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데 여보가 임신기간에 너무 힘들었으니까 오로지 여보가 결정할 부분입니다. 담엔 피임 꼭 할께요'
이 카톡의 행간에는 '걱정되면 사후피임약이라도 먹어요'의 의미가 숨어있다.
아내의 답변은 이랬다.
'ㅋㅋㅋㅋ뭐야 왜케 진지함ㅋㅋ'
아내는 진짜 임신기간이 파란만장했다. (이 부분도 각 단계별로 나중에 상세히 기술하겠다.)
그래서, 냉동난자의 냉동 기간 연장 여부를 묻는 병원의 문의에, 생각할 것도 없이 단칼에 "폐기하겠습니다."라고 단호히 말했다.
"어, 그게 그렇게 고민도 없이, 나랑 상의도 없이 혼자서 결정할 일이야?"
했더니, 아내가 바로 뭔가 쏘아 붙일 기세로 입술을 들썩이길래
"그래 어련히 니가 고민했을까. 너의 결정을 존중한다." 고 꼬리를 내렸다.
그런 히스토리가 있는 만큼, 우리는 둘째를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전혀 없는 상태였다.
아내의 'ㅋㅋㅋ뭐야 왜케 진지함ㅋㅋㅋ'과 달리 나는 나름 진지하고 심각했다. 연초부터 운동으로 단련된 허벅지의 힘과 오랫동안 인내했던 굶주린 Sperm들과 그리고 늘상 마음속에 새겼던 노콘노섹을 어긴 결과의 콤비네이션은, 사실 불보듯 뻔했다. 자연임심은 어렵다고, 그렇게 자신을 과신해서는 안된다, 결코.인생은 그런 것이다.
하지만, 또 어떤 행복들은 예기치 않은 이벤트에서 온다,는 걸 경험치로 알고 있다. 아내와의 만남도 그랬다. 우리 둘다 같은 대학 동아리 선후배 사이였는데 졸업 후 한번도 본 적이 없다가, 7년만에 합정에 있는 교회 앞에서 우연히 만났다.
"오빠! 진짜 오랜만이다. 오빠도 이 교회 다녀?"
"우와 얼마만이야. 반갑다!"
"언제 밥 한 번 먹자!"
"응...그...래...그.러..자..안녕. 담에 또 봐"
우리 둘 다 결혼 적령기였고, 난 대번 어떤 위험 신호를 감지했다. 언제 밥 한 번 먹으면 난 쟤랑 틀림없이 결혼할 것 같은 느낌. 그래서 다음에 또 보자고 말은 했지만 내심 다음에 또 볼 일 없겠지 하는 다른 마음을 가졌었다.
그러다 우연히 또 한 번 만나게 되었고, 그땐 진짜로 실제로 밥을 먹었고, 그렇게 어쩌다 또 데이트를 하고 영화를 보고 또 여행가고 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덧 예식장에 함께 들어서고 있었다. 인생은 그런 것이다.
그때 아내와 처음 함께 봤던 영화가 '겨울왕국'이었고 지금은 딸아이가 '레디꼬'를 부른다. 겨울왕국이 또 하필 어마어마하게 재밌었다. 구 여친 현 아내는 연신 재밌었다고 말하면서볼이 상기되었고, 영화 얘기를 하면서 눈알이 반짝반짝하는데 또 그게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
결혼도 임신도 모두 우연의 결과였지만, 아내와의 만남도 자녀와의 만남도 사실은 다 하나님의 큰 계획 속에 일부가 아니겠는가.
마케팅의 귀재다. 그 어떤 출산 장려 캠페인보다 더 효과적이다.
일론 머스크가 우리나라의 미래를 다 걱정한다. 일론 머스크는 자녀가 7명이니, 뭐 그런 말을 할 자격은 있는 것 같다. 그의 트윗을 보면, 그는 진심 마케팅의 귀재다. 간략한 문장 하나가 그 어떤 출산 장려 캠페인보다 더 임팩트가 있다.
머스크는 또 다른 트윗에서 잘 사는 지역, 고학력자일 수록 아이를 적게 난다고 지적한다. 아마 바이든 행정부에 보내는 일종의 출산정책에 대한 압박이 아닌가 싶다.
아내는 강남에 사는 본인의 친구들은 다 아이가 하나라면서, 우리는 서울 변두리에 살면서 어떻게 아이를 둘이나 키워, 라고 푸념했다. 왜 아내의 친구들, 회사 동료들은 죄다 강남에 사는 지 모를 일이다.
