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효율에 절여진 뇌에 여유 한 스푼

by 꼬르따도

저는 여름을 좋아합니다.

적당히 더우면 여름을 좋아한다고 말을 꺼낼 수 있지만, 7월인데 벌써 이렇게나 더우면 쉽게 여름을 좋아한다고 말을 꺼내기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누군가에게 이 더위가 재앙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수정할께요, 적당히 더운 여름을 좋아합니다.


여름엔 공기가 팽창하고, 팽창된 공기에 열이 들어찹니다. 딸아이가 가져온 공부 자료를 봤더니 습도는 상대적이라고 합니다. 온도가 올라갈수록, 동일 공기 안에 같은 량의 수분이 있어도 습도는 더 낮게 측정됩니다. 그러면 여름날 습도가 70%에 달하면 공기 안에 수분이 얼마나 많은 걸까요. 에어컨 없이 자고 일어났더니, 마치 수영장에서 나온 것 같다는 제 말이 아예 틀린 말이 아닌 셈이죠. 불어오는 바람도 시원하기는 커녕 후덥지근합니다. 그러면, 또 생각하게 되는 거죠. 내가 좋아하는 계절이 왔구나, 하고. 쭈쭈바 하나 빨아야겠다, 하고. 마침 쭈쭈바를 사러 편의점에 가는데, 옆에 있는 중학교에선 애들이 이 더위에 축구를 하고 있습니다. 그늘에 섰다고는 하지만 태양 빛이 나뭇잎을 뚫고 들어오네요. 아이들은 이 더위에 공을 차면서도, 나한테 패스 좀 하라고 x발 하는 청량함을 잃지 않습니다.


여름 재질의 드라마나 영화도 좋아합니다. 이를 테면, 여름 향기나 그해 우리는 같은 드라마들. 내용은 별 게 없지만 빤한 클리셰들마저 반갑습니다. 키스와 같은 결정적인 장면에는 반드시 슬로우가 걸리기 마련인데 그때 마침 비가 온다거나 하는 장면들이, 그림이 참 좋습니다.


그해 우리는 은 OST로 먼저 접했습니다. 일할 때 틀어놓으면 적당히 듣기에 좋더라구요. 뷔나 비비, 이승윤, 10cm 등 라인업도 화려해요. 노래가 너무 좋아서, 그래서 드라마도 언젠가 본다, 본다 하다가 넷플릭스에서 자꾸 추천하길래 (제가 비슷한 재질의 장르를 좋아하는 줄 알고 줄기차게 추천목록에 뜹니다) 못이긴 척 정주행을 시작했습니다. 지금 9화째 보고 있는데, 아 사실 제 취향이 아닙니다, 저는 잘 못 보겠더라구요. 결국엔 끝까지 보게 되긴 할텐제 지금은 실눈으로 보고 있어요.


이미 완결된 드라마니까 결론은 해피엔딩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지난한 말다툼과 밀당들, 그리고 엮이고 엮이는 주변 인물들. 계속 국연수 곁을 멤도는 스토커 같은 그 PD 양반도 싫어요. 일부러 계획적으로 피했다는 대사도 별로고, 그 양반 나오는 장면 하나하나 다 작위적이고. 아 이게 이 드라마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을텐데 저는 저런 부분이 먼저 보이더라구요. 저도 꽤나 이런 장르의 이야기를 좋아하는데, 그해 여름은도 진짜 좋아해야 마땅한데, 왜 이렇게 겨우 보게 되는 걸까요. 그렇다고 재미가 없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결국, 이 드라마를 즐기지 못하는 제 자신을 반성하게 됩니다. 40대 중반의 저는 이 이야기를 견디는 게 힘이 듭니다. 결국은 끝까지 보게 될 테지만요ㅎㅎ


*


자 그러면, 이제 제 자신은 어떤 사람인지 들여다 볼 차례입니다. 40대 중반 남자이자, 소프트웨어 개발 프로세스를 기반으로 시스템 구축하는 업무를 합니다. 그리고, 문학 작품을 읽는 것을 좋아하고, 마블 영화보다는 잔잔한 영화를 선호합니다. 우당탕 쿵탕 싸우고 때리고 변신하는 스케일이 큰 영화를 보면 십중팔구 나도 모르게 잠이 듭니다. 하지만 기차 안에서 주구장창 수다만 떠는 장면은 눈을 못떼고 봅니다. 어제는 강남역에서 구걸하는 아저씨 곁에 무릎 꿇고 앉아 그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어떤 아가씨가 있었는데 그 장면을 보고선 눈물이 났습니다. 요새는 눈물이 쉽게 터져 나옵니다. 어제는 팀장님과 업무 중간 평가를 했는데 회사 생활이 어떻냐고 묻자, Not Bad로 답했습니다. 사실은 저는 Good에 가깝습니다만 일부러 좋은 척은 하지 않습니다. 호구로 보일까봐서요, 일을 더 던질까 걱정되어서요, 순식간에 계산적이 되어 마음을 숨깁니다. 팀장님은 10년이 넘게 품질 업무를 했는데, 그 업무를 오래 하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걱정이 많은 사람이 되었답니다. 좋게 말하면 Risk 기반으로 사고하게 되었다는 거죠. 좋은 걸까요?


