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면서 하나 꼭 익히면 좋은 기술은 타인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것 같다. 진심으로 눈앞에 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귀기울여 들을 줄 아는 능력 하나가, 의외로 많은 것을 해낸다. 예전에 한 작가가 독서 모임을 진행하는 것의 어려움에 대해 내게 물은 적이 있었는데, 나는 그냥 가만히 한 번 잘 들어보라고 했다. 그냥 잘 들어주기만 해도, 사람들은 알아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고, 그 시간은 풍요로워진다.
언젠가 아내는 내게 사람을 만나서 그 사람이 나와의 만남을 좋게 기억하는 비법을 아느냐고 물었다. 글쎄, 잘 모르겠는데,라고 대답하자 아내는 이렇게 말해주었다. 그 사람이 많이 말하게 하고, 잘 들어주면 된다고 말이다. 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하고, 누군가 자기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해주길 바란다.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누군가의 좋은 벗이 될 수 있다.
물론, '잘 듣기'라는 게 가만히 앉아서 고개만 끄덕이고 '맞아, 맞아'라고만 하는 게 다는 아닐 거라 생각한다. 잘 들으르면, 그가 말하는 의도를 가능한 한 정확하게 이해하고, 그의 입장에서 말을 이어가고, 때론 그가 스스로에 대해 자각하지 못하는 것까지 말해주는 일도 필요하다. 잘 들어주는 일의 핵심은 사실 '잘 이해하기'에 가깝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여기에도 일종의 '문해력' 혹은 '청해력'이 필요하다.
우리 시대 문해력의 문제에 관해, 나는 처음부터 그것이 '타인의 입장에 서는 능력'의 문제라고 말해왔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상대방이 진정으로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고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는지를 이해하는 능력, 나의 입장에서 벗어나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볼 수 있는 능력이 이 이해력, 문해력, 청해력을 관통하는 핵심이라 생각한다. 이걸 이해할 수 있으면, 우리는 대화의 맛 또는 멋이랄 걸 느끼게 된다.
개인적으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대화는, 어떤 피해의식 없이 서로가 서로에게 제3자의 관점을 제공해주면서도, 서로를 이해심으로 받아들이는 그런 대화다. 서로의 이야기를 온전히 들어주면서도, 새로운 제3자의 관점을 제공해주고, 그런 서로의 '관점 제안'에 기분 나빠하지 않으면서, 더 나은 진리를 향해가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 대화랄까? 이런 대화의 시작은 들어주기이고, 그 다음은 이해하기이며, 마지막으로는 새로운 관점 제시로 마무리된다. 이 세 가지가 계속 순환하여 이루어지면, 대화의 즐거움의 세계로 진입한다.
내게는 그런 대화가 가능한 사람들이 있고, 그래서 대화가 즐거운 순간들이 있다. 아내부터 여동생, 친한 작가, 동료 변호사 등 그런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들의 즐거움이 곧 만남의 즐거움이고 삶의 즐거움이라 느끼기도 한다. 피해의식이나 권력 없이, 서로에 대한 선의를 갖고 온전하게 때론 '팩트 폭행'도 하지만 '이해심'이라는 기반을 결코 잃지 않으면서, 서로 신뢰하며 들어주고 이해해가는 그 여정은, 역시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고유하고도 멋진 즐거움이 아닌가 한다.