둘째를 임신하고 심란한 마음에, 그리고 계획에 없는 둘째를 임신시킨 씨의 주인으로써 미안한 마음에
둘째를 이미 키우고 있는 친구들에게 연락을 했다. MBTI J(계획)형으로써, 지피지기면 백전불패의 마음으로 미리 알고 다시 한 번 육아전투에 나서보자는 심산이었다. 그리고 둘째가 있으니 진짜 너무 좋더라는 이야기를 내심 듣고 싶었다.
생각할수록 전쟁같은 육아에 다시 돌입한다는 마음은 아득하게 다가왔다. 내가 하고 싶었던 많은 계획들을 변경해야 하고, 내 취미와 내 삶이 다시 뒤로 밀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올 해는 우리가 또 새 집으로 이사를 가야 하고, 이제 이직한 새로운 회사에서 적응하며 내 성과를 보여야 하고. 그리고 자산도 차곡차곡 모아 미래를 준비해야 하고.
계획하지 않은 임신은 이렇듯 머리를 복잡하게 한다.
그래서 나는 머리가 복잡할 때 마다 야트막한 동네 뒷산을 올랐다. 걷고 뛰고 오르면서 '나는 왜 이리 생각이 많을까. 단순했으면 좋겠다. 감사가 넘쳤으면 좋겠다' 어쩐지 기도하는 마음이 되었다.
예상과 달리 동네 뒷산 등반(?) 효과는,막힌 가슴을 뻥 뚫어주는 게비스콘 마냥 정말 빠르고 좋았다. 시원한 바람과 초록한 풍경, 적절한 숨참(헉헉), 등 뒤로 흐르는 땀에 복잡한 생각들이 뇌를 거치지 않고 저기 한강 너머로 다 발산되는 기분이었다.
생각이 복잡할 때, 몸을 움직이는 건 진짜 큰 도움이 되었다. 올 초에 읽은 '운동화 신은 뇌' 책의 내용이 사실이었다.심장 박동수를 일정 이상 끌어올리는 운동을 해라. 뇌 세포 배열이 바뀐다.
정말이지 생각이 가지런해지고, 용기가 생기고, 걱정이 감사로 바뀌고, 기쁨이 솟아 올랐다. 그래서 종내에는, 산에서 내려오면서 휘파람을 부르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꼬물거리는 아이가 또 태어나면 우리에게 얼마나 큰 기쁨을 줄까 상상하면서.
그래 내 삶이 뭐가 그렇게 중요하겠어. 내가 하고 싶은게, 내 취미가, 내 여유시간이 그렇게 가치가 있는 일이었을까. 기껏해야 남는 시간에 코인하다가 깡통차겠지. 돈 많이 벌어서 다 어디다 쓸까. 내가 하려던 계획들을 내가 다 지키긴 했던가. 더 이상 나만을 위한 삶은 재미없지 아무렴. 나만 생각하면서 내 인생을 즐기겠다 그건 진짜 이기적인 생각이지. 여행 못 가는 게 또 어때서.
이게 자기합리화인지 아니면 진심인지 모르지만, 이렇게 생각과 논리들을 정리하면서 내 가치관을 보정해 갔다.
그래, 나는 늘 단단한 남자이자 가장이 되고 싶었다. 아내에게 힘든 일이 있을때면 내가 든든한 울타리이자 기댈수 있는 단단한 나무가 되고 싶었다. 우리 자녀에게도 마찬가지.
그리고 결혼 전 생각하던 가정의 이상적인 형태는 4인 가족이었다. 이건 스테레오타입이자 가정의 최소 조건이자 결혼의 디폴트값이다. 드디어 그걸 실현할 수 있는 길이 생긴 것이다. 아 신나!
아내와 내가 만났을 때 겨울왕국1이 나왔고, 첫째가 2살일 때 겨울왕국2가 나왔다. 겨울왕국3는 아직 미정이라는데. 근데, 겨울왕국1을 우리 둘은 대사를 다 외우다시피할 만큼 재밌게 보았지만 어쩐 일인지 겨울왕국2는 보지 않았다. 마침 첫째 아이가 2살때여서 육아하느라 영화관 갈 시간도 없었고, 육아에 지쳐 영화를 보고 즐길 만한 마음의 여유도 없었던 듯 하다.
겨울왕국 OST는 내게 말을 건다.
복잡한 생각들을 Let it go 하고, In to the unknown 한 세상으로 또 기쁘게 발을 내딛으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