했어야 하는 시간에 서울에서 기차를 탑승하게 될 정도로 원체 덜렁이는 성격으로 유명하다. 지금은 몇 년간 확인에 확인을 더하는 자세가 체화되어 덜해진 편이지만, 대충과 대강이 타고난 기질은 아닌지 생각해 본 적이 있을 정도이니 말이다. 어머니는 어릴 쩍 설거지라도 부탁할 때면 한 번은 내가 설거지를 한 그릇을 더 헹구곤 하셨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여기저기 남아있는 고춧가루는 내 성격의 어떤 표상과도 같았다. 그런 내게 점 하나로도, 단어 하나로도 의미가 달라질 수 있는 일을 취급하는 로펌에서의 일상은 매번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과 다를 바 없다. 간혹 타성에 젖어, 주의를 놓칠 때가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말이다.


로펌은 보통 메일을 통해 실시간으로 업무에 관한 내용을 주고받는다. 그리고 그 소통의 주체는 법인의 구성원들과 의뢰인이다. 보통 사건과 관련한 메일은 의뢰인-전문가가 수발신의 주체가 된다. 그런데 사건에 배당된 수많은 전문가들이 언제나 참조 수신인에 기재되어 있어 거의 모든 내용을 공유하며 사건을 운영한다. 어떨 때는 너무 많은 전문가들이 사건을 담당하고 있어, 일일이 챙기는 것도 일이 돼, 하나의 프로젝트 계정을 만들어 그 계정에 포함된 모두가 함께 메일을 받아 볼 수 있게끔 업무를 처리하기도 한다. 비서의 입장으로는 때문에 메일 하나를 발송할 때에도 유독 긴장이 될 수밖에 없고, 거의 모든 비서가 두 번 세 번은 내용을 체크하고 메일을 발송한다.



법인 직원들이 가끔 쓰는 ‘공개처형’이라는 말이 있다. 누가 처음 쓴 말인지는 모른다. 보통 모두가 같이 메일을 받아보는 이유로 메일상 어떤 마이너 한 부분에 대해 혼이 나거나, 실수에 대한 지적을 당하거나, 소속을 불문하고 의뢰인 혹은 특정 전문가의 컴플레인을 공개적으로 받았을 때 쓰는 말이다. 공개처형은 전문가→전문가, 전문가→직원, 직원→직원, 의뢰인→법인 구성원의 공수의 형태로 행해지며, 종종 목격이 되는데, 가장 재미있는 경우는 전문가 대 전문가의 공개처형이 결국 ‘현피’로 이어져 눈 앞에서 몸싸움이 일어난다던지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웃을 수만은 없는 이유는, 얼마 전 내가 그 공개처형의 당사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말해봐요...나한테 왜그랬어요...<출처:   KBS '공주의 남자'>



몇 년째 담당하고 있는 사건이 있다. 2016년부터 진행된 사건이다. 한 의뢰인이 상대방을 달리하여 약 9개의 사건을 진행하고 있는데 그 안에서도 민사/행정/형사 사건이 함께 진행되고 있으며, 각 재판부들이 진행되는 다른 사건의 추이를 지켜보고 방향을 정해보겠다 라며 사건을 처리하고 있기 때문에 타 사건에 대한 문서제출명령이 떨어지거나, 증거 일부를 재판부가 원하는 형태로 다시 제출해야 할 경우, 같은 내용을 몇 번이나 사건번호를 달리 수백 개나 되는 파일들을 네이밍 하며 처리해야 하기 때문에 모든 집중력이 소진되어 버릴 정도로 하루하루가 정신이 없다.


한동안 나는 나 스스로를 대견해하며 지냈다. 우리 측 신청 증인만 한 번에 4명은 출석하는 기일의 신문사항에 대해 그 제시자료를 9개의 사건의 자료를 뒤져 찾아 만들고, 송무팀의 도움 한번 바라지 않고 모든 것을 준비하여 기일 출석 전 주니어에게 전하는 순간에는 퇴근 후 취미도 아닌 맥주를 마셔야겠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그러던 와중에 다른 담당 주니어가 두 개의 실사 사건에 동시에 투입되어 귀찮은 실사자료 검수 작업까지 하게 되었다(실사를 진행하면 비서들은 손목에 터널 증후군이 올 정도로 반복적인 문서보안 해제 작업을 해야 한다). 딥빡이란 이런 것인가를 느끼는 와중, 그래도 이 정도는 껌이지를 몸소 증명하고 싶었던 ‘그날의 미친 나’는 하나의 기일이 종료되면 으레 의뢰인에게 발송하는 기일보고 결재본을 메일로 받자마자 바로 포워드 하여 의뢰인 발송용으로 작성하였고, 관련 파일을 이메일에 첨부하여 신속하게 발송했다.


