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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록 May 09. 2022

제주일기 04 아픔보다 포기가 더 받아들이기 힘든 법

꼬닥꼬닥 혼자 걷는 올레길 3-B코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오늘의 제주 날씨보다도 먼저 체크한 건 발의 상태. 침대에서 내려와 발을 디뎌보니 약간 욱신거리긴 했지만 지난밤 숙소로 돌아올 때만큼 쑤시진 않아서 3코스를 걸으러 가기로 했다. 대신 오늘은 쪼리 대신 다시 등산화를 신고 출발! 약국에 가서 첫날과 둘째 날에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발목 보호대와 종이 반창고, 밴드를 구매했다. 밥보다 발 관련 약품에 쓴 돈이 더 많은 것 같아 소 잃고 외양간을 고치는 기분이 들었다. (잃었더라도 잘 고쳐지면 모르겠는데 안 고쳐질까 봐 불안하기도 했고.)


오늘은 이틀 전 마무리했던 2코스의 끝자락인 온평포구부터 걸음을 시작한다. 이틀 전엔 온평포구에서 나와 성산으로 돌아갔지만 이번엔 서귀포에서 온평리로 다시 들어가는 코스! 201번을 타고 1시간 30분을 달리고 달려(첫날 공항에서 신흥리로 가던 때만큼이나 멀미도 엄청났다) 온평초등학교 정류장에서 하차했다. 정류장에서 2코스 종점이자 3코스 시작점인 온평포구까지는 천천히 걸어서 10분 정도 걸렸다. 잠깐 걸었는데도 걸을수록 발목이 조금씩 더 아파오고 터졌던 발가락의 물집들 부근이 화끈거리기 시작해서 어쩔 수 없이 온평포구 정자에 잠시 앉았다. 발볼이 좁은 등산화 속에 갇혀 아우성치던 발가락들... 양말을 벗어보니 자기들끼리 쓸리고 쓸려서 화상처럼 발가락 사이가 벌게져 있었다.


다시 돌아가기엔 1시간 30분이나 달려온 거리가 아까워 급한 대로 대충 발가락에 밴드를 덕지덕지 덧붙인 채 3코스를 걷기 시작했다. 온화하고 평화로운 마을이라 온평리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이곳은 정말 그 이름이 잘 어울리는 동네였다. 날씨는 맑고 바다는 고요하고 마을은 평화로웠다. 주인 잘못 만나 고생 중인 발목과 발가락들을 생각해서 정말 천천히 걸었다. 올레길 중간에 바다와 대조적인 검은 현무암 돌덩이들 위로 걸어 다니는 코스가 있었는데 발목이 가루가 되어 사라지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팠다. 한 발 디딜 때마다 왼쪽은 물집 때문에 화끈거리고 오른발은 발목이 시큰거렸다. 왼쪽은 발가락이 문제 오른쪽은 발목이 문제라니 이제 막 걷기 시작했는데 남은 14km를 어떻게 걷나 막막해져 왔다.


충격에 예민해져버린 발가락, 발가락마다 밴드 외투를 입혀주었다.


그래도 걸음을 멈출 순 없었다. 이미 시작한 거 표선까지 끝장을 봐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빠르진 않지만 천천히 한 걸음씩 발걸음을 옮겼다. 작은 걸음들을 모아보니 금세 해안가와 멀어져 작은 숲길로 들어서게 됐다. 연듸모루 숲길이라는 곳이었는데, 간세와 리본이 없었다면 입구 인지도 모를 정도로 좁은 길이었다. 해가 쨍쨍했으니 망정이지 어둡거나 비 오는 날이었다면 우회로가 없는지 다시 한번 찾아볼 것 같았다. 앞서 간 사람들도 이 길을 걸었을 거라고 위안하며 숲길로 들어서니 땡볕에 걸으며 달궈진 몸이 차게 식는 것이 느껴졌다. 뻘뻘 흐르던 땀이 다 식을 정도로 시원해서 숲길이 끝나는 지점쯤에서는 들어오기 싫어했던 게 미안할 정도로 좋았다. 볕에서는 그렇게 더웠는데 그늘로 들어오자마자 이렇게 시원해지다니. 봄이어서 그런 걸까, 제주는 원래 이런 곳인 걸까!


