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연례행사처럼 출간하다 보니, 만나는 사람들마다 읽었다는 내 책이 다르다. 누군가는 10년 전의 책을 읽은 적이 있다 하고, 누군가는 며칠 전에 나온 책을 벌써 읽었다는 식이다. 요즘에는 연재하는 신문이나 잡지에서 칼럼을 꾸준히 잘 읽고 있다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많은 사람은 SNS에서 읽었다는 사람들이다.
SNS에서 글을 읽었다는 사람들 중에는 내가 쓴 책을 하나만 추천해 달라고 하기도 한다. 그러면 대개 상대의 취향을 먼저 묻는다. 평소에 책을 거의 읽지 않는다고 하면 <너는 나의 시절이다> 정도를 추천하기도 하고, 그밖에는 글쓰기, 사회비평, 고전 등 거의 맞춤형 추천이 가능하다. 책을 꾸준히 낸 것의 장점이라면 장점이다.
실제로 그렇게 느끼는 것이, 글을 쓰고 책을 낼 때마다, 다양한 사람들과의 접점을 늘려가는 것 같다. 사회비평 좋아하는 사람은 대개 <분노사회>나 <인스타그램에는 절망이 없다> 같은 책을 읽었다 하고, 그러면 그런 쪽으로 한참 이야기를 나눈다. 그런 데 전혀 관심 없어 일상이나 사랑, 삶의 태도에 관심 있는 사람은 또 그런 부류의 내 책을 읽었고, 그래서 그쪽으로 이야기를 나눈다.
그럴 때면, 나에게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 있는 문 바꾸는 장치 같은 게 있어서, 매번 다른 곳을 들락날락거리는 하울처럼, 자아의 중심을 바꾸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런 자아들은 대개 다 나의 진심이기도 해서, 나로서는 내 마음의 어느 측면으로 더 깊이 소통하느냐 정도의 차이로 다가오는 것 같다. 그 각각의 진심들을 나름대로 깊이 파고들고자 해왔던 셈이다.
사실, 살아가다 보면, 우리는 누구와는 밤새 정치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누구랑은 종교나 문화 이야기를 깊이 있게 나누기도 한다. 또 누구와는 재밌는 영화나 드라마 얘기만 한참 하기도 하고, 누군가랑은 다소 깊이 있는 삶의 태도나 행복에 대한 고찰을 나누기도 한다. 그렇게 보면, 나에게도 글쓰기란 그 조금씩 다른 친구들과의 만남 비슷한 셈이다. 매번의 백지는 조금씩 색감과 질감이 다른 나의 친구들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나는 글쓰기에 대해 이야기할 때 '수다떨기'랑 거의 다를 게 없다고 말하곤 한다. 그때그때 수다떨고 싶은 주제가 있으면 친구들에게 돌아가면서 전화하듯이, 나도 그저 저마다의 백지와 이야기나누듯 글로 써내는 것이다. 실제로 댓글이나 리뷰, 직접 만나 책 이야기를 나누니, 대화 그 자체와 크게 다르지 않기도 하다. 그렇게 보면, 나의 모든 글쓰기는 그 자체로 '북토크'이기도 한 셈이다.
이번 책인 <사랑이 묻고 인문학이 답하다>는 '사랑'에 대해 수다 떨고 싶은 사람들과 나눈 이야기다. 그 중에서도, 자기만의 사랑 이야기 뿐만 아니라 다양한 관점의 사랑을 궁금해하는 사람과 나눈 이야기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나는 또 그런 사람들과 이야기할 기회를 얻은 셈이다. 아마 누군가는 그 책 잘 봤다며, 자기가 생각하는 사랑에 관해 내게 이야기할 것이다.
그렇게 나는 또 지구 어딘가에 있을, '사랑 이야기' 나눌 친구를 얻는 것이다. 나에게 책쓰기란, 지구는 둥그니까 자꾸 책쓰고 나가면 온 세상 어린이를 다 만나고 오겠네, 라는 노래가 어울리는 무엇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