순간, 모니터 하단에 알림이 떴다. 발신인을 보고 사건의 가장 시니어이자, 팀 내에서 팀장보다 높은, 사법연수원 교수급의 시니어 K었다. 이름을 보고 나는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알림을 클릭해 창이 넘어가는 순간에도 식은땀이 났다. 혹시 이번 기일보고가 진행상 아주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초안 작업을 했던 나는 이미 그런 경우는 아닌 것을 알고 있었고, 그 짧은 시간에도 혀가 타들어 갈 것 같이 초조했다.



사건번호 오기입니다.

이런 사소한 실수로도 의뢰인에게 신뢰를 잃을 수 있으니 사과 메일을 드리세요.


순간 아,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블랙아웃이란 정말 허상의 표현이 아니구나를 실감했다. 다른 사건의 메일이 잘못 포워드 되었던 것을 나는 발송하고서야 깨닫고 만 것이다. 명백한 잘못한 실수다. 변명의 여지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만약 관련 내용이 다른 의뢰인에게 나갔다면 나는 변호사 비밀유지 조항을 깨버린 것이 되었을 것이다. 대한민국 법원은 사건검색 시 관할 법원/사건번호/당사자를 모두 입력해야만 그 진행상황을 볼 수 있게 해 주고, 판결서 열람 시에도 그 내용은 공개하되 제 3자는 당사자의 이름을 볼 수 없게 처리하는 등 사건에 관련한 개인정보를 엄격하게 관리하는데, 변호사들의 의무인 비밀 유지 조항이 직원인 내 실수로 위반될뻔한 것이다.


나는 바로 오기를 정정하고, 실수에 대한 반성의 마음을 담아 메일을 보냈다. 의뢰인은 다행히 별도의 컴플레인은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나는 큰 실수를 체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사건 모든 관련자들이 내 실수를 목격했고, 지적을 당한 순간까지 함께 보았다는 생각이 들어 수치심에 식은땀이 뻘뻘 나고 얼굴은 벌게졌다. 자의식 과잉이시네요 라고 한다면 할 말 없지만, 마침 또 판옵티콘처럼 생긴 사무실 공간 안에서 모두 내 실수를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고, 내 맞은편 집무실은 전문가가 모두 부재하였으니 망정이지, 누군가 있었다면 낮술하고 왔냐고 물어봤음직한 상태의 얼굴로 남은 일과를 보냈다.


담당 전문가는 내게 따로 메시지를 보내어 ‘당황하지 않으셨냐, 괜찮다. 나도 종종 하는 실수다. 맘에 담아두지 말아라 '라는 위로를 건넸다. 그녀의 온정에 어쩐지 콧잔등이 시큰했지만 이후 넋이 나가 남은 일과를 보낸 나는 퇴근길 시니어 K를 엘리베이터 앞에서 마주쳤다. 그분은 평소에도 뒤끝이 없고, 온정이 있다는 평을 받는 분이었는데, 아까는 제 실수로 불편을 드려 죄송했다라고 했더니 많이들 하는 실수이다. 하지만 우리가 하는 일이 이렇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큰아버지처럼 웃으며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그날 이후로 나는 또 한동안 알게 모르게 풀어져 있던 나의 정신머리를 다시 붙들어 신입이 된 마음으로 메일 한번 발송에도 광적으로 거듭 확인을 하고 보냈다. 어떨 땐 너무 불안하고 나를 믿을 수가 없어 간단한 메일 하나도 아주 오랜 시간을 메일을 들여다보다 발송하고는 했다. 요즘 젊은이들이 말하는 현타란 이런 것인가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아직도 나는 실수로 누군가의 지적을 받을 때마다, 백오피스를 아주 한심스러워했던 그의 얼굴과 실소가 떠오르곤 한다. 아마 겉으로 표현은 하지 못할지라도 어딘가에서 전문가들은 그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을 지 모를 일이다. 아니, 분명 그럴 것이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지고, 공개처형은 그 직급과 지위를 가리지 않고 여기저기서 많이들 행해지고 당하고 있지만, 나 역시 새벽까지 문건을 작성하고 동이 틀 무렵 잠시 씻으러 집에 다녀오겠다는 그들의 노력이 나의 부주의로 신뢰성을 잃게 하는 것이 무척 미안할 때가 많다. 미안한 만큼 더 사과할 일을 만들지 않아야 할 텐데 미안하게도 나는 내가 또 실수 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물론 그 실수를 줄이려는 노력 또한 동시에 하고 있지만. 이 노력을 알아주고, 그들의 관대함이, 또 인내가 바닥을 드러내지 않길 바라며, 집으로 가는 기차 위에서 열근한 직장인처럼 한 주를 마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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