무섭지만 상쾌했던 숲길을 지나 다시 해안가 길로 접어들었다. 온평에서 숲길로 들어갔는데 나와서 걷다 보니 신산리가 나왔다. 온평에서도 봤던 환해장성이 나를 맞아주었다. 환해장성은 제주에 침입하려 하는 몽골을 저지하기 위해 만들어졌는데 이후 계속 보수해 조선시대에 왜구의 침입을 막는데도 활용되었다고 한다. 바닷가를 따라 쌓아 놓은 환해장성을 보며 과거 이곳에 사신 분들이 얼마나 간절한 마음으로 돌을 쌓았을지, 얼마나 두려운 마음으로 이곳을 지켰을지 상상하며 걸었다. 과거의 조각을 따라 걸으니 중간 스탬프가 있는 신산리 마을카페까지는 약 2.5km, 천천히 걸어 40분이면 도착할 정도로 가까워졌다.


간세가 없었다면 입구인지 몰랐을 연듸모루 숲길과 간절한 마음이 담긴 신산 환해장성


하지만 신산포구쯤 갔을 때 발이 너무 아프고 배고파서 힘도 빠지는 바람에 더는 못 걸을 것 같았다. 포구 옆 정자에 앉아 한참을 생각했다. 여기서 포기하고 서귀포 시내로 돌아가는 게 맞을까, 아니면 끝까지 다 걷는 게 맞는 걸까. 발을 조금 쉬어주니 그래도 다시 걸을 수 있을 것 같은 용기가 생겼다. 그래서 일단 신산리 마을카페까지만이라도 가보기로 했다. 800m만 가면 카페인데 중간 도장을 찍고 쉬면 조금 나아질 거란 생각에서였다.


쉴 때 잠시 괜찮아졌던 건 내 착각이었던 걸까, 정말 모든 걸음마다 고비가 찾아왔다. 걸으면서 god-길 노래를 계속 흥얼거렸다. '나는 왜 이 길에 서있나, 이게 정말 나의 길인가' 아주 와닿는 가사여서 몇 번이고 그 부분을 불렀다. 내가 왜 올레길을 걷는다고 해서 사서 고생하나 싶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바다 한번 바라보며 복잡한 마음을 애써 털어냈다. 어차피 이런 생각을 해봤자 피곤한 건 결국 나라서 최대한 중간 지점에 도착할 생각만 했다. 바다를 계속 보며 천천히 걸음을 옮겨 30분 만에 카페에 도착했다.


카페에서 아침, 점심 대신 에이드와 아이스크림으로 허기를 달랬다. 발이 아픈 건 신발의 발 볼이 좁은 탓인 것 같아서 서귀포 시내에 있는 abc 마트에서 신발을 새로 사기로 했다. 근데 시간 계산을 해보니 지금까지 걸었던 속도로 가면 서귀포 시내에 너무 늦게 도착할 것 같아서 속도를 좀 내야 했다. 발이 아파도 오늘 나온 김에 3코스 종료지점인 표선까지 가고 싶은 마음에 에이드를 원샷하고 카페를 나섰다.


신산리마을카페의 녹차 아이스크림 매우 추천합니다.


올레 패스포트에 나와있는 대로라면 3km를 더 가면 신풍 목장이, 거기서 3km를 더 가면 배고픈 다리가, 그리고 3km 정도를 더 가면 표선이었다. 2시간 30분 동안 5.4km를 걸었으니 조금 더 속도를 내서 3km를 1시간 이내로 걸어서 최소 5시 30분 전에는 표선에 도착한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웠다. 발목 안 아플 때도 1km가 15분이 걸렸으니 지금 상황에서는 원대한 계획이 맞는 것 같다.


신산리 카페에서 목장까지 가는 길은 계속 해안 도로를 끼고 걷는 길이었다. 서쪽으로 향하는 여정에 오후가 되어 서쪽으로 내려오는 태양 때문에 햇빛을 정면으로 맞서며 걸어야 했다. 다행히 길의 오른쪽엔 양식장이 늘어서 있어서 그나마 건물 아래로 걸으며 더위를 식힐 수 있었다.