사실, 지금 나이가 되면 밀당 같은 걸 못 보겠어요. 그거 시간 낭비입니다. 그해 우리는 에서도 국연수가 최웅을 떠날 수 밖에 없는 사정이 나중에 밝혀질텐데, 그게 꽤나 눈물샘을 자극할 듯 한데, 그 전에 왜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솔직하게 얘기를 못 꺼내는 걸까요. 저는 그 부분이 의문 스럽습니다. 제일 힘든게 이유를 알 수 없는 거잖아요. 잠수 이별 같은 거.


누구나 본인이 가진 약점이 있고 한계가 있어서 그 부분에서 움츠려들 수 밖에 없긴 하지만, 가난이 국연수에게는 약점이었을텐데. 제가 그 20대와 30대를 겪어서인지 그와 같이 사람 힘들게 하는 장면들을 못 보겠습니다. 왜냐면 저도 그 시기가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리고, 시스템 구축 업무를 오래 하다 보니, 명확한 의사 결정을 통해 도출된 명확한 요구사항들을 좋아합니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다고 애매하게 말하는 사람들을 싫어해요. 내 시간과 에너지를 빼앗는 사람들이죠. 그러면 제 일이 아닌데도, 제가 그냥 정리까지 하고 맙니다. 또 그 애매한 말들을 듣느니, 그냥 내가 하는 게 나아요. 좋은 방법도 권장할 수 있는 방법도 아닌데, 지지부진한 회의만 하고 결론이 없으면, 저는 그 시간이 너무 아깝더라구요.


그 얘기를 회사 동료에게 했더니, 이렇게 시간이 흐르든, 저렇게 시간이 흐르든 그 시간을 통해 받는 월급은 동일하다는 말을 했습니다. 꽤 현자 같은 말이지만 맞는 말입니다. 연구개발을 하는 시간에도, 전표 처리를 하는 시간에도 같은 시간이 흐르고 있고, 그 시간을 통해 받는 월급은 동일합니다. 그 시간에 불평을 늘어놓을 것인지, 그냥 뇌를 비우고 기계적으로 일을 할 것인지 선택은 오로지 나의 몫입니다.


제가 30대에 이 드라마를 봤으면, 진짜 좋아했을 것 같아요. 매일 이 드라마의 OST를 들으며 내가 마치 최웅이 된 것 마냥 아련하게 사념에 빠졌을 지도 모를 일이구요. 20대, 30대 때에는 그래도 됩니다. 사실, 지금도 그래도 됩니다. 콘텐츠는 동일한데 변한 건 제 자신 입니다.


제가 어떤 사안을 바라보는 시야와, 그걸 해석하는 방법과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그러니까, 이건 제 잘못이라기보다 사회가 저를 이렇게 만든 거죠ㅎㅎ

효율적으로 살아라. 시간 낭비하지 말아라. 담백하게 일해라. 엮이지 말아라.


그해 우리는, 을 보면서 말다툼하고, 밀당하고, 뒤에서 지켜보고, 혼자서 후회하고 하는 장면들을 지켜보는게 힘들었습니다. 근데, 사실 사랑이 효율이 아니잖아요, 이야기가 논리적일 필요도 없고, 세상에 시간 낭비라는 말 만큼 폭력적인 말이 또 어딨어요. 근데, 지금까지 회사에서 일하다보니, 뇌가 극효율에 절여지고 편협해 졌나 봅니다. 비효율을 싫어하고, 중언부언을 싫어합니다.


그니까 앞으로 바꿔 가야 하는 건

T로 절여진 제 삶의 태도에 여유를 채워 나가는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는 분명, '그해 우리는'을 내가 좋아해야 하는데, 좋아하지 않은데서부터 시작된 생각입니다.

내가 뭔가 잘못되었구나,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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