발목 아픈걸 꾹 참고 서둘러 걸은 덕분에 50분 만에 신천목장에 도착했다. 겨울에 왔으면 귤피 말리느라 목장이 온통 주황빛이었을 텐데 4월이라 아무것도 없었다. 광활한 목장이었지만 목장 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고 옆길로 쭉 걸어볼 수는 있었다. 18년도부터 겨울의 신천목장을 오겠다고 다짐했는데 결국 4월에 방문한 게 아쉬워 이번 겨울에는 꼭 다시 와보기로 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시원한 가시거리, 이제 막 푸릇해지는 목장


배고픈 다리까지 가는 길은 태양과의 싸움이었다. 노출한 부분이라고는 마스크로는 가려지지 않는 얼굴 반쪽과 옷소매로 가려지지 않는 손 반쪽뿐인데 그 부분만 타서 이상한 꼴이 될까 봐 신경이 쓰였다(그리고 결국 손은 손가락 부분만 까맣게 타버렸다.). 모자는 깊게 눌러쓰고 손을 그림자로 숨기며 까매지지 않기 위해 애쓰며 걷던 그때, 갑자기 길가의 풀숲에서 바스락 소리가 나더니 무언가가 확 튀어나왔다. 제주에 내려와서 가장 크게 소리를 낸 순간이었다. 정말 깜짝 놀랐는데 길냥이 었다. 하.. 날 놀라게 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자기 갈길 가는 녀석을 사진 한 번 찍어주고 걸음을 재촉했다.


지도를 보면서 배고픈 다리가 도대체 뭘까 싶었는데, 해당 장소에 도착하고 나서야 그 뜻을 알았다. 이름 그대로 배고픈 사람의 배처럼 푹 꺼진 다리여서 배고픈 다리였다. 실제로 움푹 들어간 다리여서 만조 때는 건널 수가 없고 우회해야 한다고 쓰여있었다. 다행히 내가 갔을 땐 천도 말라있고 만조도 아니어서 무사히 건넜다. 낚시 준비하시는 분들을 보며 '저분들은 앉아서 낚시하시니까 너무 부럽다'는 생각을 한걸 보니 정말 엄청나게 힘들었던 것 같다.


의기양양하게 쳐다보던 고양이, 만조때는 건널 수 없는 배고픈 다리


배고픈 다리도 지났고 이제 종착지인 표선만 남았다. 다리가 천근만근이었지만 고지가 코앞이라는 생각에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언제 도착하는지 막막해할 즈음 저 멀리 해수욕장처럼 보이는 곳이 등장했을 때 긴장이 확 풀렸다. 드디어 완주 스탬프를 찍는 순간이 눈앞에 그려지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성산일출봉 근처를 걸을 때도 그랬듯 해수욕장의 반대편까지 가는 길도 좀처럼 좁혀지질 않았다. 시큰거리는 발을 가지고 한 걸음씩 움직였다. 조금씩 걸어 소금막에 도착했고, 조금 더 걸어 표선 해수욕장에 도착했다. 표선 해수욕장을 크게 돌아가라고 나와있었는데 물이 없어 모래밭처럼 보이는 해수욕장을 바로 가로질러 갔다.


길의 끝에 보이는 간세 스탬프는 정말 없던 힘도 나게 만든다.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서 스탬프를 찍었다. 녹초가 된 나는 밥 먹을 생각도 못하고 바로 서귀포 시내로 갈 방법을 찾았다. 최대한 걷지 않는 경로를 찾아서 환승을 했다. 환승하는 길에 있는 약국에서 발을 위한 소염 진통제와 메디폼을 구매했다. 저녁으로 먹을 빵도 샀다. 새끼발가락 부근이 화끈거렸지만 애써 무시하고 201번에 탑승했다.


시내에 내려 어기적거리며 5분이나 걸어 abc 마트에 갔다. 발볼이 최대한 넓은 운동화를 골라 신어보니 등산화와는 차원이 다른 편안함이었다. 처음부터 이런 신발을 신고 걸었으면 발가락도 발목도 모두 무사했을 텐데, 무지렁이가 고집을 부린 대가는 너무 컸다. 신발을 구매한 뒤엔 집 근처에 있는 하나로마트에서 간식거리를 샀다. 버스 정류장에 내려서 집까지 오는 길이 1km 정도였는데 그 길을 걸어오는 게 10km를 걷는 것처럼 느껴졌다.


집에 와서는 발가락에 또다시 생겨버린 물집을 모두 터뜨렸다. 약국에서 소염진통제로 발목이 나아지지 않으면 꼭 병원에 가야 한다고 해서 아마 곧 병원에 가야 할 것 같다. 매일매일 1코스씩 걷는 게 목표였는데 시작부터 삐걱대더니 역시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이럴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빠르게 올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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